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1-17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실 때…
5장에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취하셨다. 곧바로 기도와 찬양으로 두루마리를 취하신 의미가 드러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루마리가 펼쳐진다. 6장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이며, 연속적인 세 가지 일곱 심판 시리즈의 첫 번째다. 일곱 인 심판은 전 인류의 4분의 1이 대상이며, 신자와 불신자가 그 대상이다. 심판의 취지는 신자에게는 기도를, 불신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세 가지 연속적인 일곱 심판(인, 나팔, 대접)은 두루마리(12~14장)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무대장치다. 일곱 인 심판은 4+1+1+(삽화)+1의 구조를 나타낸다. 네 개의 짧은 심판과 두 개의 긴 심판 후에 삽화가 이어지고, 일곱 번째 인 심판으로 마무리된다. 인 심판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4:5)’, 일곱인으로 봉한 두루마리(5:1), 그리고 성도의 기도(5:8)를 통해 예고되었다. 심판은 불신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신자에게는 순교와 기도의 시간이 된다. 여섯 째 인과 일곱째 인(8:1) 사이에 있는 7장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는 심판의 연기를 의미한다.
본문은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 심판까지 다룬다.
1. 성도는 왜 고난을 받을까?(1~8절)
이 단락은 첫 네개의 짧은 인 심판을 연속적으로 선포한다. 이 심판의 의도가 무엇일까? 1세기 독자들은 주후 60년의 지진과 64년 네로 황제의 핍박,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 멸망, 79년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92년의 극심한 기근을 경험했다. 이로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믿었다(1:5; 2:6~27). 그런데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왜 성도는 고난을 받는가? 그리스도께서 1세기 성도들과 현재 우리의 생활환경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고난에도 주권을 행사하시는가? 와 같은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네 가지 심판은 스가랴 6장을 모델로 삼고, 에스겔 14:12~23과 레위기 26:18~26을 배경으로 기술한다. 스가랴 6:1~8에서 네 색깔을 가진 마병 집단이 땅을 정찰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있다고 관찰되는 민족들에 징벌을 내리라는 명령(슥 6:5~8)에 따른 것이다. 이들 민족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수행해야 할 임무보다 더 과하게 이스라엘에게 보복하였다. 하나님은 민족들의 범죄를 징벌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하는 사랑이 정당성을 증명한다(슥 1:8~15). 또 스가랴 6:9~11에서 순교자가 네 가지 시련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탄이 고난을 통해 성도들을 이기려고 하는가? 본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성도가 받는 시련이 결국에는 불신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사용됨을 확인하게 한다. 에스겔 14장은 모든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숭배로 인해 주변 민족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해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그 죄로 인해 징벌하는 것이다. 동시에 의로운 남은 자는 이 시련을 통해 믿음을 검증하고 정결하게 될 것이다. 한편 레위기 26:18~28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면 받을 “일곱 번”의 심판을 네 번 반복한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복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는 회개를 유도하고 믿음을 갱신하려는 의도다. 사도 요한은 이 구약 본문을 바탕으로 “정복과 전쟁과 기근과 사망”이라는 네 가지 짧은 심판을 기술한 것이다.
주님께서 일곱 인을 하나씩 떼시며 세상에 재앙이 시작된다. 첫번째 인 재앙(1~2절)은 활을 가진 흰 말을 탄 자다. 활을 가졌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서 면류관을 받은 것으로 보아 승리한 전쟁이다. 흰 말탄 자가 나타나서 승리하고 또 승리한다. 이는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하는 것보다는 흰 말 탄자를 통한 재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세계관에서는 흰 말은 파르티아 군대를 염두에 두고 있고, 흰색은 파르티아에서 신성한 색으로 쓰였으며, 그들은 기마부대로서 활을 잘 쏘는 궁수들이었다. 한편 파르티아 군대의 출몰은 로마 군대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흰 말 탄 자의 승리는 전쟁과 정복을 상징하며, 로마보다 강력한 침략자들에 의해서 로마의 평화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면류관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활동 범위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로 제한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할 수 있다.
