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다섯째 나팔 재앙, 황충(메뚜기) 떼가 주는 교훈 [계 9:1-12]
 – 2025년 07월 14일
– 2025년 07월 14일 –
계 9:1-12 다섯째 나팔 재앙, 황충(메뚜기) 떼가 주는 교훈
    
8장 마지막 절에서 독수리가 화를 삼중적으로 선포했다. 9장은 첫째 “화”로서 다섯째 나팔 재앙을 기술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문을 연다. 거기서 황충(아크리스_메뚜기)이 나온다. 이 재앙은 로마 제국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와 그들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매우 가혹하게 전개된다.
    
    
    
1.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연 무저갱(1~2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연다. 그 결과 암흑이 깔리고 황충이 올라온다. 구약과 유대 문학에 익숙한 당시 독자들은 이 표현이 무엇을 인유하는지 이해했다. 이와 관련하여 태초 이전에 사탄(계명성, 루시퍼)이 하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구덩이 맨 밑에 떨어졌다(사 14:12~15). 유대 전승에 따르면 선한 천사들은 별과 같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기초가 천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들은 번갯불과 같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별처럼 보인다. 그들의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솔로몬의 유언서 20:14~17).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는 이 별을 “아침의 아들”, “새벽별”로 불리는 별을 사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베드로후서 2:4의 [새번역]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사슬로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 ‘타르타루스(지하 세계)’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구덩이에 가두어’라고 묘사한다. 후기 기독교 문헌은 이렇게 떨어진 별은 타락한 천사이고,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가 바로 사탄이다. 요한은 당시 잘 알려진 신화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다섯째 나팔이 울리자 벌어진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무저갱의 열쇠’는 사탄을 감금한다. “무저갱(아비소스)”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의미한다. 칠십인 역(LXX)은 ‘음부(히브리어_스올)’를 ‘아비소스’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고 바다의 깊은 곳을 의미하는 ‘테흠’을 번역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아비소스(무저갱)”는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이 정해진 시간까지 갇히는 곳(11:7; 17:8; 20:1, 3)으로 표현되었다. 1절의 “무저갱의 열쇠”로 번역된 원문은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으로 가는 ‘수직 통로’를 여는 열쇠”라는 의미다. 새번역은 무저갱을 아비소스로 그대로 음역했고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무저갱은 하데스와 같은 개념이며(욥 38:16; 겔 31:15; 요나 2:6), 고통이 있는 곳이고(시 71:20), 죽음의 장소다(출 15:5; 사 51:10; 63:13). 이런 인식 때문에 무저갱은 종말론적인 최고 감옥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땅에 떨어진 천사에게 주셨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자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원래 가지고 있던 하나님으로부터 한시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라는 문자적으로 “열쇠가 주어졌다”이다. 종말의 심판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열쇠를 주어 무저갱에서 악한 자들이 올라와 땅에 사는 자들을 공격할 기회를 주는 것을 결정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앞서 하늘 제단 아래 모여 있는 의로운 순교자들과 땅의 성도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6:9~11; 8:3~5),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사용하여 ‘땅에 사는 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신다. 아이러니하게도 악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땅 위에 풀려나는 것이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사탄은, 땅에서 사탄적이고 짐승 같은 행동을 하던 자들을 치게 된다. 어린 양을 신실하게 따르던 자들은 박해받고 죽음에 이르지만, 결국 어린 양을 따라 새 생명을 받게 되고, 그들을 박해했던 자들과 우상과 타협했던 자들만이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무저갱을 열었을 때 큰 화덕(용광로)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와 어둠이 땅을 덮는다. 요한은 출애굽기 19:18의 암흑 재앙을 연상시키며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암흑의 연기를 묘사했다.
    
    
    
