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계 7:1-17]
 – 2025년 07월 11일
– 2025년 07월 11일 –
계 7:1-17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7장은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제기된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얼마나 오래?”에 대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로 답한다. 그 수는 십사만 사천이다. 십사만 사천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을 따라 종말의 성전에 참여할 영적 군대다. 그들이 참여하여 승리를 거둔다(13~14절). 그 결과 열방에서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긴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찬양이 울려 퍼진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안식의 축복을 주신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개의 삽화가 등장한다. 인 심판의 삽화로 십사만 사천(7장)과 나팔 심판의 삽화로 두 증인(10~11장)이다. 삽화는 일차적으로 각 심판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심판의 연기를 뜻한다.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 대접 심판 시리즈에는 삽화가 없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최종적인 심판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긍휼이 없다. 무자비한 심판이다. 7장은 광야 이스라엘을 연상하게 되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성막을 중심으로 진용을 갖춘다. 전쟁에 나갈 용사들을 지파별로 인구 조사하였다. 종말론적인 성전(聖戰)에 참여할 어린양의 군대를 완비할 때까지, 인 심판은 연기된다.
    
         
1. 왜 인치기까지 해치지 말라고 하실까? (1~4절)
6장에서 여섯 개의 봉인이 떼어졌다. 이제 일곱째 봉인이 떼어질 차례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된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기 전에 요한은 다른 환상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6장의 마무리가 “누가 이것을 버텨 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7장은 여섯 개의 봉인이 하나하나 떼어질 때마다 일어났던 환난 중에서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여 준다. 6장에서 다섯째 인을 뗄 때 하늘의 제단 아래 있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7장은 그들을 포함한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7장은 “막간”이다. 큰 이야기 줄거리 중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여 극적 효과를 기대한다. 당시, 이 계시록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 빠른 종말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보여 주는 것은 천 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통제하는 것을(1절) 통해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교회를 보호하시는 모습을 일깨운다.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땅과 바다를 해하는 네 천사에게 외친다. 하나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재난이 오는 것을 막게 된다. 인치기까지 해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인 심판에서 네 명의 말에 탄 기수는 땅을 황폐하게 하는 자들이다. 네 천사는 이에 대응하여 성도를 보호한다.
         
6:1~8을 통해 네 천사들에게 이 땅과 거주민이 해를 입는다. 하지만 동시에(혹은 그 전에) 본문 1~3절의 다른 한 천사에 의해 인침을 받아 보호된다. 인은 보호를 가리키는 은유다. 이 보호는 육체적인 보호가 아닌 영의 보호다. 성도가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도록 인을 친다. 출애굽 심판에서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름으로 장자의 생명이 보호를 받았다. 본문은 에스겔 9:4에서 천사가 진짜 성도에게 인을 친 장면을 인유했다. 무엇보다 ‘인’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어떤 경우에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도는 보호받고 대적은 살육을 당한다.
    
         
2. 십사만 사천은 누구인가? (5~8절)
다른 천사에게 인침을 받은 이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만 이천 명씩 선발되어 총 십사만 사천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라는 문구는 14만 4천을 구약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택함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라는 점이다(출 19:7). 이 의미를 14만 4천의 의미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14만 4천은 12×12×1,000을 계산한 숫자다. 이 숫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처음 12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음 12는 새 이스라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1,000은 큰 숫자를 상징하여, 구원받는 “큰 무리(7:9)”를 가리킨다. 요한이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본 단락에 기록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명단이 구약에 기록된 열두 지파 명단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단 지파가 빠지고 요셉의 아들 중 하나인 므낫세가 등장한다(6절). 이 기록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명단을 벗어난 기독론적인 새 명단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의미했고, 교회는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이는 갈라디아서 6:16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은 이해에 근거하여 14만 4천은 요한이 7:4에서 이 숫자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7:9에서 그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을 묘사한다. 요한은 이를 통해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또한 에스겔 9장을 인유한 하나님의 인의 이미지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표를 그려 넣었는데,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주님께서 애굽의 처음 난 것을 치실 때 그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는 유월절의 구원을 상기시킨다.
    
         
3. 셀 수 없는 무리의 구원과 찬양(9~14절)
9절은 ‘그 뒤에 내가 보니’라는 표현으로 앞선 환상과 구분을 짓는다. 요한이 본 것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다. 이 환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해 준다(창 12:2~3; 13:16; 15:5; 22:17; 26:4; 28:14). 그들은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서 한목소리로 크게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구원하심(쏘테리아)”으로 번역된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총 3회 언급된다(7:10; 12:10; 19:1~2). 세 번 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맥락에서 언급된다.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께 속해 있는 것(7:10)에서 시작해 하나님과 어린 양이 어떻게 그 구원을 능력과 통치로 이루셨는지(12:10), 그리고 의로운 심판으로 로마를 무너뜨려서 구원을 이루셨는지 선언한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와 영광이 정의롭게 나타난 결과다.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한목소리로 부르는 찬양에 모든 천사와 장로들과 피조물이 참여한다. 모두 하나 되어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 무궁토록 있도다”라고 외치는데, 5장에 이어 다시 한번 일곱 개의 단어로 최상의 예배를 드린다(12절).
         
