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1:18-30 오르난의 타작마당
여호와께서 선견자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다윗은 그 장소를 값없이 주려는 오르난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게 금 600 세겔을 주어 그 땅을 산다. 다윗이 거기서 제사를 드리니 여호와께서 불로 응답하신다. 그러고 전염병이 그친다. 하지만 다윗은 거기에서 계속하여 제사를 드린다.
타작마당의 주인은 오르난이다. 사무엘하 24:18에서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로 소개된다. 둘은 같은 사람인데 아라우나가 좀 더 원래 이름인 듯하다. 여부스 사람은 다윗 왕조 이전에, 예루살렘에 살던 민족으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이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타작마당은 성 밖의 넓고 평평한 공터에 위치하며 공개된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타작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적 행사들과 제의들이 행해졌을 것이다.
1.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심(18~19절)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 여호와의 천사는 갓 선견자를 불러 다윗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세우기 위해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다윗에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서 있지만, 다윗은 하늘과 땅 사이, 즉 공중에 떠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이기 때문에, 천사는 갓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그곳에 제단을 세우라고 말한다. 명령을 받은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오르난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간다.
2.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산 다윗(20~27절)
20절의 ‘그때에’는 다윗이 타작마당으로 올라오는 그 시각을 말한다. 그 시각에 오르난은 타작마당에서 밀을 타작하다가 천사를 보고 아들들과 함께 숨는다. 평행 본문인 사무엘하24:20에는 이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르난과 네 아들이 숨은 것은 칼을 빼들고 있는 천사에게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도착하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오르난은 나와서 엎드려 절한다. 천사의 존재는 자체적으로 엄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윗과 오르난의 거래와 제사 등은 모두 천사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오르난을 본 다윗은 백성 중에 퍼진 전염병을 멈추기 위해 여기에 여호와의 제단을 쌓아야 하니 타작마당을 제값에 사겠다고 전한다. 이 부분의 원문은 “나에게 달라 / 내가 여호와의 제단을 지을 것이다 / 나에게 달라”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나에게 달라는 반복은 다윗의 다급하고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오르난은 왕이 필요한 대로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땅뿐 아니라 번제를 위한 소와 나무와 곡식까지 그냥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윗은 오르난의 제안을 거절하며 “제값”을 치르고 사겠다고 한다. 오르난 당신의 것으로 여호와께 드리지 않겠다고 강하게 말한다. 여기서 거저 쓰라는 것은 소유권을 넘기지 않고 일시적으로 빌려준다는 의미고, 다윗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얻기 위해 제값(상당한 값)을 주고 땅을 사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을 살 때도 거저 쓰라는 것을 거절하고 제대로 땅값을 지불하고 그곳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특히 현재 일어난 재앙은 자기의 범죄 때문에 일어났으므로 죄를 범한 다윗이 제사를 지낼 제물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은 정당하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상당한 희생을 치른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은 그 땅의 값으로 금 600 세겔을 지불한다. 이는 평행 본문인 사무엘하 24:24에서 은 50 세겔을 주고 땅과 소를 산 것에 비해서 매우 비싼 금액이다. 이것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특별한 성전이 지어질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매우 비싼 금액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윗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번제단 위로 불을 내려 응답하신다.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셨다는 말을 통해 기드온 이야기나, 엘리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이곳이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임을 증명하시고 임재하신 거룩하고 특별한 장소인 것을 강조한다. 즉, 이렇게 여호와께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리신 곳이야말로 여호와의 성전을 짓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되는 것이다.
다윗의 제사를 받으신 여호와께서는 천사에게 명령하셨고, 천사는 그의 칼을 칼집에 꽂는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내려진 죽음의 재앙이 멈추었다. 칼을 든 천사의 존재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더욱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며, 다윗을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윗은 천사를 통해 두렵고 크고 무서운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도 다윗이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죄를 용서하시고 재앙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신다.
이런 모습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지어질 여호와의 성전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성전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 두려운 마음으로 와서 떨며 겸손하게 여호와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면 죄를 용서받는 곳이 될 것이다.
3. 기브온의 성막과 오르난의 타작마당(28~30절)
21:18~22:1은 하나의 단락으로 에스라가 왜 다윗이 성막이 있는 기브온이 아니라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렸는지를 설명한다. 28절은 다시 한번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과 여호와께서 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밝힌다.
29~30절에서는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 드리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기브온에 당시 모세 시대에 만든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적법했다. 하지만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기에 두려워서 기브온에 있는 성막, 즉 여호와 앞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면서 22:1에서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여호와의 성전이며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고 선언하며, 미래에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것을 선언한다.
이렇게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은 여호와의 성전 부지를 여호와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다윗이 이것을 구매하여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참회의 자리를 회복의 자리로….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며 재앙을 거두어 달라는 다윗의 간구를 들으시고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다. 다윗에게 올라가서 재앙이 멈춘 그 장소에(15절)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성전 건축의 시작을 암시한다. 재앙과 회개의 자리를 속죄와 용서, 회복과 결단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스스로 속죄할 수 없는 자책과 죄책의 늪에서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말고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회개와 회복의 단을 쌓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긍휼에서 다윗의 순종으로…. 다윗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며 들은 대로 즉시 순종하여 올라간다. 자신의 타작마당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오르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상당한 값을 지불해서 구입한다. 값진 하나님의 은혜에 값없이 화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재앙을 멈추게 하는 길이라면(22절),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까워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절박한 회개만큼이나 철저하고도 값진 순종이 보인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의 초석은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15절)로 시작하여 다윗의 순종으로 마무리된다.
