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서머나, 버가모 교회에 이르신 말씀 [계 2:8-17]
 – 2025년 07월 04일
– 2025년 07월 04일 –
계 2:8-17 서머나, 버가모 교회에 이르신 말씀
 
에베소 교회에 이어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말씀이다. 서머나 교회는 비교적 건강한 교회다. 가난한 도시에 자리잡은 교회지만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다. 위협적인 유대인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신실한 증인이 무엇인지를 증명한 교회다. 그들은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버가모 교회는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의 기로에 선 교회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다. 타협과 융화를 통해 동화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충성된 종 안디바의 예를 들어 권면하신다.
 
 
 
1.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8~11절)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아시아의 왕관이라고 불리웠다. 당시 소아시아의 첫 번째 도시라는 타이틀을 걸고 에베소와 경쟁하였다. 서머나에서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8~9절은 서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이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가난하나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하신다.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인데, 몰약은 두드리고 으깰수록, 그리고 짓누르고 부서질수록 더욱 향기를 뿜어낸다. 고난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절망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고난중의 소망이 된다.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으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등장한다. 그리스도는 서머나 교회가 반전 드라마를 쓰게 하는 근원이시다. 고난과 핍박이 심할수록, 신실한 증인은 십자가와 부활의 향기로 역사를 장식한다.
 
왜 서머나 교회가 환란과 궁핍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고대 도시는 시민 사회다. 도시의 질서와 번영을 위해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요구했다. 문제는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관련하여 황제숭배에 충실할 것을 강요했다. 이를 거절하면 시민의 의무뿐 아니라 애국적이지 않다고 간주당했다. 그들은 도시의 혜택을 누릴 수 없도록 배제 당한다. 또 일종의 상인조합과 같은 길드는 수호신을 숭배하는데, 수호신 숭배를 거부하면 모든 거래에서 배제했다. 서머나 교회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겪었던 시험에 직면한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시민 종교에 참여하여 종교적 애국심을 발휘하고 상업적 유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 것인가의 두 달래길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은 서머나의 유대인들의 비방과 고소가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고, 황제 숭배도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면제를 받았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무신론자이고 애국적이지 않다고 비방하고 고소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소명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라 로마제국을 통한 사탄의 통치에 부역하는 자들의 의미가 담긴 “사탄의 회당”이라고 지칭하셨다.
 
10~11절에서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격려하신다. 서머나 교회는 수고의 향기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시켰다. 고난이 거셀수록 그 향기가 더욱 진하게 퍼져 간다. 주님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몇 사람이 투옥되는 시험을 닥칠 것이다. 그런데 잠시다. 10일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시험을 받았던 일시적인 시련의 기간을 상징한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왕에 대한 충성 표시이자 신과의 혼연일체가 된다는 일상적인 의례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불이익과 함께 사회적 파장이 따른다. 교회는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귀의 유혹은 매우 교묘해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사회적으로 압박을 받게 한다. 그리고 정치적 타협을 제시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저항해야 한다. 사탄이 육신을 투옥시키고 심지어 죽일 수 있어도 둘째 사망의 권세는 없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주신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10:28). 고난에 직면한 교회는 죽기까지 신실해야 한다.
 
10절의 “죽도록 충성하라”는 번역에서 “충성(피스토스)”은 “신실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믿음(피스티스)을 신실함으로 증명했다(약 2:21~22). 순교를 각오하고 신실한 증언을 하라는 격려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 충절을 바치지 않거나 이익집단의 논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비난과 격리와 모함과 혐오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의 가치를 희생시키도록 요구할 때는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시민 사회나 어떤 종교 집단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가 아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제국의 유혹에 저항하라! 시민 종교의 편리함을 거부하라!
 
 
 
2.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12~17절)
12~13절을 통해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셨음(사 11:4)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1차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악의 나라들에 칼을 겨누고 심판하신다. 사형 처형권을 휘두르는 로마제국에 대한 반박이다. 진정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정의를 내세운 로마의 불의한 사회 체제를 심판하신다. 또한 이런 제국의 힘에 굴복하여 타협하고 배교하는 교회에도 칼을 겨누신다.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라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상의 도시였다. 수많은 신전들에다가 특히 황제 숭배가 문제였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 숭배를 조직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핍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아시아의 지방정부가 앞다투어 자발적으로 황제 숭배의 신전을 유치하였고 간헐적으로 기독교를 반애국적, 반시민사회적, 또는 무신론자로 몰아서 핍박하였다. 이로 인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하였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는 배교하지 않았다. 안디바는 집단 기억으로 남아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서머나의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신다.
 
14~16절의 사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고 경제를 통해 삶의 현실을 통제하고 조종한다. 종교와 정치 또는 종교와 경제의 분리는 사탄의 전략이다. 고대 사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한 체제로 운영되었다. 우상숭배에는 저항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타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발람은 ‘그가 백성을 삼킨다’는 뜻이다. 니골라는 ‘그가 백성을 이겼다’는 뜻이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이용하는 자들이다. 점쟁이의 교훈이다. 성공과 행운을 위해서는 신앙을 팔아먹도록 만드는 교훈이다(유 1:11). 요한 당시 발람의 추종자들은 우상숭배는 거부하지만, 우상에게 봉헌한 제물을 먹게하였다. 식사는 영양 보충의 기회가 아니라 사회적 교제의 자리다. 집단의 응집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사회 의식이었다. 발람의 추종자들은 상권을 장악한 길드에 참여하고, 황제 숭배 의례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음식을 먹는다. 이방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헛된 것에 제사를 드린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거짓 교사들은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주장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는 오류를 낳았다. 결국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만드는 장본인들이었다.
 
