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늘 성전의 예배_세상 우상을 향한 거룩한 저항 [계 4:1-11]
 – 2025년 07월 08일
– 2025년 07월 08일 –
계 4:1-11 하늘 성전의 예배_세상 우상을 향한 거룩한 저항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이 일 후에_1절) 마무리한 후 두 번째 환상(4~16장)의 시작이다. 요한은 성령으로 하늘 보좌에 올라간다. 하늘에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를 중심으로 밤낮 쉬지 않고 드리는 하늘의 예배에 참여한다. 4장의 하늘 예배는 보좌를 구심적으로 절대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찬송의 예배다. 요한은 하늘 보좌에 올라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 천상의 존재들이 그분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광경을 본다.
    
4~5장은 천상의 관점으로 바라본 교회의 모습을 그린다. 세상 보좌에 앉아 있는 로마 황제로 인하여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고 있는 교회에 하늘 보좌는 무한한 위로와 소망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세상 보좌 그 너머에 진정한 하늘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마땅하고 마땅하다.
    
    
    
1. 하늘 보좌로의 초대(1~2절)
주님은 왜 하늘 보좌로 올라오라고 하실까? 6~16장까지 일곱 심판 시리즈는 하늘 보좌로부터 시행되기에 중요하다. 이는 다니엘 7장이 배경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네 짐승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네 짐승은 네 제국(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이다(단 2장). 고난받는 하나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시고 짐승을 심판하신다. “인자와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등장한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인자와 같은 이에게 열방(나라와 백성과 언어) 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신다.
    
다니엘이 하늘 어전회의에 참여했듯이 요한도 하늘 보좌의 예배에 참여한다. 땅에 있는 교회는 로마제국의 압박 속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로마제국은 무소불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회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복음을 증거하기는커녕 타협하며 동화되고 있었다. 교회가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돌파구는 바로 하늘 보좌의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전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니엘 7장에서와 같이 대적을 정복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으로 세우신다는 계획을 알 필요가 있었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를 경험하는 곳이 아니다. 하늘 보좌의 시각으로 현실을 전망하는 통찰력을 얻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하늘 보좌의 예배는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참여한다(계 3:8). 하늘 보좌는 성막의 지성소를 상징하고, 하늘 문은 지성소 가까이에 있는 성소의 분향단을 상징한다.
    
    
    
2. 하늘 보좌는 어떤 모습인가? (3~8a절)
‘보좌에 앉으신 이’는 다니엘 7장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이시다.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은 유대 문학에서 신적 위엄과 영광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대제사장의 옷에 있는 열두 개의 보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무지개는 노아의 언약을 상기하도록 한다.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초월성을 보호하면서도 영광과 권세와 구원하시는 은총을 신비적으로 표현한다.
    
이십사 장로는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열두 족장과 열두 사도다.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면류관과 흰옷과 통치권을 준다고 약속했다. 이십사 장로는 이기는 자로서 약속의 신실함을 증명한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 신실한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 장로들의 보좌와 면류관은 정치적인 이미지다. 그들은 모두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이다(사 24:23).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스가랴 4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다. 여호와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그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번개, 음성, 우레(다른 번역본은 지진)’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표현 방식이다. 심판이 하늘 보좌에서 하달되어 땅에서 실현됨을 시사한다. ‘유리 바다’는 출애굽 당시에 동풍으로 홍해에 길을 만들고 진흙 바닥을 말리셔서 유리와 같이 되게 하셨다는 유대 전승을 반영한다(계 15:2).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에서 바다는 악의 원형이다. 창세기 1장에서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표현은 홍해 사건과 연결하여 상상하면 성령이 독수리의 날개로 끊임없이 휘저으며 바다를 몰아내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는 모습이다.
    
‘네 생물’은 전체 피조 세계의 생물체의 대표다. 요한은 에스겔 1장과 이사야 6장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자신만의 창의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 대제사장의 가슴판에 있는 기장도 이를 반영하는데, 하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네 수호천사들을 반영한다.
    
    
    
3. 보좌에 앉으신 이를 향한 찬양의 예배(8b~11절)
하늘 보좌의 예배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주도하여 끊임없이 드린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영광을 돌려드림이 그 초점이다.
    
첫째, 네 생물은 온 우주의 생명체를 대표하여 찬양을 드린다. 창조의 목적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찬양은 영광을 돌려드림이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능자이시다(1:8). 역사에 대한 주권은 주 만군의 하나님께 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재해석이다. 짐승은 로마 황제를 패러디한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고 장차 올 자(17:8)’이다. 짐승이 현재에는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진정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로마 황제를 바로와같이 모조품으로 전락시키는 분임을 알게 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삼중 거룩 송이다. “3”은 하나님의 완전수다. ‘거룩하다’ 삼중 송은 로마의 제국적 본성에 대한 저항적 찬송이다. 진정한 예배자는 안식의 거룩을 파괴하는 체재에 저항한다. 이십사 장로들은 진정한 예배자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는 “엎드리고, 경배하고, 자기 면류관을 드리는” 자세다. 요한은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간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진다. 장로들은 정치적인 인물이다. 고대 도시의 대표들이며 하늘 어전회의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의 상징인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져 버린다. 즉, 포기하며 갖다 바친다.
    
