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13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다. 두 교회에 상반된 말씀이 주어진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몽유병 환자 또는 식물인간과 같은 교회로 말씀하신다. 반면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지만 큰 교회라고 하신다. 사탄의 회당을 굴복하게 만든 교회이자, 승리한 교회며 어려움을 극복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환경이나 주님의 평가에서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사데 교회는 부요하고 남부러운 것이 없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생명력이 전혀 없는 교회로 꾸중만 듣는다. 반면, 발라델비아 교회는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또한 사탄의 강력한 도전 가운데 있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로 칭찬을 받는다.
1. 사데 교회를 향한 책망과 명령, 그리고 칭찬(1~6절)
사데는 고대 루디아 왕국의 수도로 중요한 무역 통로에 위치하고 비옥한 평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삼면이 450미터의 절벽으로 이뤄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6~10만의 인구가 살았고 양모와 모직, 염색 산업이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이자 군사 요충지이기도 했다. 경치가 아름답고 찬란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신화가 탄생한 곳으로 금 제련이 유명한 도시였다. 또한 당시 가장 큰 유대인의 회당이 있던 곳이다. 주후 17년에 큰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10년도 되지 않아 황제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재건되어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다. 사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략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도시로,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역사상 단 두 번만 함락될 정도로 견고한 도시였다. 주전 547년 페르시아 고레스가 침략하여 고전하다 소수의 병력을 허술하게 경비를 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 성벽 틈을 찾아서 승리하게 된다. 이후 주전 195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일한 방법으로 사데를 점령했다. 2절의 “일깨어(그레고레오, 깨어나라, 경계 태세를 갖추라(alert)”와 3절의 “도둑같이 이르리라”라는 경고는 이와 같은 역사적 교훈을 일깨운다.
이런 사데에 있는 교회에 주님의 진단과 처방은 선명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데 교회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 같다”고 말씀하신다. 사데 교회의 특징은 신앙고백과 명성에 비해 영적 건강은 좋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처방은 단순하다. 먼저 깨어나야 한다. 과거의 철옹성 명성으로 현재를 살아갈 수 없다. 영적 건강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깨어나는 것이다. 그다음은 그나마 “남아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마저 죽게 되면 회생 가망이 없다. 그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이미 받고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급선무다. *”받고 들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들은 말씀과 받은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깨어나서, 영적 전투에 임할 수 있다.
4~6절은 주님의 칭찬이다. 사데 교회의 문제는 이방인 사회 속에서 복음의 증인으로서 존재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에 무력하게 대응했고, 과거의 명성을 우려먹고 있었다. 이런 교회에 희망이 있을까? 이사야 6장은 이 질문에 훌륭하게 대답해 준다.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는 살아 있고 거룩한 씨는 남았다. 문제는 이 들음에 동참하는 자는 늘 소수다.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는 흰옷을 입고 어린양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하다. 교회는 흰옷을 입은 성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성도,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천사 앞에서 증언하는 성도 몇 명만 있어도 회복과 회생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2.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7~13절)
7~8절은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묘사다. 빌라델비아는 신실한 교회다. 일곱 교회 가운데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아무 책망도 받지 않았다. 빌라델비아는 버가모의 왕이 200년 전에 창건한 도시다. 자신에게 충성을 보인 형제를 기념하여 “형제의 사랑”이라는 뜻으로 도시 이름을 명명했다. 지진대 위에 건설된 도시는 수많은 지진으로 문화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특히 당시 가장 최근의 지진은 AD 17년에 일어나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다. 요한이 편지를 쓸 때도 여전히 수많은 건물과 신전들이 재건되고 있었다. 한편 빌라델비아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가 남다르게 강했는데, 그들은 서머나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박해하고 축출했다. 당시 인구 4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터를 잡은 교회가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아시고 계셨다. 작은 교회, 작은 능력,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도 증언의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였다. 그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배교 행위를 하지 않는다. 타협하거나 동화되어 흡수되지 않았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의 행위를 아신다고 하신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셨다. 그들은 힘없고 약하지만, 주님이 열어 두신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문은 구원의 문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자신이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0:7, 9).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간 양은 예수의 양이다.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은 양이다. 유대인의 회당 문은 그들에게 닫혀 있지만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열린 문은 전도의 문이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열왕을 항복시키고 정복한 도성의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사 45:1).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에 “열린 문”을 두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열린 문 교회가 된 것이다. 주님은 작은 공동체인 빌라델비아교회를 능하게 하셔서 대적의 문을 취하게 하신다. 작지만 증언의 효력을 드러내게 하신다.
9절을 통해 교회가 빌라델비아 유대인들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빌라델비아에는 상당수의 유대인이 있었고 회당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서머나 교회와 비슷하게 늘어나는 주님의 제자들을 경계하며 자신들의 특권이 제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회당 출입을 금지한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진정한 회당 문은 열려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다.