2. 황충 재앙(3~11절)
사탄이 아비소스를 열었을 때 황충(아크리스_메뚜기)라고 묘사된 사탄의 부하들이 쏟아져 나와 땅을 뒤엎는다. 마치 연기가 땅을 뒤덮듯, 땅을 어두움으로 뒤덮는다. 이 모습은 요엘 2:1, 15에서 나팔이 황충을 불러내는 모습과 겹친다. 요엘 선지자는 애굽 땅을 어둡게 했던 여덟째 재앙(출 10:5, 15)을 모티브로 하나님의 종말을 예언했던 것처럼, 요한은 출애굽기와 요엘서를 기반으로 땅에 사는 자들에게 닥칠 심판을 묘사한다. 그런데 메뚜기 재앙은 애굽을 괴롭힌 재앙과 질적으로 다르다. 애굽을 덮친 메뚜기 떼는 식물을 먹어 치워 기근이 오게 했으나, 요한이 본 환상에서 황충은 식물은 해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공격했다. 그리고 황충의 공격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제한된다. 황충은 전갈의 쏘는 권세를 받았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 고통을 주게 된다. 그들의 시간은 다섯 달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한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이 박히지 않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극심하다. 그들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끔찍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편, 메뚜기는 자연을 해치면 안 된다. 그런데 메뚜기가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수목을 먹지 않는다면 무엇을 먹을까? 이는 영적인 기근과 영적인 황무함에 대한 이미지다. 이 재앙은 사악한 자들의 굶주림과 영혼의 공허함을 나타낸다. 메뚜기 재앙은 사악한 자들의 굶주림과 영혼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로 인침받아 보호받는 성도(144,000)도 해할 수 없다. 메뚜기는 “땅에 사는 자들”, 즉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심판한다. 악의 편에 있는 자는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 메뚜기가 건들지 못한다. 그리고 메뚜기의 활동은 오직 “다섯 달”로 제한된다. ‘다섯 달’은 통상적으로 이 지역에서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메뚜기는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괴롭힐 수만 있다. 왜 그런가? 고통을 배가하기 위함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바란다. 죽을 수 없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이런 메뚜기 재앙의 효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앙을 타협하는 자들과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상숭배는 헛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분리된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삶에는 소망이 없음을 되새겨준다. 출애굽의 재앙들이 애굽의 신들은 거짓이고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임을 증명했지 않은가! 재앙을 당한 애굽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다섯째 나팔 메뚜기 재앙도 우상 숭배자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결국 절망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강퍅함”은 사실상 사탄의 기막힌 영향력이다.
    
7~10절은 요한은 황충의 모습을 “~같다(호스)”라는 표현을 일곱 번 사용하여 묘사한다. 이는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 전승에 등장하는 이미지들과 연결하여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동일한 과정이 반복하여 일어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황충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요엘 1~2장에서 이스라엘 땅을 황폐하게 만든 메뚜기 환상에 기초한 것이다. 황충은 흉포하고 전율하도록 무섭고 파괴적이다. 상당히 과장된 표현으로 시각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충은 전쟁을 위해 준비된 말들과 같다. 요엘 2장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몰려올 메뚜기 떼는 땅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다가오고(2:2), 그 모양은 몰려오는 말과 기병 같다고 했다(2:4). 그들은 머리에 금 면류관 같은 것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요한이 그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주시는 금 면류관이 아닌 그와 비슷한 것이므로 그들 세상에의 통치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여자의 머리털을 가졌고, 사자의 이빨을 가지고 있다(요엘 1:6), 쇠로 된 가슴 막이를 하고 있고, 그들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는 요엘이 묘사하는 끔찍한 소리와 흡사하다(요엘 2:4~5). 이어 다시 한번 황충이 가지고 있는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을 묘사한다.
    
이 모든 묘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흉측한 메뚜기떼들을 이끄는 왕의 이름을 보면 분명해진다. 11절은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이라고 밝힌다. “아바돈”의 의미는 “파괴”다.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욥 26:6; 28:22; 31:12 시 88:11; 잠 15:11; 27:20). “아볼루온” 역시 “파괴자”를 의미한다. 헬라어 동사 아폴루미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이름은 이방 신 아폴로를 연상케 하며, 아폴로의 상징물 중 하나가 바로 메뚜기다. 그렇다면 이것은 폭력을 사용하여 세상을 장악한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로마 제국을 심판하실 것이다. 로마 제국뿐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만 믿고 세우려 한 모든 제국은 심판받는다. 힘과 폭력은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악만 키우며 결국 종말에 심판받을 것이다.
    
오직 어린 양의 통치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소망이며 능력이다. 한편, 메뚜기 재앙이 다섯 달 동안 계속된다는 표현은 로마의 유혹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견디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우상 숭배자들의 회개를 동시에 촉구한다.
    
