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루마리를 먹고 증인 되어, 다시 증언하는 삶으로 [계 10:1-11]
 – 2025년 07월 15일
– 2025년 07월 15일 –
계 10:1-11 두루마리를 먹고 증인 되어, 다시 증언하는 삶으로
    
사도 요한은 7장에서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이 떼어지기 전, ‘막간’을 사용한 것처럼, 여섯째 나팔이 불리고 일곱째 나팔이 불리기 전, 또 하나의 막간을 보여준다. 나팔 심판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왜 우상 숭배자들은 그토록 재앙을 받아도 회개하지 않는가? 이다. 이들을 회개하게 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심판이 아니라 신실한 증언’이다. 본 장에서 우레 심판이 취소된다. 재앙으로는 회개를 끌어내지 못한다. 어린양이 인을 뗀 두루마리를 요한이 삼키고, 신실한 증언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바로 이것이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10~11장은 두 번째 삽화다. 삽화는 심판 시리즈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답하는 여백이다. 심판의 연기이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에 따라 우레 심판이 취소된다. 요한계시록은 레위기 26장의 네 가지 칠중 재앙을 모델로 삼는다. 네 가지 일곱 심판 시리즈다. 인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1/4이 대상이다. 나팔은 불신자 1/3이다. 우레는 불신자 1/2이다. 대접은 전체가 대상이고 삽화가 없다. 회개할 기회가 없는 최후의 무자비한 심판이다. 두루마리는 5장에서 어린양이 받아서 일곱인 심판을 통해 인을 떼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 두루마리 예언을 선포할 자가 필요하다. 그 내용은 축소판으로는 11장, 전체로는 12~14장이다.
    
    
    
1. 두루마리를 들고 내려오는 힘센 천사(1~4절)
요한이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힘센 천사가 누구일까? 요한계시록에서는 힘센 천사에 대한 언급이 세 번 등장한다(5:2; 10:1; 18:21). 5:2에 등장하는 힘센 천사는 봉인된 두루마리를 누가 열 수 있겠냐고 도전했다. 그런데 본문은 이미 두루마리가 열려 있다. 1절의 천사에 대한 묘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고, 머리 위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신구약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구름을 타고 오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힘센 천사의 손에 두루마리가 펴 놓인 것은 일곱 인을 봉인 해제한 어린양임을 시사한다.
    
일곱째 나팔이 불리기 전, 아직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섯째 나팔이 불릴 때까지 회개치 않은 사람들을 구원할 열쇠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보게 하신다. 힘센 천사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가 열린 채 들려 있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계에 드러날 것을 의미하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사는 바다와 땅을 양발로 딛고 서 있는 모습인데, 이는 천사가 들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의 범위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임을 보여주면서 로마 황제의 주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온 세계에 미치는 것을 보여준다.
    
3절은 그 힘센 천사가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칠 때에” 마치 일곱 우레가 외치는 것 같다는 것은 그만큼 우렁차고 다양한 소리였음을 묘사한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은 이 소리를 기록하려고 하지만, 인봉하고 기록하지 못하게 한다. 왜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을까? 이는 예정된 심판의 취소를 뜻하는데, 레위기 26장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칠중 재앙을 네 번이나 반복하며 언급한다. 인과 나팔과 우레와 대접 심판이 계획되어 있지만, 우상 숭배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더 강퍅해진다. 그런데 심판이 취소된다는 것은 추가적인 심판으로 회개할 수 없으니 취소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기록하여 성도들에게 전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1:19). 그러므로 우렛소리가 전하는 말은 요한이 전하지 않아도 된다. 우레가 전하는 말에는 요한이 전해야 할 이야기 전체 내용에 포함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일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모든 것을 알리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전하는 책임을 잊으면 안 된다.
    
