역대상 19:1-20:8 연전연승, 하나님의 손이 이끄시는 성전 건축 준비
다윗의 군사 정복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다윗의 능동적인 원정 활동으로 이스라엘은 견고한 왕국으로 변화되어 간다. 이런 전쟁의 승리에는 요압과 다른 용맹한 용사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실력이 출중한 용사들과 여러 전쟁에서의 대승은 견고한 다윗 왕조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다윗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이스라엘만이 아닌 열방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어 있었다.
1. 암몬, 아람 연맹과의 전쟁(19장 1절~19절)
1~5절은 암몬 왕 하눈의 도발에 대한 기록이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된다. 암몬 왕 아하스는 사무엘상 11절에서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온 인물로 사울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2절에서 다윗이 나하스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나하스와 다윗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그의 아들 하눈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하스의 장례에 사절단을 보낸다. 하지만 암몬 지도자들은 이런 다윗의 의도를 다르게 해석하고 만다. 장례 조문단이 침략 전, 땅을 정탐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주변국들이 다윗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있던 터라 이런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신하들은 사절단을 잡아 수염을 깎고, 겉옷을 엉덩이까지 중간까지 자른 후 돌려보낸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남성성과 권위를, 겉옷을 엉덩이 중간까지 잘라 하체가 드러나게 했다는 것은 벌거벗긴 것과 같은 수치를 안겨 주었다. 다윗이 보낸 사절단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은 다윗을 모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선전포고와 같았다. 다윗은 먼저 사절단이 매우 수치스러워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친히 사람을 보내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다 오라는 위로의 말을 해준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사신들이 더 큰 수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이 일을 사절단의 잘못이 아니라 이들을 모욕한 암몬 왕의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이제 암몬과의 전쟁만 남았다….
6~9절은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한 암몬 자손들이 자신들이 다윗의 미움을 샀다는 것을 알고 은 천 달란트를 가지고 아람나하라임(메소포타미아, 삼하 10:6에서는 벧르홉)과 아람마아가와 소바로 가서 병거 32,000대와 마아가 왕과 그의 군대를 고용한다. 매우 막강한 군대다(사무엘하 10:6의 기록은 암몬 자손이 고용한 병력은 32,000명(보병 20,000명, 돕 사람 12,000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군대 1,000명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에스라는 적의 군대가 매우 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렇게 모인 군대가 메드바(모압 지역, 헤스본에서 남쪽 방향 10km)에 집결했다. 군대의 집결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요압과 그의 모든 용사를 즉각 출정시킨다.
10~15절에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스라엘이 기록된다. 이 전쟁의 초점은 요압의 전략적 판단과 전술적 실행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요압의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고백을 통해 전쟁의 모든 결과를 여호와께 맡기는 모습과 전쟁을 주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특이한 것은 요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이 전쟁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위험하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압의 이런 모습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만날 때, 결국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요압이 여호와께 전쟁을 맡기고 전투를 시작하자 적들은 그들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다. 여호와께서 요압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압 군대 앞에서 적들과 싸우신 것이다.
16~19절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을 기록한다. 요압에게 패하여 도망한 아람 군대는 원군을 요청했고,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다윗의 군대와 충돌한다. 이 전쟁은 다윗의 군대가 많은 병거를 파괴하고 보병을 죽인다. 역대기는 다윗이 병거 7,000대를 파괴했다고 기록하나, 사무엘하 10:18에서는 700대로 기록한다. 이 전쟁을 통해 아람 연맹은 깨지고 하닷에셀의 지도력 아래 있던 속국들이 다윗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된다. 암몬은 더 이상 아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고립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다윗과 그의 용사들을 주변 나라들은 대적할 수 없게 되어 평화로운 관계로 돌아서거나, 고립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2. 암몬을 완전히 제압함(20장 1~3절)
해가 바뀌어 전쟁하기 위해 나가는 때가 된다. 요압은 암몬 자손의 땅을 계속 파괴하고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포위한다. 이 전쟁이 밧세바 사건의 배경이다. 다윗은 이 전쟁에 출정하지 않고 군대 장관 요압을 중심으로 출정시킨다. 사무엘하 11장에서는 다윗이 요압과 그의 군대를 보냈다고 언급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다윗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밧세바 사건이 이어진다.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전장에서 죽게 한 사건과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을 징벌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본문의 암몬과의 전쟁은 왕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죄를 범하는 그의 이야기 배경이다.
