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7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2~3장은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곱 교회라는 것은 “7”이라는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를 통해 요한 당시 세계의 모든 교회와 전 우주적 교회를 지칭한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행위, 수고, 인내를 칭찬하시고, 또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사랑을 버리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서로 나누지 않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서쪽 에게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소아시아 지역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항구가 있는 곳이다. 사도행전 18:18~21에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말기에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후에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이 오랫동안 목회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에베소 교회에 제일 먼저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럽다.
1. 칭찬(1~3절)
주님은 교회를 잘 아신다. 정보나 소문이 아닌, 교회 속에 함께 계셔서 코이노니아를 하시기에, “경험적”으로 잘 아신다. 주님은 먼저 교회의 장점을 격려하신다. 하지만 단점도 주목하여 보신다. 이 과정에서 일일이 점검하면서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고 신실하게 기다리신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간이 되면 경고하시고 책망하신다.
에베소교회는 복음이 처음 소아시아에 전파될 때 그곳의 중심지였다. 고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지만, 에베소가 더 중요했다. 아데미 여신 숭배가 성행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 행정관이 소아시아에 방문할 때 들어가는 항구 도시이기도 했다. 그 지역의 관문 도시인 셈이다. 에베소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성전을 점검하는 제사장처럼 등장하신다. 때로는 군대나 행정조직의 상태를 점검하는 감찰관처럼 등장하신다. 주님은 에베소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빈틈없이 살피신다. 그래서 “안다”고 하신다. 신의 부재 시대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은 바로 “안다”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에베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즉 그들이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아셨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악한 자들, 즉 거짓 사도와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니골라당(6절)이라고 불리는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검증하여 거짓을 밝혀냈다. 그들은 ‘시험하여’ 잘 분별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존재들이다. 주도면밀한 수고로 그 정체를 밝혀낸 것은 칭찬을 받아 마땅한 태도였다.
주님은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점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첫째, 행위와 수고와 인내에 대해 칭찬하신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유사하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살전 1:3)인데,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세 개의 기둥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 인정받은 교회였다.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고, 사랑은 수고로 열매를 맺는다. 소망은 인내로 생명력을 갖는다.
둘째, 교리적 정통성(살전 1:3)과 신학적 분별력으로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를 검증하여 배척했다. 당시 교회에는 순회 사역자들이 있었다. 사도들도 순회 사역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초기 기독교는 손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일부 순회 사역자들은 잘못된 교리와 도덕적인 흠결과 사리사욕에 빠져 있기도 했다. 이들은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사회의 견유철학자들과 같이 행동하였다. 말은 그럴싸한데, 전혀 행동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자들과 비교될까 조심했다. 그래서 자비량 사역을 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순회 사역자들을 분별하기가 참 어렵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이 교묘하게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에베소 성도들은 자칭 사도라고 하는 자들을 철저히 검증하여 거짓을 밝혀냈다. 그들은 ‘시험하여’ 잘 분별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존재들이었다. 주도면밀한 수고로 그 정체를 밝혀낸 것은 칭찬을 받아 마땅한 태도다.
2. 책망(4절)
“그러나”라는 강력한 반전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에베소 교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당시 에베소는 주요 항구 도시였다.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리적인 영향력이 컸다. 주님은 이런 도시에 있는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정죄하신다.
첫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인지 알 수 없다. 성경은 둘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표현될 때 진실하기 때문이다. 에베소 성도들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았지만, 처음만큼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소홀해진 듯하다. 그 결과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교리적인 순결과 충성이 사랑에 대한 대체물이 될 수 없음을 그들은 몰랐다.
첫사랑은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의 사랑이다.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잃어버렸다(아피에미)”는 “포기했다”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 에베소 교회는 의지를 발휘하여 첫사랑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첫사랑을 포기할 만큼 그들이 마음에 둔 것은 무엇일까? 결혼 관계로 빗대자면 이혼의 위기에 처할(렘 2:2) 만큼 처음 마음이 식어버렸다. 계시록 전체 맥락은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마 24:12).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고 동화되어 가는 사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에베소 교회 다음 세대는 첫 세대가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을 상실했다.