    
    
2. 열방은 어떻게 주께로 돌아오는가? (5~7절)
우레 심판이 취소된다. 요한은 열방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취소되었는가? 취소되지 않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6~7절이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힘센 천사(그리스도)가 맹세한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들려준다. “지체하지 않겠다”로 번역된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7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기다리시지는 않는다. 즉 이제 곧 일곱째 나팔을 불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사라진 최종적인 파괴와 심판만이 세상을 덮칠 것이다.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뱀과 독사의 분노로 심판하겠다고 맹세하신다(신 32:40).
    
봉인은 취소가 아니라, 성취될 때를 기다리는 포고문으로 비밀이 된 것뿐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다. 우레 심판이 취소되었다고,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이 지체되지 않는다. 예언은 인봉 되어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성취된다. 그렇게 성취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혜로운 자”에게 모두 다 계시가 될 것이다.
    
“일곱 천사가 소리 내는 날”은 직역하면, “그 천사가 불려고 할 때에”이다. 하나님의 비밀이 천사가 나팔 소리를 내기 “이전에” 성취된다고 이해한다(NIV, NASV). 자연스럽게 이 번역은 큰 환란의 마지막 단계를 최후의 짧은 시련의 시간을 보게 한다. 직역하면 “그가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이다. 즉 하나님의 비밀은 일곱째 천사가 그 나팔을 불기 시작할 때 완수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루마리 비밀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들에게 전하신 복음이다(7절). 그 복음은 신구약 증인들의 증언이다. 이 복음이 신비롭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취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기다리시지는 않는다. 이제 곧 일곱째 나팔을 불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사라진 최종적인 파괴와 심판만이 세상에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악의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을 뜻한다. 복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것을 최종적으로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신비)이다. 지금도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3. 우레 심판 취소의 대안은? (8~11절)
위의 내용으로 정리하면 우레 심판을 취소한 이유는 효과적인 회개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소된 우레 심판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의 신실한 증언이다.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그리스도가 두루마리를 펼쳐놓으시고 가지라고 하신다. 요한이 받아야 하고 힘센 천사는 받아서 먹으라고 명령한다. 이 환상은 에스겔 3장에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 에스겔 환상과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요한이 받아먹은 말씀도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 속은 “썼다”라는 내용이 추가된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인데, 입에 달디단 하나님의 말씀은 삶에서 구체화될 때 달지 않을 수 있다. 말씀이 쓰디쓴 고난의 잔이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 달게만 남아있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의 복음은 분명히 기쁜 소식이지만, 그 복음이 우리 삶에 궁극적인 기쁨이 되는 과정에서 고난이 깃들어 올 수 있다. 성도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입에만 단 말씀만 추구하거나, 배 속에 들어갈 때 쓰디쓴 말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쓴맛은 이스라엘의 임박한 운명에 대한 근심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반응이기도 하다. 하나님 백성은 복음과 심판의 메시지를 듣지 않아도 외쳐야 한다.
    
그리고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삼키고 예언적 사명을 받았듯이(겔 3:3~6), 요한도 두루마리를 먹은 후에 예언적 사명을 받는다. 요한의 첫 번째 사명은 교회를 향한 메신저였다. 이제 일곱 교회와 함께 세상을 향한 두루마리 예언의 증인으로 다시 위임을 받는다.
    
요한이 받은 명령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11절)”에게 이 두루마리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매번 다른 순서로 사중 정형문이 모두 일곱 번 등장한다. 본문은 다니엘 7:17의 사중 정형문을 인용한다. 통상적으로 민족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임금이 들어갔다. 다니엘 7장은 짐승들이 세상 제국으로부터 인자와 같은 이에게 열방(모든 백성과 민족과 방언)에 대한 주권 이양을 선포한다. 본문 이전에는 열방에서 교회로 모여드는 것을 묘사했지만(5:9; 7:9), 본문 이후로는 교회가 어떻게 열방에 증언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11:9; 13:7; 14:6; 17:15).
    
이렇게 교회들이 죽기까지 복음의 신실한 증인으로 증언함으로써 열방이 주께 돌아온다. 그 구체적인 예가 이어지는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다.
    