13~14절에서 요한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 보여 준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의 옷이 흰 까닭은 그들이 자기 옷을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빨았기 때문이다. 놀랍다. 어떻게 피에 옷을 빠는데 희게 될 수 있을까? 흰옷은 하나님 백성의 삶이 흠 없이 순결하여 하나님이 받아줄 만한 상태인 것을 보여 준다. 레 17:11에 의하면 피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어서 죄를 속할 힘이 있다고 기록한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완전한 힘이 드러나 있다. 십자가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씻고, 그 죄를 통해 우리를 노예 삼았던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이 자기 옷을 어린 양이 흘린 피에 빨았다는 표현은 성도들이 예수의 삶과 죽음에 참여했다는 의미다. 계시록에서 그들 중 상당수가 죽기까지 충성하고 순교한다. 그들이 흘린 피가 어린 양의 피와 섞인 것이다. 어린 양의 피에 자기 옷을 빤 사람들은 여러 모양으로 제자도의 길을 갔던 사람들이었다.
    
       
4. 흰옷 입은 자들이 받게 될 구원(15~17절)
구원받은 큰 무리는 항상 하나님 보좌 앞,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예배드린다. “섬기다(라트류오)”로 번역된 동사는 제사장이 예배드릴 때 섬기는 것을 묘사한다. 또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신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가깝게 즐기며 함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뜨거운 것이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16~17절). 이 구절은 이사야 49:10, 25:8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17절에서 어린 양이 목자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준다.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잔치에 이끌어 가실 분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 어린 양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께 있으며, 하나님만이 구원의 소망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간절한 것은 하나님 나라 없이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최후의 심판 이전에도 세상을 향한 심판은 계속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주권을 확인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백성은 보호하실 것이다. 최후의 심판을 연기하면서까지 하나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실 것이다. “인침”은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권을 확증하고 극심한 환난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보증이다. 그들은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며, 패역한 시대를 거슬러 불편과 고난을 자처한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매서운 시련 중에서도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이는 상징적인 수다. 이들은 어린 양의 보혈로 속량을 받고 어린양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9절),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새 이스라엘) 를 상징한다(14:1~4). 애굽의 열 재앙과 바로의 위협 속에서 보호를 받았던 이스라엘처럼, 인침을 받은 성도들도 가공할 재앙과 짐승의 공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십사만 사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자기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구원과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이다. 광야에서 성막 가운데 임하여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셨듯이, 어린양 예수께서 성도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언약은 신실하게 성취되고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성전 삼아 영원히 임마누엘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인가? 그리스도께서 장막 되어 주신 곳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머무는 장막이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복과 안식을 맛보며 누리는 예배 공동체이자 순례공동체다. 그 복과 쉼을 누릴 때 성도는 척박한 광야를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
    
 
*이토록 성도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요한을 통해 보게 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다 끝까지 구원을 지켜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보여 주시는 것은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야 할 이유다. 결국 광야 같은 세상에서 고통과 괴로움의 강렬한 햇빛을 막을 구원의 장막은 주님만 치실 수 있다. 그러니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만 있는 것이다. 로마 황제가, 다른 우상들이, 길드라는 조직이, 강력한 도시체계가 인생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께만 구원하심이 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오직 예수” 외에 다른 것에 의한 구원 심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재물과 명예, 성공과 부유함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짓 구원 심리는 세상과의 타협과 순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직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께 있음을 굳게 붙잡는 성도는 하늘의 승전예배에 감격스럽게 참여한다.
    
*나는 한 때 나의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길 때가 있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 외에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런 시도와 노력이 나를 만족하게 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의지하고 추구했던 것들이 “믿는 도끼”가 되더라.
      
*”믿는 도끼”에 내 발등이 찍히는 참담함을 어리석게도 반복하여 행했던 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요한에게 “보여 주시고”, 나에게 “보이시려는” 하늘 승전예배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음을 본다. 오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만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12절).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의 찬송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믿음의 초심을 굳게 붙잡게 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저 자리에 서게 된다. 하늘 승전예배의 감격을 귀도 듣다 몸소 경험하게 된다. 하늘 예배가 나를 기다린다! 이 사모함이 고단한 인생길을 견디고 또 견디게 했으리라!
    
    
    
*주님, 요한이 본 셀 수 없는 큰 무리 찬양의 위엄과 영광에 마음이 벅찹니다. 구원의 은혜가 이와 비교할 수 없을진대, 그 감격의 은혜가 일상의 현상에서 큰 소리로 외쳐 선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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