    
    
3. 첫째 화는 지나갔지만…. (12절)
8:13의 경고처럼 첫째 재앙은 지나갔다. 그런데 아직 두 가지 재앙이 더 남아있다고 알린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따라 하나하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며 직면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 뜻의 결과다. 둘째 화는 9:13~21에, 마지막 화는 일곱째 나팔 재앙(11:15~19)으로 일곱 대접 재앙이다. 일곱 대접 재앙은 16장에 소개된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는 무저갱의 열쇠를 하나님께 “받고”,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도 전갈의 권세를 “받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도와 범위(인 맞지 않은 자들, 죽이지 말라, 다섯 달 동안) 안에서만 심판을 수행한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탄과 사망이 성도들을 위협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사람도 그들이 손댈 수 없다. 성도들의 생사가 오직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믿고, 생존의 문제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위협하는 상황 앞에서도 담대해야 할 것이다.
 
-“이이제이(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의 중국 고사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는 결국 악의 의지하여 힘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악을 통해 심판하신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뵙게 된다.
    
-첫 출애굽 때 메뚜기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출 10장), 이마에 인침받은 백성들(새 이스라엘, 십사만 사천)도 큰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신다. 시련과 환난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도 말고 소망의 끈을 놓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협과 가로막힘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기회다.
    
-한편, 인침을 받지 않은 자들은 황충의 공격을 받아 다섯 달 동안 큰 괴로움을 겪는다. 그런데 그런 뼈아픈 고통과 통증이 참회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징계와 재앙을 거두실 거라고 헛되이 기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근거 없는 낙관적인 기대에 나를 맡기기보다는 부르짖고 통회하며 시험을 이겨야 한다.
 
-인침을 받이 않은 자들을 사망의 심판이 아니라 고통의 심판으로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중에라고 베푸시는 긍휼”의 전형적인 증거다. 로마 통치자들의 악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그들에게 돌이킴의 기회를 주시며 다시 오신 예수님의 때를 향해 나아가신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사건, 사람에게서 일어날 때 그 속에서 먼저 나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다시 복기하며 모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여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을 초토화한 무자비한 바벨론 군대처럼, 사람들을 해할 전갈의 권세를 가진 황충들은 무저갱 사자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맹렬히 공격한다. 누구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재앙이다. 회개하지 않아도 무사히 지나간 오늘 같은 날이 내일도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죄인들이 장래를 대비하는 일은 심판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상실과 고통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 땅에도 통렬히 회개하여 회복의 시기가 오도록 갈망해야 한다.
    
         
*먼저 환난과 궁핍과 절망의 시간을 통과하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 생각하니 본문이 심판 재앙의 잿빛 그림이 아니라 원수를 이기는 환희의 그림이 되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보게 하신다. 고난의 의미를 다 알 수 없지만, 고난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사랑)을 신뢰한다면 고통의 노래가 희망의 찬가가 되리라!
    
*하나님은 또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애굽 메뚜기 재앙 때 그 유례없는 사건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땅을 보호하여 주신 것처럼 사람들을 해할 전갈의 권세를 가진 황충들이 득세하여도 “인치인 자”들을 그들에게서 보호하신다. 그런데 이런 “장차 될 일을 보여 주시는” 장면 속에서조차 세상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전갈이 주는 고통처럼 뼈아픈 통증이 그들의 삶에 범람해도 희한하게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가 사라진 시대가 곧 재앙(화)의 시대인 것이다.
    
*희한하게 교회에 회개가 사라진다. 그런 재앙(화)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이 하나님을 찾는 통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통로가 되어 버린다. 영원한 삶을 준비하고 기대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항복하고 회개하는 것 말고는 왕도가 없다. 회개는 상실과 고통을 물러가게 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해와 공기가 사탄이 열어놓은 무저갱의 연기로 어두워졌다는 부분에 특히 마음이 갔다. 내 영혼의 햇빛 되신 주님이 사탄의 기만적인 연기로 인해 가려지지 않게 해야지…. 분별하고 또 분별해야지…. 호흡하는 공기조차도 어두워졌으니(더러워졌으니) 내 코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더욱 기대해야지…. 생기를 불어오게 하시는 주님의 바람을 소망해야지…. 바라고 또 바랐다!
    
*하나님 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아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니 오고 오는 모든 “인침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문은 희망의 찬가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제멋대로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근원도 모르고 어지럽게 그저 살아간다. 인생이 절망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인생이라는 노래가 환난과 궁핍은 있으나 영혼은 희망의 찬가가 되게 하는 책이다. 내가 부를 나의 인생가가 희망의 찬가이기에 감사하다!
    
    
    
*주님,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는 짙은 어둠이 덮여 있어도, 황충과 같은 세상 권력자들의 분동이 넘쳐나도 이 모든 것은 “곧 지나가리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격려가 보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생깁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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