    
    
나는?
-힘들지만, 다시 사명의 땅으로…. 하나님께서는 1세기 당시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힘들고 지쳐있는 요한과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다시 진군 명령을 하신다. 여전히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퍅해지는 세상과 사람들을 다시 대면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부담스럽다. 복음의 증인 길을 가로막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 완고함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 땅, 그 나라, 그 도시로 가라 하시는 것이다.
    
-왜 가야 하는가?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다. 주님의 마음이 잃어버린 영혼들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다.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의 백성들이 진정한 유익 얻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최고의 사랑은 복음을 위한, 복음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지금 복음의 사랑에 순종하지 않으면 후회할 수 있다.
    
-복음은 달다. 동시에 쓰다. 주님이 주시는 두루마리를 먹으면 “단쓴단쓴”이다. 주님은 무작정 감당하기 힘든 현실 속으로 결코 밀어 넣지 않는다. 또 요한에게 그저 가라고만 하시지도 않는다.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두루마리를 건네시고 먹게 하신다. 먹으니, 단맛과 쓴맛을 다 경험하게 된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기쁨(단맛), 혹은 순종함으로 어려움(쓴맛)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 주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게 된다.
    
    
*힘센 천사는 그리스도시다. 주님은 구름, 무지개, 해, 불기둥의 현현과 영광을 통해 사자의 포효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다.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온 세상과 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주님의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를 전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다. 회개와 심판의 모고리가 잦아들고 있는 세태 속에서 주님의 부르짖음이 들리는가?
    
*주님은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못하게 하신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보다 더 완벽하고 근본적인 심판의 계획(재림)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 일에 하나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더 이상 자비가 없는 최종적인 심판이 임박한 상황에서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11절)이 얼마나 중요하고 긴박한지 일깨우신다.
    
*재앙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교회가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할 것은 복음 증거의 사명이다. 복음의 증인 되어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갖다 먹고 “다시”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가서 예언하라고 하셨다. 요한은 다시 그들의 냉소와 조소, 거절과 핍박,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가기 전에 “말씀을 먹으라”고 하셨다.
    
*먼저 말씀의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내가 먼저 말씀의 단맛을 알아야 쓰디쓴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바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먹는 것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충성이 절실하다. 이 시대가 이런 사명자를 기다린다.
    
    
*끝까지 구원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하다. 나는 늘 판단과 심판이 빨리 이루어져 나의 억울함과 답답함이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더 많은데…. 주님은 거듭되는 재앙들에도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게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려는 것이다. 재앙이 아니라 말씀의 증인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여 돌아오게 하려 하신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 감히 가늠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이다.
    
*그런데 돌아오게 하시는 말씀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니다.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복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저주받아 나무에 달린 초라한 주님이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을 베푸실 유일한 분(방법)이다. 요한에게 다시 그 사명을 재위임하시는 것이다. 이제껏 충실하게 달려온 그 길, “다시” 달려가라!
    
*다시 달려갈 그 길, 네가 증언할 두루마리를 먹어라! 즉, 말씀의 꿀맛을 맛보고 채워서 증언해라!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고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저 우상 숭배자들에게 그 맛을 알려줘라! 맛보게 하여 돌아오게 하라! 그 과정이 고달프디고달프겠지만,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다시” 살라!
    
*보여주시는 대로, 들려주시는 대로, 기록한 대로 순종하여야 봉인된 말씀도 제대로(?) 전할 수 있다. “그대로”가 중요하다. 말씀 그대로 전하는 증인이 되어 보고 듣고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전하기를 충실한 목회자가 되어야겠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세상 주관자, 사단의 권세) 에게 “다시” 예언(가르쳐야, 대언)하여야 하리라!
    
    
    
*주님, 복음의 증인으로 다시 복음의 증언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달디단 복음을 세상이 쓰디쓰게 저항하더라도 그곳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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