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1:1-17 충동질에 걸려 충동적으로…
21장은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서론에 해당한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사무엘상에서는 24장 마지막 부분에 부록처럼 기록되어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건설 이야기 전에 위치하여 성전이 건설될 장소인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으기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인데, 다윗이 자의적으로 시행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탄에게 충동되어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명령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행위를 악하게 여기시고 갓 선견자를 보내어 세 가지 징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다. 다윗은 자연이나 사람에게서 오는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칼’을 선택한다.
1. 다윗의 인구조사(1~6절)
1절에서 사탄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사무엘하 24:1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에 이를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부추기시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인구조사를 한다.
고대 사회에서 인구조사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다. 첫째, 군사를 징집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다. 이런 행위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으로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은 왕이 은금을 많이 쌓기 위한 것이고, 군사를 징집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 숫자에 의지하여 전쟁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유혹은 다윗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 꼴이 되었다. 사탄은 더 많은 숫자와 재물을 갖도록 유혹하며, 그것이 우리의 힘이고 능력이라고 부추긴다. “충동”이란 마음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악한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지만 억누르고 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한 뱀처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역대기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지만, 다윗이 시행한 인구조사는 그가 통합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일어났다. 20여 년 동안 다윗은 20장 초반의 랍바에서 전투와 연관된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긴 고통을 받았다. 연쇄적인 징계였다. 삼하 13장의 암논의 추행 사건, 삼하 14~19장의 압살롬의 반란, 삼하 20장의 세바의 반란 등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통과하고 인구조사를 시행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런 다윗의 범죄와 관련된 징계 이야기는 삭제하고 곧바로 인구조사로 연결한다. 인구조사 사건은 내일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만, 이 사건이 동기가 되어 성전 건축 부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충동을 받은 다윗은 요압과 지도자들에게 브엘세바부터 단까지 인구를 계수하여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이런 다윗의 명령에 요압이 반대하고 나선다. 요압은 다윗의 인구조사가 군대와 세금을 더 얻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요압은 인구조사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일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지만 다윗은 요압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한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결국 다윗의 명령을 따라 요압은 인구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한다.
인구조사 결과 이스라엘의 장정 수는 백십만 명이고 유다의 장정 수는 사십칠만 명이다. 이 숫자에 레위와 베냐민 지파는 빠졌다. 6절은 그 이유에 대해 요압이 인구조사를 혐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압이 인구조사를 끝까지 반대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역대기에만 들어 있는 부분으로 제사를 담당하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은 원래 전쟁을 하지 않으므로 빼는 것이 당연하지만 베냐민 지파를 뺀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2. 하나님의 심판(7~15절)
요압이 말한 것처럼 다윗이 인구 조사한 것을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셨고 이스라엘을 치셨다. 그런데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보고 다윗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죄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신이 죄를 지었고 매우 어리석었다고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이 고백을 통해 다윗은 인구조사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다면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다윗의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세 가지 재앙은 3년 기근, 석 달 동안 적군의 칼에 쫓기는 것, 3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파괴할 극심한 전염병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기대하며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기를 원한다고 고백한다. 이는 여호와의 칼과 여호와의 천사가 언급된 3일 동안의 전염병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다윗은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가장 짧은 기간의 재앙을 선택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에 극심한 전염병은 보내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칠만 명이 죽는다.
다윗은 범죄와 재앙 선택으로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칠만 명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백성을 죽이는 무능하고 잔인한 왕이 되고 만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 정도에 그친다. 15절에서 “뉘우치다”로 번역된 단어는 “후회하다, 유감스럽게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많은 백성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하시고 속상해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로 인해 매우 중한 벌을 내리시기로 결심하셨지만, 막상 자기 백성의 죽음에 마음이 아프셨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전체를 멸망시킬 작정으로 천사를 보내셨지만, 마음을 돌이키시고 이제 족하니 멈추라고 명령하셨다.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다. 칠만 명은 예루살렘 전체 멸망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다윗이 감당하기에는 큰 숫자다.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는 가끔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호와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서 멈추었다.