-다윗의 순종에서 주님의 응답으로…. 다윗이 순종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재앙을 거두신다. 모세가 성막을 처음 세웠을 때(레 9:4),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대하 7:1)처럼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에 내렸다. 다윗의 제사에 대한 응답이지만, 동시에 성막 시대(옛적에)가 가고 성전 시대(이때) 가 도래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22:1).
-성전은 재앙과 진노가 멈추고 회복과 화목이 시작되는 곳이며, 죄 사함과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것은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본문에서 오르난(삼하 24장_아라우나)이 누구인지 자세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천사를 보고 네 아들들과 함께 숨어 지켜보다, 다윗이 등장하자 보고 절하였으며, 다윗이 이곳에서 전염병이 그치도록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겠다며 돈을 주고 사려하자 간절히 사양하며 오히려 다 드리겠다고 말한다(23절). 설명이 필요 없다.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다 드리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오르난 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칼을 빼어든 천사를 보았고, 다윗이 나타나 전염병을 그치게 하기 위한 제단을 쌓기 위해 땅을 요구할 때, 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다. “다 드리나이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의 것을 기꺼이 드림으로 은혜받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앞에 내 것의 귀중함은 없다. 오히려 드릴 것 없어 안타까워야 한다.
*다윗은 회개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19절)’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올라왔다. 그리고 오르난에게서 그 땅의 값을 지불하고 제단을 쌓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오르난은 기꺼이 다 드리겠다며 값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윗은 “반드시” 값을 지불해야 하며, 값없이는 번제도 드리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며 “금 육백세겔(노동자 100년치 일당)”의 금액을 기꺼이 지불한다.
*다윗의 하나님 앞에서 자세가 대단하다. 자기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전염병에 대하여 자신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며 용서의 은혜를 구한다. 지급한 땅 값은 말도 안 되게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기꺼이 지불한다. 어쩌면 그 금액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금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7만 명의 목숨값치고는 작다고도 생각했을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이 용서하는 은혜가 더 귀하고 큰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회개하는 다윗의 모습이 놀랍다. 그는 눈물만 흘린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도 흘렸다. 하나님의 용서하심 앞에 계산하지 않고 주머니를 흘렸다. 제대로 된 용서의 값을 계산하지 않고 ‘달아’ 올려 금액을 치른 것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 이미 다윗은 마음을 바친 것이다. 마음에 한끝 계산이 들어가지 않은 금액으로 산 그 땅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응답하심으로 용서의 증거를 보여주신다. 무자비하게 휘둘렸던 천사의 죽음의 칼이 칼집에 다시 꽂혔다.
*오르난과 다윗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하나님이 용서하는 은혜 앞에 둘 다 “마음에서부터” 진정성 있게 드렸다. 그들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어떤 계산이나, 망설임이 일도 없다.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물질의 계산기가 아니라 마음의 감동이라는 계산기가 “다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은혜 앞에서 작동해야 할 것은 “계산기”가 아니다. 그 사랑과 용서의 마음에 감동하여 화답하는 “감동과 감사의 행동”이어야 한다. 이는 다윗과 오르난이 공통으로 나타났다. 오르난은 천사와 다윗과 그의 말을 듣고 아낌없이 드리려고 했다. 다윗은 자기 잘못으로 인해 해결해야 하는 부채감으로 자신도 역시 “다 드리려고” 작심하고 온 것이다. 이는 이미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왕위조차도 기꺼이 내려놓는 마음으로 고백되어 졌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마음을 받으신 것이다. 재앙이 시작되고 나서 이미 하나님은 용서의 마음을 굳히셨다(14-15절).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천사를 멈추시고 그 정한 용서의 마음을 다윗에게 전달했고, 다윗은 “다 드림”의 자세로 회개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하여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한량없는 긍휼이 부어지는 자리가 되었다. 바고 그 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다.
*내 마음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나의 생계를 위해 타작하며 곡식을 까부르는 곳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의 장소로 변했듯, 내 마음이 나를 위해 어떻게 살까? 온통 생각하며 계획하던 곳이, 이제는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아 주님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으니 “오 맘과 정성을 다해” “다 드리나이다” 반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은혜에 반응하고 감동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저주와 진노의 칼을 거두시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심을 늘 확인하는 장소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는 곳이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된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나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힘써 지켜야겠다.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같은 교회는 다윗, 오르난과 같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반응하는 이들을 통해 완성될 것을 감동해 주셨다. 주님께서 마음으로 반응하는 영혼들을 불러주실 것이다. 마음으로 반응하도록 힘써 ‘가르치게’ 하실 것이다. 마음으로 가르치면 마음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주님, ‘마음’으로 가르치게 하소서.
*주님, 하나님의 진노가 걷히고 생명의 은혜가 회복되는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같은 더온누리 공동체의 예배임을 믿습니다.
*주님, 제 마음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처럼 하나님의 은혜 마당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용서, 화해와 회복의 마음으로 더온누리 공동체를 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