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20 교회 가운데 거니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
황제 숭배를 거절하여 밧모라는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높아지신 인자 같은 이를 보는 영광을 얻게 된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게 된 요한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1. 요한과 그의 소명(9~11절)
요한은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 그는 독자(성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주님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로써 독자와 예수를 연결하여 그들이 주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는 “신실한 증언과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통해 주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인내한다. 믿음으로 견딘다. 인내는 믿음의 동의어다.
요한은 밧모섬에 왜 있는가?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들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적극 강요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서남쪽으로 70~80km 떨어진 에게해의 외딴섬에 유배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위기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 필요했다. 황제 숭배를 가속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관해 증언하는 방식과 논리를 더 강력하게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요한은 ‘주의 날(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안식 후 첫날)’에 성령에 사로잡혀 어떤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주의 날”과 관련한 역사적인 배경은 당시 로마제국의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 달에 하루를 황제 경배하는 날로 지켰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에 하루 동안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날로 지켰다. 대부분의 학자는 이날이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주 첫째 날(일요일)로 지켰다고 인정한다. 오늘날 “주일”이다. 참고로 요한은 “주의 날(큐리아코스, 직역하면 주께 속한)”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가 스코틀랜드어 “Kirk”로, 이 단어가 독일어 “Kirche”로, 영어 “Church”로 연결되었다.
요한은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나팔은 주의 날의 전조나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킬 때 종종 등장한다. 이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려고 나타나실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축 19:16, 19~20).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 일곱 교회 성도에게 말씀하시려고 나타나셨다. 요한은 내가 보는 것, 즉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을 듣는다(11절; 1:2; 출17:14).
이 일곱 교회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통신의 중심지였기에 그곳으로 보내라고 하였을 것이다. 2~3장에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이를 이해할 수 있다.
2. 높아지신 인자 같은 환상(12~16절)
12~20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부르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한다. 12~16절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본 환상이고, 17~20절은 그 환상 가운데 보인 예수께서 요한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본 단락은 구약의 환상 장면을 기술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 등장한다. ‘인자 같은 이’인 그리스도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일곱 촛대는 성전의 일곱 촛대며, 성전 전체를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인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인자와 같은 이’로서 다니엘 7장에서 왕의 통치자 이미지를 지녔다. 요한은 다니엘과 에스겔 환상을 다양하게 인유(引喩, 특정 구절의 문장을 한 절(節)에 인용하여 문장을 수식하거나 표현 내용에 함축성이 있도록 수사하는 방법) 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가 의장을 갖춘 모습은(11절) 왕이나 제사장의 모습이다. 스가랴는 이미 왕과 제사장의 이미지를 결합한 선례를 보인 바 있다(슥 4:3, 11~13).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신구약 중간기 마카비 왕조시대에 왕과 제사장을 겸비했었다. 요한은 이 이미지를 더욱 발전시켜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묘사(15~16절)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 교회는 심판주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한다.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왕과 제사장, 심판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통치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교회는 다니엘의 예언처럼 궁창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단 12:3).
그런데 그리스도의 통치에 어떻게 참여할까? 그것은 죽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묵시의 예언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공동체다.
3. 높아지신 인자 같은 이의 말씀(17~20절)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 13~16절은 환상을 체험한 요한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은 일곱 별을 가지고 있는 권능의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으신다. 이것으로 요한은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다. 이 표현은 다니엘 10:10에서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라는 표현에서 인유한 듯하다. 요한은 다니엘 7:13 인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이것은 환상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리스도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자신을 직접 소개하신다. 그리스도의 위로와 계시는 절망과 타협의 기로에 선 교회를 향한 경고이자 격려다.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이다. 이 표현은 역사의 주관자임을 표현하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현재도 살아계신 분이시다. 로마제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탄은 현재에는 없는 자다(17:8), 또한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정복자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뿐 아니라 현재의 능력이다. 사망의 문화 속에서 생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신다. 성도로 하여금 이 가능성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이가 없다.
19절의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은 무엇인가? 이 표현은 먼저 다니엘 2장을 요한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니엘은 “후일, 장래 일”을 먼 장래에 일어날 일로 표현한다. 즉 요한이 본 것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과 더불어 다니엘이 예언한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다.
19절은 11절의 예언적 위임 명령을 이제 수행하라는 표현이다. 20절에서 요한이 본 것은 일곱 별, 일곱 촛대는 무엇인가? 일곱 별은 천사들이고, 일곱 촛대는 교회다. “비밀(뮈스테리)은 다니엘 2:29, 45를 인유했다. 천사는 교회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책무가 있다. 한편, 지상의 교회가 매 주일에 모이는 이유는 천사는 천상에서 교회를 집합적 대표로서 대변한다(계 8:3~4). 천사는 교회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책무가 있다. 천사는 교회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책무가 있다.
