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계 3:14-22]
 – 2025년 07월 07일
– 2025년 07월 07일 –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사데 교회처럼 칭찬은 없이 책망만 듣는 라오디게아 교회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경제적인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부요함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기 만족에 있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히려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참 모습을 확인하고 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영접하여 잃어버린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기를 요구하신다.
 
 
 
1.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난 주님(14절)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동서가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에 자리잡은 상업도시다. 양모로 검은 모직 천을 풍부하게 생산했다. ‘부르기아의 가루’로 알려진 안약 등 의약품과 의학학교로 유명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파묵칼레 온천 지대를 즐겨 찾을 정도로 휴양지로도 유명했다.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반경 10~14km 외부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주후 363년 말시온의 도전에 맞서 최초로 기독교 정경을 채택한 곳이기도 하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등장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첫째, 그리스도는 “아멘”이시다. “아멘, 충성, 참”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65:16의 “아멘”을 도입시켜 확대하여 표현했다. 이사야 65장 전후 문맥은 하나님이 새 창조의 신실한 증인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거짓 증인이고 실패한 증인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한 증인을 부르시고, 라오디게야 교회에 무능하고 실패한 증인이 아닌 신실한 증인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본이시다.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이다(고후 5:17). 사데 교회는 거의 죽은 혼수상태지만, 몇몇 남은 자가 있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이 필요하다. 죽었다고 봐야 할 교회를 신실한 증인으로 살리기 위해 맞춤형 계시자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
 
 
 
2. 수치를 모르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각한 문제(15~17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려움을 모르는 교회다.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언급도 없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없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칭찬은 없고 책망만 열거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탄이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교회, 즉, 영적 감각이 죽은 교회다. 어떤 교회보다도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현실에 안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상 유지만 되면 됐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우구스투스 통치 아래 성취된 로마의 평화는 도시의 번영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라오디게아는 각종 산업과 상업과 금융에 적합한 도시로 자리매김 하였다. 특히 유대인이 많았고,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의 주된 생업인 무역과 장사를 위해 주변 사회와 잘 어울리는 것을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은 사명에 대한 열정이나,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력도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고 불신앙적인 상황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영적으로 미지근한 태도다.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태도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거들먹거리며 양비론에 빠져 분별력과 판단력이 결핍되고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싫어한다. 대단히 아쉽게도 평화주의자의 면모는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야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회에 잘 길들여지고 전투적 성격은 소멸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에 영적 치유나 생명력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만하며 부요하다고 자랑한다는 주님의 지적을 통해 더 실감난다. 모든 것이 충족하고 모든 여건이 안성맞춤인 환경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자기 진단을 하지 못하고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한 교회는 호세아 12:7~14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상인이고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불의함이 없다고도 한다(호 12:8).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정 하신다(호 12:11). 호세아 시대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세벨이 놓은 올무에 걸려 자각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음에도 수치를 모르는 교회’라고 판단하신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당했다. 이런 모습은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와 다름 없는 모습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다.
 
 
 
3. 주님의 처방과 약속(18~2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회개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조건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위선 중의 위선일 뿐이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유효적절하게 해야 한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매우 상세하게 처방을 내리신다. 주님은 교회가 다시 살아날 길을 수치심을 느끼더라도 알려주어야 겠다는 굳은 결심을 보이신다.
 
18절을 통해 첫째, 교회의 장점인 라오디게아의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부자 도시에 산다는 안정감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장점이라고 여기겠지만, 주님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하신다. 금을 제련하듯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 금을 소유한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영적 단정함으로 돌아서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벌거벗었다는 표현에 담긴 의미는 우상숭배에 빠진 상태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구다(사 43:3; 겔 16:23; 23:29; 나 3:5).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자가 가장 수치스럽다. 그리고 영적 시력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위해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신다.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 영적 맹인이 된다. 세상은 선악에 대한 분별, 모조품과 진품에 대한 구분, 가짜 뉴스와 진실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교회가 가짜를 퍼뜨리는 본거지가 된다면, 이미 라오디게아 교회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때문에 영적 통찰력의 회복은 필수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은 것은 권력이나 부나 명예가 아니다. 진리를 알고 역사의 방향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영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선기능을 감당해야 한다.       
둘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19절). 주님은 교회를 사랑한다. 이 사랑(헤세드)은 언약에 대한 신실한 반응이다. 언약적 상호 책임을 지기에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약에 대한 열정을 폭력으로 표현한 사건이 있다. 민수기 25장의 우상 축제에서 이방 여인과 간음하여 진영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자 돌이키지 않고 이방여인을 자신의 장막에 함께 들어가는 이를 창으로 꿰뚫어 죽여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한 비느하스 사건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신구약 중간기의 마카비 가문이다. 사악한 헬라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유대를 해방 시켰다. 또,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열심당원들이 그랬다. 요한계시록의 일부 독자들은 로마의 폭정에 결사 항전했다. 예수님도 그 열정을 가지셨고(요 2:17), 사도 바울도 그랬다(빌 3:6).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 열정의 회복이 필요했다.
 
셋째, 신실한 청지기가 되어야한다(20절). 문을 두드리는 주님의 모습에 대한 오해가 많다. 대부분의 해석은 신자의 집에 손님으로 오신 그리스도, 혹은 성찬의 시간에 문밖에 서 계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본문은 누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4장의 깨어있는 청지기 비유와 마가복음 13장의 문지기 비유가 이 구절의 원래 전승이다. 주님은 밤중에 도착하는 주인의 모습이고, 주인은 먼 거리에 볼일이 있어서 언제 집에 도착할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주인의 귀환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이 구절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집이나 문을 성도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도둑과 같이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주님은 언제고 불현듯 다시 오신다. 맞을 준비 되어 있는가?
 