에스라는 사무엘하의 이런 다윗의 범죄 이야기를 모두 생략하고 요압이 랍바를 점령한 것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머문 사실은 흠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요압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신하들과도 함께하시며, 여전히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착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에스라가 다윗의 최대 약점인 밧세바 사건과 우리아 살인 사건을 생략하며 성전 제도를 세우고 성전을 지을 준비하는 다윗을 이상화하고 있다. 다윗의 이런 이상화는 매우 난감하다.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는 이상적인 초점을 유지하지만,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언급하는 사무엘하의 기록을 모를 리 없다. 에스라는 사무엘서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사무엘서와 역대기가 같이 읽힐 것을 전제로 하고 다윗이 심각한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벌을 받는 부분에 주목하기보다는, 성전 제도를 만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평가하는 관점을 견지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분명하나 그 역시 약점이 있고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심판도 받은 인물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1b~3절은 사무엘하 12:26~31의 평행 본문이다. 다윗이 랍바에 등장하여 왕의 머리에서 왕관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에 쓴다. 왕관은 금 한 달란트의 금과 보석이 박혀 있다고 묘사되었다. 금 한 달란트는 대략 34kg이기에 사람의 머리에 쓰기에는 무겁고 크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로 사용하는 왕관이라기보다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며, 한편으로 사람이 아니라 신전의 신상에 씌워놓은 것을 가져왔다고 본다. 학자들은 암몬의 신인 밀곰 신상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어느 해석을 지지하던 왕관으로 상징되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윗이 획득했음을 분명히 한다. 다윗은 아람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와서 나무 자르고 돌 자르는 일을 하게 시킨다. 그리고 다윗은 모든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영광스럽게 귀환한다. 이는 주변 나라들을 다윗이 성공적으로 제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블레셋을 진압함(20장 4~8절)
4~8절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다. 특히 거인족인 르바임 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보아놓았다. 다윗의 전쟁 이야기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시작되고 마친다. 4절은 후사 사람 십브개가 게셀(예루살렘 서쪽, 해안 평야의 북쪽)에서 거인족인 르바임의 후손 십배를 죽인다. 게셀은 블레셋의 도시는 아니지만 블레셋과 인접하고 있기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십배를 죽인 이야기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자, 블레셋이 항복한 것처럼 4절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의지하던 십배를 죽이자, 블레셋이 항복한 것처럼 그들도 항복한 것이다. 5절에서 엘하난이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는 골리앗의 동생이며 골리앗과 동일하게 창 자루가 베틀채 같은 무기를 사용하였다.
6~7절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르바임족을 죽이는데, 이번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대신 신체적 특징이 묘사된다. 기괴한 특징인데, 손발에 여섯 개씩 모두 스물네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신체적으로 다른 모습은 강한 호기심과 추측의 대상이었다. 본문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더 있는 것을 용사의 자질로 묘사한다. 이 가드 사람이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는데, 이것은 골리앗이 전쟁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를 조롱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사람을 죽인 것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었다. 8절은 결론으로 가드의 거인족 후손들이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에 의해 모두 죽었다고 기록한다. 르바임족은 블레셋의 가장 강력한 용사들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군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운 골리앗과의 싸움의 연장으로 여호와의 전쟁은 인간의 힘이나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거인족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부하들과도 함께하시며 다윗이 세우는 이스라엘을 튼튼하게 만들어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귀한 사역자로 사용하셨다. 둘째, 부하들이 다윗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부하들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기에 다윗만이 아닌 다윗의 신하들도 인간 힘의 상징인 르바임 족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나는?