둘째,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찬양한다. 이 찬양 속에는 새 창조에 대한 기대가 내재되어 있다. 세상은 죽음의 권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 땅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는 ‘처음 것은 다 지나갔다(21:4)’를 거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로 발전되어 완성되었다. 창조에서 새 창조로의 여정은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다(사 43:18~19; 65:17). 첫째 창조는 퇴보했으나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 이 기대와 소망이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4장의 하늘 성전, 하늘 보좌 앞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세상에서 보좌를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적 예배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중심에 계시고, 성령과 네 생물이 예배자의 중심이다. 여기에 이십사 장로와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많은 무리와 모든 피조물(5:13)이 점차 동참한다. 둘째, 예배가 밤낮 드리는 찬양이다. 찬양 속에는 계시록의 창조 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것은 창조와 역사와 생명의 절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 유일성, 창조주의 진정한 초월성이다. 새 창조에 대한 기대를 듬뿍 담고 있다. 셋째, 예배가 정치적이다. 즉, 로마 황제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세상의 군왕들과 우상들에게 돌리는 숭배 행위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 외에 우리를 지배하거나 억압하고 얽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과 전복 행위가 예배다. 또, 장로들도 자기 면류관을 보좌 앞으로 던지며, 명예와 권위를 포기하고 봉헌한다. 교회의 예배가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고 황제를 신격화하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진정한 예배자는 선택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짐승(제국)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세상의 권력 구조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저항하고 전복하고 대안을 만들어간다.
    
    
    
나는?
-일곱 촛대(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1:10~16)에 이어, 열린 문을 통해 하늘 성전과 보좌의 환상(4~5장)을 보게 하신다. 장차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게 하신다. 세상 너머의 세계로, 현실 너머의 진실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땅의 관점이 아닌 하늘의 관점으로, 짧은 안목이 아닌 영원의 시각으로 나와 교회와 세상과 현실을 바라볼 때 잃어버렸던 위로와 확신과 안식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교화와 성도를 위협하는 황제의 권좌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의 왕자(16:10)가 철옹성 같아 보여도 하늘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보좌에 앉아 계신 이의 영광은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 같이 빛나고, 무지개가 보좌를 두르고 있다. 이 보석들을 에덴(겔 28:13)과 성전(출 28:17~20)과 새 예루살렘(계 21:18~20)을 묘사할 때 등장하며, 무지개는 새 창조를 전망하는 노아 언약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길 새 창조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갖게 한다.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조화롭게 둘려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대리인으로서 ‘많은 눈으로’ 세상을 살피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감당한다(6:1~8). 자신을 지으시고 보내시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 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홍해 바닷가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듯이(출 15장),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수종 같은 유리 바다 위에서, 자기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회복하고 기대하고 소망해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 아니겠는가!
    
    
*일곱 촛대(지상의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환상에 이어 하늘 성전과 보좌의 환상(4~5장)을 보게 하신다. 반드시(마땅히) 일어날 일을 알게 하신다. 초점을 조정해 주시는 것이다. 땅에 맞춰져 있는 시선을 하늘로 맞추신다. 땅의 것과 적당히 타협하여 흐려진 하늘에 대한 초점을 또렷이 수정하게 하시려고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보이실까? 말씀을 통해서이다. 요한이 보고 기록한 그 환상들을 설명할 때 그의 구약적 지식이 충분히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씀이 주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보여 주셔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을 터인데, 일곱 영께서 요한의 구약 지식을 깨닫게 하셔서 풀어 기록하게 하신다. 나에게도 성령께서 그리하실 것을 믿는다. 말씀을 서로 꿰어 땅을 보며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늘을 보며 살게 하시리라 믿는다. 나의 고정된 시선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 되게 하실 것을 믿는다. 말씀이 깨닫게 하여 말씀대로 살도록 말씀의 힘을 부어 주실 것이다.
    
*지상의 교회가 추구하고 바라보아야 할 하늘교회의 모습은 “경배와 찬송” 뿐이다! 경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소유, 권위(면류관)를 하나님께 내려놓고(바치고) 고백하며 부르는 찬양이 곧 예배이다. 이는 로마 황제숭배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황제 신격화를 몰아붙이는 당시 세계 속에서 선명하게 구별(거룩)되는 분명히 추구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오늘날도 다를 바 없다. 그 당시는 로마 황제숭배였지만, 지금은 맘몬을 숭배한다, 쾌락을 추구한다. 성공주의가 종교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하늘교회의 예배를 바라보며 지금 이곳의 교회에서 그처럼 예배드리는 자들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깨달아야) 한다. 또 “마땅히(반드시) 될 일”이라 보여주신 첫 번째 환상은 지상교회들의 부족함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그들이 가야 할(추구하고 바라보아야 할) 하늘교회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심으로 믿음의 선명한 색깔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늘 교회의 예배가 지상교회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황제(맘몬, 성공주의, 쾌락주의)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예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면류관)을 바치고 찬송(거룩하다) 드려야 할 유일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놀라운 예배는 “이긴 자”만 드릴 수 있으니, 우리에게 이기라고 부탁하시는 것이다.
    
*확실하게 보여주시며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확실한 하늘 교회를 바라보며 이기라 하신다. 보여주시는 말씀을 통해 깨닫고 굳게 지키라 하신다. “마땅히(반드시)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다. 찬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심을 기억하고 확실할 때마다 우리 입술과 마음에서 찬양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요 하나님을 향한 절대복종의 표현이다. 내가 드리는 찬양이 겸손한 순종 없이 제 흥에 겨워 부르는 찬양과 경배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 하늘 교회(성전)의 모습이 고단한 이 땅의 삶에 용기를 불어넣음을 봅니다. 소망을 두고 인내해야 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늘 소망 바라보며 이 땅의 고됨을 인내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황제숭배, 맘몬 숭배를 향한 우직한 도전과 저항임을 압니다. 오늘도 어떤 모양이라도 예배하며 살겠습니다.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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