3. 다윗의 회개(16~17절)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생각을 모르는 다윗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호와의 사자가 여전히 칼을 빼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그는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회개한다. 자신이 죄를 지었으니,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고 백성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이제서야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게 되면서 올바른 해답을 내놓는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을 희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선행되지만,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사탄은 다윗을 “충동”한다. 인류의 조상 아담(대상 1:1)을 유혹하여 세상을 죄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죄의 곤경에 빠트린 것이다. 다윗은 요압의 만류와 충언에도 인구조사를 강행한다. 정욕 때문에 신하의 아내를 빼앗더니(삼하 11:3), 이제 교만해져 하나님의 권한까지 침범한다. 외부의 적들은 잘 물리쳤지만, 내부(내면)의 적(죄)에게 무너졌고, 승승장구하던 나라에 재앙이 엄습한다.
-다윗을 무너뜨린 것은 사탄의 “충동”질에 “충동”되어 넘어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마음 깊이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보려는 마음이었다. 사탄의 충동질은 그 마음에 여지없이 끌려가게 했다. 나를 충동하게 할,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을 잘 분별하여 사탄의 “충동질”에 “충동”되지 않아야 하겠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충동된 다윗의 인구조사를 악하게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 다윗은 자신이 온 이스라엘의 왕임을 증명하고 또 확인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령했으나 이 일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호와의 칼(능력)보다 자신의 칼을 의지하려는 불신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선이라면 그분을 부정하고 불신하는 것은 악이다. 자신의 지위와 본분을 망각하는 데서 죄는 시작된다.
-하나님은 죄를 인정하여 회개하는 다윗에게 선견자를 보내서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택하도록 명령하신다. 신하들에게 불의한 명령을 내렸던 다윗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듣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권자가 누구인지, 이스라엘이 누구의 백성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다. 하지만 자기 백성에게 재앙 내리신 것을 마음 아파하시고 다윗의 진실한 회개에 응답하여 진노의 손을 거두신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주의 긍휼이 다윗을 더 깊은 참회의 자리로 이끌었고 목자의 마음마저 되찾게 했다. 쓰디쓴 징계 속에서 나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 가시는 주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다윗을 충동질하였던 사탄의 충동질은 여전히 나에게도 있다. 현황과 규모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언제나 있다. 충동질을 분별하는 것이 참 어렵다. 다윗은 ‘수’에 대한 충동으로 그의 왕국과 왕권이 안정되어 가니 이스라엘의 강대함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가장 측근이었던 ‘요압’이 했음에도 다윗은 물러서지 않는다. 충동질이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나의 충동질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의 명분과 명예를 위한 충동질이 참 많다. 어찌 다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많은 순간을 인내해 주신 것이 감사하다.
*사탄의 충동질에 넘어가면 오히려 삶이 무너진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작할 때 단지 강성한 이스라엘의 규모를 알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왕의 선택에 따른 처절한 대가를 백성들이 치렀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가 이와 같다.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며 쉽게 충동하여 벌인 일이 내 자신과 공동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올 때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누구나 그 일을 목전에 두고는 이렇게 되리라 생각조차 못 한다.
*죄에 대하여 더욱 분별하는 삶이 되어야겠다. 특히나 사탄의 충동질에 대하여 더욱 분별해야 하지 않겠나? 여전히 초보 담목인 나에게 이 말씀이 좋은 시금석이 된다. 사탄은 자꾸 나의 마음을 충동질한다. 그 충동질에 넘어가지 않기를 구해야겠다. 지금 내가 넘어갈 수 있는 충동질이 이후 성도들에게 어떤 부담으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신중하게 행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재촉’하는 마음일 것이다. 자꾸 재촉하는 마음, 성급한 생각이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할 때 그 자체만으로 멈춤을 외칠 수 있는 과감함이 나에게 필요할 듯하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처럼 여겨져 마음을 급하게 몰고 가지만 막상 이것저것 생각하고 따져보면 그리 급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재촉”함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주님, 목양의 현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나를 드러내고 높이려는 충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탄의 충동질에 제 마음이 충동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붙잡아 주십시오.
*주님, 이스라엘의 목자가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함을 보며 그의 연약함이 여전함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신속하게 돌이키는 그의 모습도 도전됩니다. 연약함도, 돌이킴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