지상의 교회가 매 주일 모이는 것은 천상에서 천사가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경배한다. 이에 상응하여 지상에서 교회는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또한 하늘과 땅의 교회가 소통하고 연합하여,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긴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는 계속하여 천사와 대면하게 된다. 하늘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듯 그와 같이 땅에서도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교회를 통하여 대안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20절에서 요한은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을 언급하는데, 이는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를 가리킨다. 요한을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감추어져 있었는데, 때가 되어 밝히 드러난 하나님 나라이다.
나는?
-주님은 교회를 붙드신다. 본문에서 촛대(교회) 사이에 다니면서 일곱 별(교회의 사자, 지도자, 성도)을 능한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신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키고 계시니 환난이 교회를 넘어뜨릴 수 없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는 여전히 위협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겠지만,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어린양의 영광스러운 신부로 주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21:9).
-예수님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갇혀 있던 요한은 주의 날에 고독과 고통과 고난의 장소인 유배지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게 된다. 로마제국이 그를 묶고 가둘 순 있었지만, 그의 소망마저 꺾지는 못했고, 도리어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다가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동참하는 형제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한다. 주의 제자는 고난의 정점에서 오히려 하늘 안식을 누리며 주님의 뜻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속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대제사장”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은 “인자” 같은 분이시다. 불꽃 같은 눈으로 세상을 감찰하시고, 최종적인 심판의 권능으로 온 우주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생명을 위협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이 아니라 그들마저 심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시다. 죽기를 각오하고 주께 충성하면 주님이 싸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죽음을 이기고, 세세토록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만물의 시작과 끝이 주의 권세 아래 있고 부활의 권능으로 죽음의 권세까지 무력화하셨다. 삶과 죽음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살아계시고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고난을 인내하는 성도의 삶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어렸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의 현장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제자다.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하는)” 자였다. 밧모섬에 있는 그에게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고(10절), 환상을 보여 주셨다(12절). 주님과 동행한 그를 주님이 붙드셨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노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할 만큼 주님을 붙들며 산 요한을 3년의 공생애 기간뿐 아니라 그 이후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밧모라는 외딴섬에 있는 노년의 그를 여전히 붙들고 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붙들고(사랑하며) 살았노라 고백하던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주님이 요한을 붙들고 계셨음을 증언하셨다. 주님을 “증언하며” 산 요한을 주님이 “증언해” 주신 것이다.
*밧모섬의 요한에게 주님은 이런 각지의 공동체들에 계속 “증언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모습을 보여 주신 다. 바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특히 교회를 통치(보호)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로마 황제의 위용과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통치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신다.
*”일곱 금 촛대(교회)”와 “일곱 별(교회의 사자, 성도)”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다(20절). 그의 권위와 위엄(발에 끌리는 옷, 가슴의 금띠, 흰머리와 털, 불꽃 같은 눈, 빛난 주석 같은 발, 많은 물소리 같은 목소리(좌우의 날 선 검과 같은 목소리) , 힘 있게 비치는 해 같은 얼굴(13~16절)은 로마 황제의 위엄과 비교할 수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를 “알고 있는 것”뿐 아니라 “알려 주시는 것”까지 증언하는 사명을 도우시는 주님이시다. “알려 주시며(깨닫게 하시며)” 증언하게 하신다.
*그런데 이분은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성도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분이시다.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 7장에서 표현된 왕의 이미지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자신을 이 “인자”로 부르셨다. 만왕의 왕이시라는 거다. 12~16절의 묘사는 통치자인 동시에 심판자의 이미지(검과 같은 목소리, 불꽃 같은 눈)로 등장한다. 날로 노골화되는 로마제국 황제 숭배에 대항하여 진정한 이 세상의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자”의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성도가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자기 멋대로 사는 이 세상, 거대 권력에 속하여 이끌려 가는 세상인 듯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는 영적인 저항이다. 성도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래 예배가 소홀해지는 것은 곧 주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음과 시간이 허비된다는 의미이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권면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듣고 본 주님의 모습과 음성은 그가 그토록 사랑한 주님이셨다. 그는 이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네가 보는 것을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듣고 확인하려고 돌이켜 볼 때 보여 주신 주님의 첫 모습은 “일곱 촛대(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이었다. 주님께서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과 똑같았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로마 황제 숭배가 격해지면서 흔들리는 교회들 속에 주님은 여전히 계셨다. 교회들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는 핍박자들만 보면서 신앙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 흔들리는 교회 가운데 계셨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주님이 항상 함께하여 주시겠다는 그 말씀을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요한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 주님이 보이질 않는다고 투정할 때가 있다. 삶이 괴롭고 힘들어 더욱 그런 표현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주님이 거니시고 계신다. 그런 나의 연약함 사이를 주님이 거니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탓하시지 않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대로 증명해 주심으로, 이 편지(말씀)를 굳게 붙잡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주신 것이다.
*주님, 가장 처절한 고통의 장소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어 다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리로 보내시는 모습을 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함께 거닐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 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 속에서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 가르쳐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