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 증인,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르는…. [계 11:1-13]
 – 2025년 07월 16일
– 2025년 07월 16일 –
계 11:1-13 두 증인,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르는….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적 사명을 다시 받았다.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본보기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다. 이제 성도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 놓인다.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처럼 권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짐승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우상 숭배자들을 기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신다. 이것을 보고 우상숭배자 중에 남은 자들이 주께 돌아온다.
    
11장은 두 번째 삽화의 두 번째 장면이다. 다니엘의 “한 때, 두 때, 반 때” 예언(단 7:25)이 구원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본문의 때는 증언의 때다. 십사만 사천이 인침을 받은 이유는 신실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두 증인의 모델은 스가랴 4장, 모세와 엘리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다. 모세는 바로의 시대에, 엘리야는 아합의 시대에 예언 활동을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제국 안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제국의 권세에 맞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가 절정에 달할 때, 교회는 어떻게 제국 안에서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할 것인가? 본문이 그 본보기를 제시한다.
    
    
    
1. 성소의 측량(1~2절).
요한은 갈대(새번역은 측량자)를 받아서 성전을 측량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셀 것을 명령받는다.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서쪽 벽만 남아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에 성전과 계단, 성전의 바깥뜰, 거룩한 도성을 어떤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에스겔 40~48장과 스가랴 2장에서 성전을 측량하는 이미지를 가져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에스겔과 스가랴에서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측량하는 것은 성전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낸다(슥 2:5). 그러므로 요한이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는 자들의 수를 세어 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전과 그곳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건물 성전은 없어졌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 즉 교회가 성령이 거하는 새로운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살아있는 돌들이 모여 신령한 집을 지어 가는 곳이다(고후 6:16).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를 보호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성전의 바깥은 “그냥 두라(엑발로)”고 말씀한다. 이곳은 이방인의 뜰을 포함한 성전의 외곽 지역인데, 이곳은 42개월 동안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짓밟힘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42개월은 다니엘 7:25과 12:7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기간이다. 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1년과 2년, 그리고 반 년을 의미하는데, 총 3년 반이다. 3년 반 = 42개월 = 1,260일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큰 환난을 겪는 상징적인 기간이다. 3년 반은 7년의 절반이고, 그 의미는 “완전함”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 바깥, 즉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간 동안 환난을 겪으며 점점 순결해지고 나중에는 21장과 22장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42개월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을 가리키고, 교회가 세상에서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사역의 기간을 가리킨다.
    
    
    
2. 두 증인(3~6절)
두 증인의 이야기는 일종의 비유, 상징이다. 이 두 증인(개별적인 선지자들)은 교회가 종말에 부름을 받은 예언적 증언을 대변한다. 역사상의 교회 전체가 세계 역사의 최후 기간인 1,260일(42개월을 날짜로 풀어서) 동안 받은 소명이다. 이 두 증인은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감람나무와 두 촛대(슥 4:1~14)라고 표현한다.
    
먼저 왜 교회를 촛대로 비유할까? 그것은 교회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1장에서 일곱 촛대를 일곱 교회라고 이미 밝혔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두 촛대라고 표현하는데, 본문의 내용과 연결되는 두 증인의 소명과 관련하여 일곱 교회 중에 두 교회(서머나와 빌라델비아)가 신실한 증언을 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스가랴는 두 감람나무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새번역, 4:14)”이라고 밝혔다.
    
두 증인을 역사적인 인물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로 인식하며 그들은 왕과 제사장을 상징한다. 감람나무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왕 같은 제사장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5절의 이미지는 교회가 열왕기하 1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더 중요하게는 두 증인의 말씀 사역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6절 상반절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과 겨룰 때 일을 상기시키고, 하반절은 모세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는 교회가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서 사역할 것임을 알려준다.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대화를 나누신 인물들이 엘리야와 모세다. 전통적으로 엘리야와 모세는 예언서와 율법을 가리키고 상징하며, 따라서 교회의 사역은 철저하게 말씀 사역일 것임을 알려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근거하여 증거한다.
    
두 증인의 구약적 배경은 시편 97:5과 스가랴 4:4이다. 시편 99편부터 100편은 열방의 귀의를 노래하며, 계시록에 중요한 영감을 주는 시편이다. 그중에서 시편 97편은 하나님 나라와 결부되어 있다. 스가랴 4:4~10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눈이다. 하나님의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일곱 영이다. 성령은 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하나님은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시고 보호하신다.
    
성령의 불은 교회를 영적 용사로 만든다. 증인은 순교를 당하기도 하지만, 증인의 메시지에는 증인을 핍박하는 자들의 영적 사망 선고가 암호로 각인되어 있다. 두 증인은 누구일까? 성경과 교회의 특정 인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두 증인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협력하여 증언한다. 두 증인의 수치와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신실한 증인의 고난은 말과 삶을 통한 증언 이상의 복음 증거의 효과를 낸다.
    