탐욕은 부요를 가져오고, 신앙은 가난을 가져온다는 유혹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안에서 교묘하게 활동하는 발람은 누구인가? 효과적인 사회 활동을 해야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교회가 부와 권력과 손을 잡고 그들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달리 교리적 순결성에 너무 무관심하다가, 타협적이고 혼합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17절의 그리스도는 버가모 교회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발람의 길을 따를 것인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감춰진 만나와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은 잔치의 초대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또, 감춰진 만나는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이 누린 만나를 상기시킨다. 만나는 ‘일용한 양식’의 상징이다. 횐 돌은 보통 사면 투표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는 출입증으로 사용된다. 본문의 흰 돌은 세상 권력이 우상숭배 하는 제의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범죄로 판결한 결정을 뒤집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들 약속은 우상숭배의 종교, 사회적 환경 속에서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나는?
-주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현재의 환난과 궁핍을 넘어 또다시 엄습할 고난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충성하라고 하신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고난의 시간에도 끝이 있을 것(십 일 동안)이다. 신뢰하는 자들에게 참아낼 힘을 주실 것이며 죽음에 이르더라도 영원힌 생명만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으며, 그 끝에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이 있다.
 
-물질적으로 부요했으나 영적으로 가난했던 라오디게아 교회(3:17)와 달리, 서머나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였다. 주님은 황제 숭배 거부와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인해 혹독한 환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주를 향한 충절을 지킨 그들을 “부요한 자”라고 인정해주신다.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을 두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였다.
 
-버가모에서 고난이나 죽음은 위협이 아니라 실제였다. 사탄이 가장 큰 권세를 휘두르며 성도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안디바가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 예수처럼(1:5) 그리스도만을 “주”로 증거하다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 성도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로마 재판석의 칼의 힘을 능가하는 최종적인 심판의 권능을 갖고 계신다. 그러니 그들이 강요하는 로마 총독이 아니라 그들마저 심판하실 예수님이다.
 
-목숨을 걸고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던’ 이들이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버렸다. 충성의 대상을 그리스도에서 로마 황제로 바꾸라는 직접적인 위협에는 단호히 맞섰으나, 문화적 적응과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며 간접적으로 타협을 요구하는 가르침을 수용한 것이다. 우리가 분별하여 싸워야 할 대적은 “반(反)복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키는 “반(半) 복음”이나 유사 복음이다.
 
 
*에베소교회에 이어 서머나, 버가모, 어느 곳 하나 쉽게 신앙생활 하는 교회가 없다. 내적인 문제로 스스로 무너지든, 외부의 핍박을 꿋꿋히 견디든, 스스로의 타협안에 무너지고만 모습이든, 환난이나 궁핍을 견디는 모습이든 평탄한게 없다. 사실 이런 모습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 아닐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유혹받는 길이 믿음의 길이 아닌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12절)의 모습은 사람을 칼의 권한으로 다스리고 있던 로마 총독과 비교하게 된다. 주님이 로마 총독의 검보다 더 예리하고 궁극적인 심판의 검을 들고 서 계신 것은 이 땅의 성도들이 진정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이단의 미혹을 받아서 타락의 길을 걷는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님은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주님을 배신하고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의 대적이 되어 그들과 싸우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이기는 자는 만나와 흰 돌, 즉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발람과 니골라당에 익숙한 교회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탐욕에 물든 교회, 자기만족, 자기주장에 함몰된 교회…. 복음에 집중하기 보다 이런 저런 행사, 프로그램등에 함몰된 교회가 아닐까? 바삐 돌아가는 프로그램이 복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나? 복음이 나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나? 
 
*자기 합리화의 덫에 이미 매여 있는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단호하다! “회개하라!”이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한 요청도 단호한 회개였다. 순교자가 배출된 공동체였지만 이것(발람의 가치) 저것(니골라당의 주장) 섞여있는 버가모에게도 역시 단호한 회개를 요청하셨다. 살 길은 오직 회개다! 돌이켜 다시 행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께 충성하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 대적과 싸우시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주님을 버리면 주님은 우리와 싸우실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모습은 주님과 기독교를 직접 반대하는 것에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세속적 물질주의나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승리지상주의를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수용하고 부추기기까지 하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분별하며 싸워야 할 대적은 반(反) 복음이 아닌, 우리 영혼을 무디게 하는 반(半)복음이다.
 
*세상은 진실보다 거짓으로 행세하더라도 힘만 있으면 상관 없다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진실앞에 늘 서야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철학, 학문, 상황, 흐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교회는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진리를 붙잡는 것보다 다른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겠다!
 
*진리에 충성(신실)해야 산다! 나는 무엇에 신실하고 성실할까? 서마나교회가 환란과 궁핍, 다가올 고난에도 믿음을 꿋꿋히 지키며 견딘 것처럼 신실한가? 버가모교회가 순교의 피가 흘러 복음에 단호히 서 있음에도 탐욕과 자기합리화의 덫에 빠져 순전한 복음이 섞여버린 것처럼 사는가? 결국 순교자가 배출되었더라도 복음이 섞이면 곧 영원한 죽음임을 선명하게 보이시며 더욱 복음에만 단호히 설것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깊이 받아 들여야 한다. 섞이면 죽는다!
 
 
 
*주님, 좌우에 날서 검을 들고 서 계신 주님만을 더욱 더 두려워하며 서겠습니다. 
*주님, 발람과 니골라당에 함몰된 교회는 진리를 대적하더라도 그것을 합리화함을 봅니다.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발람과 니골라의 유혹을 분별하며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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