-다윗의 호의를 알아채지 못하는 군주의 판단이 아쉽다.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한 다윗은 종주국으로서 봉신국인 암몬에게 호의(헤세드)를 베풀며 조문단을 파견한다. 하지만 하눈은 다윗이 보낸 사절단을 염탐꾼으로 간주하며 다윗의 선의를 호도하는 방백들의 말을 듣고 사절단에게 큰 수모를 주며 다윗의 호의를 거절한다. 다윗은 대외적으로 수모를 당한 상황에서도 먼저 실추된 사절단의 명예를 배려하는 조처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에 요압과 군대를 보낸다. 암몬 사람들처럼 경솔하게 속단하거나 성급히 대응하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보다 다른 이(사절단)의 상처를 먼저 생각했고, 또 수모를 준 암몬과의 화해를 끝까지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다윗이 보낸 요압은 군대 사령관답게 전략이 치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 전쟁의 승패가 누구에게 달려있는지(13절)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전략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한다.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여 이 전쟁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전쟁임을 선포한다. 그 결과 다윗의 군대는 승리한다. 이것은 오늘날 크고 작은 숱한 영적 싸움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서로 나누고 힘써야 할 격려와 기도의 모습과 연결된다. 함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패배한 아람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재차 쳐들어온다. 하지만 다윗이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여 지휘관을 잃고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이스라엘의 적국 암몬은 고립된다. 계속된 공격과 거듭되는 승전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어갔고(14:17),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의 나라는 더욱 강성하고 견고해진다.
*정말 믿음으로 살고 싶다. 표현할 수 없는 아람 군대와 같은 막강한 세상의 군대가 내 앞에 진을 치고 항오를 벌이고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의 기개가 능력이 되어 나타났다. 두려움 없이 치고 달려오는 요압의 군대를 본 아람 군대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믿음의 기개를 발휘할 충분한 이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구원의 자녀 삼아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믿음이 힘을 내게 한다. 요압의 믿음의 외침은 두려움 없이 달려 나간 이스라엘 군대가 되게 하였다. 그들도 그 믿음의 기개를 이어받는다. ‘요압과 그 추종자가 싸우려고 아람 사람 앞에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가고’ 만다.
*믿음은 전염된다. 그 강한 기개는 반드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대상 18:6, 13)’.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신 은혜는 병사들에게 믿음의 기개로 나타난 것이다.
*다윗의 승전 기록은 “왕권을 위협하는” 블레셋과의 전투(14:8, 18:1)에서 시작하여, 사사 시대 이후 오랜 숙적으로 “이스라엘을 능욕하는” 블레셋에 대한 완승으로 마무리된다. 막대한 부를 자랑하던 암몬처럼, 거대한 장수들을 자랑하던 블레셋도 다윗의 군대 앞에 허망하게 패배한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네피림에서 다윗 시대의 골리앗까지 하나님 나라와 백성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거인들’은 끊임없이 출몰했으나 심판의 철퇴를 피하지 못했다. 나를 위축시키고 위협하는 이 시대의 “거인들”은 무엇일까? 정복하지 않으면 굴복되기에 다윗의 용사들처럼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여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거인이 되기를 갈망하기보다 신앙의 거인 되기를 갈망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준비 과정에서 다윗 스스로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암몬과의 전투를 통해 중계 무역로를 확보하고, 금방패를 노획한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을 완전히 갈무리한다. 여호와의 성전은 결정적인 승리 이후에 세워질 수 있는 안식과 평화의 처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역대기에서 다루지 않지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얻은 완전한 승리는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고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회개(삼하 12:13; 시 32편) 했던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뒤 얻은 승리였다. 다윗의 호의를 무시한 암몬, 스스로 거대한 키와 힘만 믿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업신여겼던 블레셋이 모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솔로몬이 지어야 할 여호와의 성전은 용서와 승리, 평화의 성전이어야 함을 다윗의 생애를 통해 철저하게 각인시키신다.
*주님, 막대한 부도, 막강한 힘도 하나님의 손 아래 무너지고 복종함을 봅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고 있는 내 목회의 여정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손이 이끌어 주심을 믿기에 기쁨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아니면 세상의 대적자들에게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을 성전 삼아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승리와 평안의 걸음을 신뢰합니다. 늘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