둘째 인 재앙(3~4절)은 붉은 말 탄 자로 칼을 들었다. 피 흘림이 뒤따라옴을 보여준다. 그 결과 화평이 사라지고, 서로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이는 짐작하건대, 내부적인 내란의 상황을 말한다. 큰 칼은 전쟁과 폭력적인 죽음의 심판을 상징한다. 둘째 기수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활동하는 것도 재앙의 강도를 조절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개입을 암시한다.
셋째 인 재앙(5~6절)은 검은 말 탄 자로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측정 도구로 본문에서는 밀과 보리의 무게를 다는 데 쓰인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며, 그것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고작 밀 한 되와 보리 석 되라는 것은 흉년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도주와 감람유는 해치 말라는 명령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도 남겨 두어야 할 품목이 있다는 것을 통해 심판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빈부 격차를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넷째 인 재앙(7~8절)은 청황색 말을 타고 등장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내란, 그로 인해 찾아온 기근은 사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하게 강조되는 바는 땅의 사분의 일의 권세라는 표현이다. 청황색 말을 타고 있는 기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한된 권세만을 행사하고 있다. 청황색은 시체의 색깔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재앙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들이 아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부터 즉시 일어난 사건들이다. 주님께서 네 가지 말을 풀어놓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권세를 부여하신다. 왜 그렇게 하실까? 그것은 교회가 연단을 통해 정화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 니골라당의 교훈과 이세벨을 추종하는 우상숭배자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로마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방향을 흩트려 놓고 있다(계 2~3장). 따라서 금광석에서 금을 제련하듯이, 시련과 핍박을 통해 남은 자를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사 6:9~10).
이 네 가지 심판들은 두 가지 결과를 도출한다. 한편으로 순교자가 배출되고, 순교자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어 논의되고 응답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에게 임한 재앙이 도리어 우상숭배자들에게는 더욱 극심한 재앙이 되어 “누가 능히 서리오?” 하고 깊이 탄식한다.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
2. 얼마나 오래 핍박을 받는가?(9~11절)
다섯째 인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요한이 본 것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지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다. ‘죽임을 당한’이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제단 아래서 절규한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10절).” 제단 아래는 요한계시록과 유대 문헌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사실상 동일시 된다. 유대 전승에서는 성도들의 순교는 하늘 제단에 드려진 희생제사로 본다. 순교자들은 하늘 보좌에 가까이 있다. 핍박으로 육신은 해를 입었지만, 영혼은 신적 보호를 받는다.
그들의 탄원은 얼핏 복수를 구하는 기도로 들릴 수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적인 심판에 대한 간절한 호소다. 그들은 복음의 신실한 증인으로 살다가 당시 시민사회의 비협조자로, 도시의 반역자로, 제국의 종교를 따르지 않는 무신론자로 정죄되고,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해로운 존재로 버림 받았다. 순교자들은 “얼마나 오래?”로 그들의 기도를 귀결시킨다. 하나님이 언제 그의 백성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악한 제국을 징벌하고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구하실 것인가?
11절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1차적으로는 11~17절에서 응답하는 긴급한 응답으로, 2차적으로는 7장에서 성전(聖戰)의 준비 차원에서 종합적으로는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으로, 궁극적으로는 바벨론(로마와 같은 제국)의 멸망(17~18장)으로 성취된다. 본문은 첫번째 응답으로 “흰 두루마리”를 약속한다. 이를 통해 순교자의 믿음과 정결함을 확증한다. 둘째 응답은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다. 이와같은 대답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전형적인 답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사람의 수가 아니라 신실한 증인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7장에서 등장한다.
순교자의 기다림의 시간은 안식의 시간이다. 또한 신실한 증언이 계속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심판이 연기되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3. 누가 능히 서리요?(12~17절)
12~17절은 긴급하게 시행되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순교자의 피가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복수의 근거가 된다. 불신 세계에 대한 심판으로 성도들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증명된다. 큰 지진, 일식과 월식,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떠나가고, 섬과 산이 이동하는 천지 대변이 일어난다. 이러한 묘사는 이사야 34장과 요엘 2:31의 인유다. 이와같은 구약의 인유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류가 피조 세계를 왜곡하여 우상숭배 하였다. 창조의 의도가 우상숭배자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우상숭배는 도덕적 질서와 자연의 질서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제거되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12~14절은 우주의 여섯 부분이 파괴되고 15~17절에서는 인류의 여섯 부류가 심판을 받는다. 구성 요소는 일곱이지만 의도적으로 마지막 둘, 종과 자유인은 “모든”으로 묶어서 숫자 ‘6’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제 도살당한 어린양이 마치 영적 용사로 성전(聖戰)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16절). 우상숭배자들의 목록은 요한계시록 19:18~19에서 짐승과 동맹을 맺은 자들이다. 심판은 그들의 아우성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은 스스로 “누가 능히 서리요?” 탄식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심판을 받는다.