빌라델비아교회의 문제의 시작이 도시의 유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길드와 시민 사회에 안정된 기반을 구축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부터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였다.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회당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한 약속의 진정한 유업을 이을 자가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인가? 누가 참 회당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열린 문이 어디에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하여 계시록은 의외의 대답을 한다. 그것은 유대인 회당 중에서 몇몇이 교회로 와서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과 하나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사 45:14; 49:23; 60:14). 이와 같은 말씀이 성취된다. 빌라델비아의 증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돌아온다. 복음을 증언하는 교회는 대적을 향해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대적의 문을 취한다.
진정한 교회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와 정죄함으로 대적을 공격하거나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다. 오히려 대적에게 문을 열어 돌아오도록 만든다. 이후에 언급되는 11장의 두 증인이 그 모델이다.
12~13절을 통해 이기는 자는 이 땅에 임하는 새 예루살렘(계 21:11)의 영원한 거주민이 된다. 불신자들(땅에 거하는 자들)이 환난을 당할 때 성도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된다. 환란으로부터 물리적인 이동이나 혹은 격리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로부터 성도를 영적으로 보호하신다는 의미다. 환난으로 인해 육신은 해를 입어도 영은 절대적으로 보호하신다. 비록 적은 힘을 가졌으나 그들이 가진 것을 굳게 잡고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중단 없이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속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 그 사람의 몸에
이와 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에 의해 회당에서 쫓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마지막으로 완성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른 교회, 사데 교회는 명목상의 교회일 뿐이었다. 그들의 실상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영적인 상태였다. 겉은 활기차고 화려해 보였지만, 속은 죽은 송장처럼 영적 생명이 고갈되고 피폐해져 있었다. 성령(일곱 영)의 교통과 능력을 잃어버린 결과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안일한 인식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외적인 화려함과 분주함은 쉽게 내적인 허위와 부정을 감추거나 자신을 속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외형보다는 믿음을 결과보다는 동기를 성공보다는 성결을 보신다.
-안과 밖이 다른 교회, 주님은 세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사데 교회를 일깨우신다. 자신을 일깨우는 준엄한 책망을 듣고 일어나서, 복음과 은혜를 기억하고 지켜,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굳게 하고 행위를 온전히 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회개이고 회복이다. 더는 새로운 깨달음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그것으로 인한 인격적 갱신도 없는 무미건조하고 길들여진 신앙과 삶이 아닐까….
-오늘과 내일이 다른 교회인 빌라델비아교회, 지금은 문제없는 듯하지만, 무사안일한 신앙에서 깨어나지 않는 자에게 내일엔 도적같이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타협 없는 신앙으로 순전한 믿음을 지킨 소수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명목상의 교회에 소수지만 주님이 인정하시는 ‘이름들’이 있었다. 화려한 명성으로 퇴색되어 버린 신앙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작고 미약해 보였지만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변절하지 않는 신앙의 대가로 세상과 유대인들로부터 혹독한 배척과 소외를 당했지만, 원수의 목전에서 높이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인내의 말씀을 지킨 성도들을 하나님도 심판의 때를 면하도록 지켜 주실 것이다. 세상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겠지만 신실함을 지킬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사데 교회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사역을 하지만 정작 주님이 없는 행위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사망의 시작이었고 끝이다. 처음 복음, 가르침, 말씀이 내 삶에 끊임없이 나를 개혁하게 하지 않고 그저 여러 일들을 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인식이 주님께 엉뚱한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가 중요하다. 처음 복음, 순전한 복음이 영적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한다.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가? 복음의 공동체인가? 겉과 속이 다른 공동체인가? 겉은 활기차고 화려한데, 속은 죽은 송장처럼 영적 생명이 고갈되어 피폐해져 있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일까? “성령(일곱 영)의 은혜와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자신의 안일한 신앙 인식, 자기 합리화의 덫에 얽매여 일어날 비극일 것이다. 외적 화려함과 명성은 쉽게 내적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를 바라보며 겉이 아닌 속을 늘 바라보고 성령의 깨우침을 따라 갱신의 갱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이기를 기도했다.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안일하고 합리적인 신앙의 안주가 아니라 복음과 은혜를 따라 도전하고 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 활기가 내적으로부터 일어나기를 원한다.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도 그것으로 인한 인격적인 갱신도 없는 무미건조하게 길든 신앙과 삶을 경계하자!
*도적같이 임할 주님은 안일한 신앙과 삶에 길들어 겉모습만 신자인 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진정한 사망의 날이 되겠지만, 몇몇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 주님과 동행하며 적은 능력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한 인생들에는 환희와 축제의 오심이 될 것이다. 명목상의 교회 안에 “인정하시는 이름”을 가진 소수가 늘 있음을 아시는 주님이 그가 바로 나임을 화답할 수 있는 삶이기를 바래본다.
*화려한 명성(외관)으로 퇴색되어 버린 믿음(신앙)을 감추려 하지 말라! 초라한 명성(외관)이라도 말씀대로 반응하고 성령의 도우심에 민감한 믿음을 드러내라! 그것이 살길이다!
*”네 행위를 아노니….” 주님이 나의 행위를 아신다. 이 행위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기 위해 오늘도 성령(일곱 영)과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순종하기를 발버둥 쳐야 하겠다.
*주님, 주님의 준엄한 마음을 기억하여 제게 들려주실 말씀이 빌라델비아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말씀이 되기를 사모합니다. 주여,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