21~22절은 주님의 경고를 통한 약속이다. 20절에 이어 21절은 어린양의 대잔치, 종말론적인 메시아 잔치의 주제를 부각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은 사실상 경고다. “이기는 자”는 약속의 유업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미완성 독립격). 즉, “이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다. 주님께서 처방하신 것을 순종하여 시행하여 회개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에 주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진리”로 판단하신다. 주님은 부유하고 화려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겉만 보고 평가하지 않으시고, 내면의 실상을 보셨다. 그릇된 자기 인식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시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역겹다고 솔직하게 평가하신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박해는 없고 타협으로 인한 물질은 넘쳐났다. 외적인 안전과 평안을 하나님의 안정과 축복으로 착각하며 안주했다. 이 때문에 열정은 사라졌고 열심은 떠났으며 예리한 분별력도 잃어버렸다. 그들의 신앙생황은 쉽게 타협하고 입술로만 고백하기를 만족했으며, 기계적인 예배만 있었다. 자연스럽게 삶의 열매는 없었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그들이 어떤 아쉬움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주님 보시기에 역겨운 외식과 자기도취의 신앙만 남았다.
 
-궁핍했지만 실상은 부요했던 서머나 교회와 너무나 선명하게 대조가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무 풍족했지만, 영적으로 둔감했다. 타협 없이 부자가 될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조건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누렸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실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들이었다. 우리의 삶도 절제하고 분별하며 해야 할 축복의 말이 무턱대고 “부자 되라”는 말이다. 악할 대로 악한 경제 구조 속에서 부자되는 것이란 결정적인 순간에 적절한 타협이 없이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주님은 돌덩이에 불과한 금 대신에 연단한 금(환난을 통해 정결해진 성품과 신앙)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고, 흰옷(거룩하고 정결함)으로 우상숭배의 수치를 가려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되찾고, 안약(영적 분별력을 갖추고 시대를 바라보는 것)을 사서 영적 시력을 회복하라고 처방하셨다. 순종하여실천하고, 열심을 유지하는 열정으로, 영적 가난과 치부에 눈을 감고 합리화하도록 부추기는 맘몬과 타협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진단과 처방이 기막히다! 두루뭉술한 회개 명령이 아니시다. 정확한 진단과 구체적인 처방으로 라오디게아를 살리려 하신다. 처방전을 받아든 라오디게아에게 회복이 달렸다. 늘 말씀의 처방을 받은 나에게 말씀의 은혜안에 거하느냐의 키가 주어졌다. 정확하게 나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께서 구체적인 말씀의 처방을 내리시는 묵상의 시간이 귀하고 귀하다. 
 
*라오디게아를 향한 진단서를 늘 기억해야 하겠다. “현실안주”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의 상실을 가져오고 결국 자기 기만에 빠지게 할 것이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것이 주님의 은혜인 줄 착각하게 되면 복음으로 세상을 도전하고 전진하는 역동성은 사라지고 그저 자기평안 자기만족에 취하는 자기복음에 거하게 된다. 이것을 주님은 “벌거벗은 수치”로 표현 하셨다.
 
*자기만족, 현실안주의 강한 집착은 결국 자기숭배의 벌거벗은 수치의 단면이다. “흰 옷”이 필요하다. 어디서든 확연하게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세상이 주목하여 결코 쉽게 타협되지 못한다. 세상의 유행하는 옷을 따라 입는 내가 아니라 늘 주님의 옷을 입어 세상 속에서 주님이 그대로 보여지는 삶이 되어야 하리라.
 
*일곱교회, 세상의 모든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살폈다. 주님은 다 아신다. 그 사이에서 거니시기 때문이다. 감출 수 없고 꾸밀 수 없다.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라고 착각할 수 있게 하나,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 안에 거하고 있다면 반드시 세상과 충돌하게 되어있다. 그 가치와 충돌하고 그 구조와 충돌한다. 그래서 도드라지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주님 보시기에 역겨운 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이다.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평안의 열매가 아니라 복음의 역동성과 방향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것을 역겨워 하신다. 나의 삶에 복음이 살아 숨쉰다면, 역동성(열정, 열심)과 방향성(세상을 향해 증인, 증언)이 살아있어야 하리라.
 
*오늘 묵상 본문 중에 특히 “깨어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문을 두드리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실한 청지지(종)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오시든 얼마든지 문을 바로 열어 드릴 수 있는 “깨어있음”을 소망한다. 
 
**환경적인 장점이 약점이 되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더온누리교회 환경을 생각해 보니 딱 전율이 올라온다! 모두가 위치 조건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지역사회 구성비가 좋다고 이야기한다. 장미빛 여건들을 계속 이야기들 하신다. 오늘 묵상이 이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주신다. 환경의 장점이 오히려 영적 약점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경고하신다. 그래서 더욱 “주님”만 바라보아야 겠다. “불로 연단한 금, 안약, 흰 옷, 열정, 깨어있음….” 이것이 더온누리공동체에 더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깨우쳐 주신대로 더욱 구해야 하겠다. 환경조건이 좋은 것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좋고, 주님을 위한 열정이 좋으며 주님을 전하는 증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청지기들의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더욱 기도해야지…. 
 
 
 
*주님, 외적인 환경과 조건이 장점이 아니라, 내적인 신앙의 탄탄함이 장점이 되는 교회로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이를 위해 늘 깨어 있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복음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살아내겠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믿음의 삶을 위해 땀과 눈믈을 마음과 힘을 다하여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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