3. 해결책(5~7절)
에베소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망각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심각한 경고를 받는다. 이것은 종말적인 궁극적 구원과 관련 없다. 교회의 현재 상태에 대한 경고다. ‘촛대’는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의 상징이다(슥 4장). 이스라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요, 이방인의 빛이다(사 42:6~7; 49:6).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마 5:14). 촛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세상을 밝히 비추는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교회는 촛대가 서 있는 교회다(슥 4:11~14).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음을 선언하는 영적인 사망 선고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방법은 “기억과 회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5절). 개역개정이 “생각하고”로 번역했으나 성경 전승에서 “기억(므네모뉴오)”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이 단어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상고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기억은 역사적 신앙인 기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신앙적 회귀 본능”은 신앙 생명에 있어 본질적이다. 신앙적 기억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방향 감각을 잃는다. 회개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참회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의 재설정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신앙의 앞 세대처럼 신실한 복음 증거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지중해 사회에서 사랑은 ‘들러붙는 것’으로 이해했다. 미움은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상태는 처음 사랑에서 ‘떨어진’ 상태다. 막막할 수도 있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것은 “니골라 당”을 미워한다는 것이다(6절). 니골라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니골라(백성을 정복한다)와 발람(백성을 삼킨다)은 같은 뜻을 가진 헬라어와 아람어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이자, 점쟁이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훼손한 장본인이었다.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미워한다. “미움”은 거리를 두고 떨어뜨리는” 행위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7절의 “이기는 자(니카오)”와 6절의 니골라(니콜라이테스, 백성을 정복하다)는 언어 유희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이 에덴에서와 같은 친밀한 교제의 회복을 원한다는 초청이다. 인류와 신앙의 원천으로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선물들, 하나님과의 격의 없는 친밀한 교제뿐 아니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가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원래 소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이다.
이렇게 아시아 지역의 관문 도시에 자리 잡은 교회에 주시는 약속, 창조의 원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나는?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악과 거짓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를 아셨다. 주의 이름을 위해, 진리와 교회의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신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훼손해 가면서까지 교회 문턱을 낮추어 사람 수를 불리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자신들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주님은 다 아셨다. 그러니 우리가 행한 일에 정당한 평가가 따르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낙망하거나 낙심하지 말 일이다. 영적으로 이단이 창궐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 시대에, 이단의 가르침과 세속적 가치관에 대한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이 수고를 알아주시는 교회였다.
-인내로 믿음의 싸움을 견디고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고 믿음의 역사에 힘쓰면서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다. 첫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할 수 있고 이단을 거절할 수 있고 주님을 부지런히 섬길 수 있다. 이렇게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내 신앙이 일곱 별을 붙드신 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 되지 않으면, 나는 내가 하는 사역을 사랑하는 데 그칠 수 있고, 그것이 모든 타락의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한편, 교리적 순결과 충성이 주님과 형제를 향한 사랑에 대한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느 순간 이후부터 주님이 사랑의 결핍을 경고하시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에베소 교회가 뼈아픈 진단을 인정하고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하면 에덴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나누었던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지체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주님은 생명의 교제에 초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은 언제든 기억하고 돌이키면 회복을 약속하신다.
*사랑보다 ‘행위, 수고, 인내’에 더 익숙한 내가 아닌지 성령의 음성으로 듣고 묵상하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할 수 있다. 부지런히 일할 수 있다. 나는 특히나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떨어지는(타락) 시발점이다. 사랑이 행위에 가려 지기 시작하면 타락한 것이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정통(전통)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킨다.” 그렇다!. 성경적이라는 신앙적 고집과 충성이 자칫 주님과 이웃(형제)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앞설 때, 그런 “행위, 수고, 인내’가 넘쳐나도 촛대(하나님의 임재)는 옮겨진다.
*첫사랑을 지키는 것은 나의 행위, 수고, 인내가 아니다. 첫사랑을 받은 그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늘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라 명령하신 것이다.
*나는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지키고 있나? 받은 사랑 이어가고 전해 주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랑을 이야기 하나? 주님의 사랑인가? 나의 행위, 수고, 인내의 사랑인가?
*영적 환기의 방법이 “늘 기억하는 것”이라면 일상에서 환기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간도 꼭 가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은 나의 영적인 환기 시간이다. 말씀을 통해 나의 행위, 수고, 인내를 점검한다. 내가 혹시 주님의 사랑보다 “일”을 더 사랑하지 않는지 생각하고 점검하는 시간이 묵상 시간이다.
*말씀이 나의 “행위, 수고, 인내”를 기억나게 하고 이런 것들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기억나게 하여 “첫사랑”을 더욱 선명하고 도드라지게 드러나서 나의 영혼을 지키실 줄 믿는다. 일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실 줄 믿는다.
*주님, 행위, 수고, 인내를 이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풍성하여져서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첫사랑을 잊지 않도록 늘 사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