나는?
-힘을 숭배하는 자들은 무너진다. 첫째 인을 떼자 로마제국을 괴롭혔던 파르티아의 용맹한 전사처럼 흰 말을 타고 활로 무장한 자가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성공적으로 심판을 수행하고 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힘을 우상으로 떠받들던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둘째 인을 떼자 붉은 말을 탄 자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하나님께 받은 칼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였다. 배신과 배반으로 권력을 차지하던 이들을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 서로 죽고 죽이게 하신 것이다. 내란의 상황을 표현한 듯 하다.
-셋째 인을 떼시며 사망을 통제하신다. 검은 말을 탄 자는 기근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체 양식(감람유와 포도주)을 챙기지 않으셨다면 전멸되었을 것이다. 곡식이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있는 현실이 남다르지 않다. 넷째 인을 떼며 등장하는 청황색 말을 탄 이에게 땅 사분의 일을 사망으로 몰아 넣을 권세를 주신다. 하지만 사망과 음부가 신자들을 위헙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한 사람도 손댈 수 없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온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를 친히 정하신다. 예수님처럼(1:5; 5:6)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임 당한 충성스런 백성이 심판과 신원을 간청하자, 하나님은 그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마 24:14) 그들이 잠깐 쉬어야 한다고 하신다. 오래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 원하시는(벧후 3:9)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날도 많은 죄인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 그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증거한느 삶으로 나아오고 있는 것이다.
-재앙의 날에 피할 곳이 없다. 재앙은 전 우주적인 재앙이 될 것이다. 그날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며 자기 힘을 자랑하던 이들(땅의 임금, 오아족, 장군, 부자, 강한 자, 자유인)도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이 세상이 성공과 안전의 보장으로 여기는 것들을 의지한다면, 결국 굴과 산 바위틈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갖가지 고난이 있다. 늘 고난이 있다. 일상이라고 해야 하나? 고난이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 재앙이 되기도 한다. 유난히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이 분명히 있다. 과거에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현재도 지구촌 어딘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재물의 위협, 권력의 위협, 사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쉽게 단죄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더욱 도드라지게 위협(?)하고 반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왜 그럴까? 사탄이 지배하는 죄악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고난과 핍박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들을 요한이 분명히 보았다. 고난을 정면돌파하며 신앙을 지킨 영혼들이 어린 양 예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핍박을 그저 당하기만해야 하나? 고난의 현장에 맞설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 그들이 말한 그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 그들은 핍박의 현장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 고난을 받았으나 더욱 더 외침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죽임당한 어린 양을 증언하다 죽임당한 그들이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계신 “그 죽임당한 어린 양”앞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고난 속에서도 당당히 예수를 외쳤다!
*죽임당한 그들은 현실의 순응이 아니라 도전을 택했다!. 그리스도인은 도전의 삶이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예수를 증거하는 삶에는 현실순응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심지어 죽기까지 증언을 외치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또한 그렇게 살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을 지라도 이 억울함을 호소할 분, 어린양 예수가 계시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억울하게 묻힐 죽음이 아니다. 반드시 갚아지는 죽음인데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죽음이다. 죽음으로 내몬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변함없는 폭력과 고난과 핍박에 마음을 무너뜨리면 안된다. 오히려 더욱 예수 증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럴수록 하늘보좌 어린 양께 호소해야 한다! 반드시 응답하셔서 갚으신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울 일인가! 소식인가! 현실은 고난이 늘어나도 기도는 현실을 견딜수 있게 한다.
*주님, 두루마리의 인을 하나씩 뗄 때, 이 땅에서 펼져지는 심판들 속에서 하늘 보좌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더욱 복음으로,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