    
    
3. 두 증인은 패배와 죽음과 수욕의 고난으로 증언한다(7~10절).
7절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세상의 세력을 대표하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교회를 죽이려 들 것을 보여준다(이 짐승은 13장에서 자세하게 등장한다). 신실한 말씀 사역의 대적은 사람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이며 그들은 사람들을 내세워 교회에 싸움을 걸어오므로 교회의 대적을 사람으로 오해하게 한다. 짐승들은 세상의 구조(방법)를 장악하여 교묘하게 공격해 올 것을 13장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신실한 교회는 말씀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 시기는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라고 밝힌다(7절).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일시적으로 두 증인을 이긴다. 육체적으로 상해를 주어 죽이기까지 공격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사흘 반 동안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 고대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서 다른 사람들을 겁박하고 제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10절의 “땅에 사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로마제국 =을 위해 부역하며 혜택을 누리고 사는 짐승을 숭배하던 우상 숭배자들이다. 그들은 두 증인의 신실한 말씀 사역에 양심의 괴로움을 당했기에, 그들의 죽음, 즉 두 증인(교회)의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내며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4. 두 증인은 승리하고 열방이 주께 돌아온다(11~13절).
하나님께서 이제 친히 일하신다. 두 증인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신다. 두 증인 옳다고 인정하신다. 마치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경이로운 장면이 소환된다.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다는 것은 마치 엘리야의 승천을 바라보게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들의 순교를 승인하셨다는 의미이며, 주님께서 걸으셨던 죽음-부활-승천의 순서를 따라간 것과 같다.
    
삼 일 반은 짐승이 승리를 누린 기간이다. 증인들이 신실하게 증언했던 삼 년 반에 비하면 얼마나 일시적인지 모른다. 두 증인은 부활하여 승천한다. 두 증인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발자취를 좇아갔다. 그들은 신실한 증언으로 어린양의 성전(聖戰)에 참여했고(7절), 십사만 사천의 모델이다.
    
두 증인의 이야기는 반전 그 자체다. 요한은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들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의미를 창출한다. 독자들이 알고 있는 성경 상식을 저항하도록 만든다. 먼저 두 증인은 엘리야와 모세를 넘어서는 증언의 결과를 도출한다. 열방이 주께 돌아온 것이다. 또 두 증인의 죽음에 우상 숭배자들은 마치 유대인의 부림절 축제를 연상시키는 반응을 보인다. 에스더에서 하나님 백성의 승리는 대적의 도륙을 포함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백성의 도륙은 대적들의 회개를 인도한다. 큰 지진에 죽은 자가 칠천이다. 칠천은 엘리야 시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의 수다. 또한 10분의 1은 구약에서 남은 자의 수다(암 5:3; 사 6:13). 요한은 이 수를 남은 자가 아닌 죽은 자의 수로 제시한다. 10분의 1에 해당하는 칠천 명이 심판을 받고, 나머지 10분의 9가 남은 자들이다. 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파멸이 아니다.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14:7). 두 증인의 사역은 힘든 고난을 통과하지만 결국 열매를 맺게 된다. 이처럼 교회의 사역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어린 양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통해 결국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성전 내부와 바깥마당으로 구분하여 내부만 측량하라고 하신다(1절). 바깥마당은 이방인의 뜰을 가리킨다. 에스겔의 측량 환상에 기초한다면 측량 받음은 구원받음과 진실한 교회, 거룩한 공동체를 상징한다. 또한 다니엘의 기록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번제단을 제거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웠다(단 8, 11, 12장). 성전 내부와 분향단은 보호를 받으나 번제단을 비롯한 외부는 핍박에 직면한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 교회가 영적으로 안전하게 보호받지만, 육체적으로는 핍박과 박해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권세로 성도의 삶을 짓밟는다. 이런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 서야 한다.
    
-그런데 “마흔두 달” 동안이다. 분명한 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간을 통해 환난과 궁핍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건재하다. 이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증언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 주님 걸어가셨던 길이다. 삼 년의 공생애, 사흘 동안의 죽음, 부활, 승천….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다. 증인은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다. “주님께서 내시며 가신 그 길 따라” 가는 자들이 제자(증인)다!
    
-증인으로 세움 받아, 마흔두 달 동안 유린당하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을 받아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증언하다 죽임을 당한다. 세상은 주님의 죽음을 기뻐했듯이 성도의 죽음도 기뻐한다. 하지만 주님의 죽으심은 부활하심으로 이기셨듯, 두 증인의 죽음도 3일 반 동안 큰 거리에 걸려 죽음의 수치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생기”로 부활한다. 주님의 부활처럼 똑같이 부활한 것이다. ‘그들이 두 발로 일어선다.’ 모진 박해를 받았던 교회가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서 주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하늘로 올라간다.”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이것이 증인의 삶이다.
    
*증인(제자)은 주님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도 그대로 따른다.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일” 즉 3년 반과 “삼일 반 후”…. 주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과 죽음 뒤 부활하신 시간과 흡사하다. 이 길을 따르는 자가 증인이다. 주님이 당하셨던 박해의 자리, 주님이 행하셨던 권능의 자리, 주님이 당하신 죽음, 주님이 보이신 부활의 길을 증인은 착실하게 따라간다. 이것이 순종이다.
    
*이런 흐름으로 읽으면 “굵은 베옷”은 주님이 외치셨던 메시지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심판의 도끼가 발등상에 놓였다.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이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입어야 할 “굵은 베옷”은 주님이 외치셨던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회개와 구원이 절실하게 외쳐져야 할 시대다. 이를 외치면 반드시 죽음의 위협과 박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자!
    
   
**두 증인(교회) 이야기는 요한이 먹은 달콤한 말씀이 어떻게 세상으로 증언되는지를 다룬다. 쓰라리게(죽기까지) 증언하나 결국 달콤한 승리가(부활과 승천이) 기다린다.
    
**박해를 받는 기간 42달, 증인들의 증언 사역 1,260일, 고난과 죽음의 기간 3일 반, 긴 박해와 사역 기간 짧은 죽음의 시간, 그러나 결국 부활과 승천이 기다린다. 이 기간에 주님 가신 그 길 따라 걸어야 영광(부활과 승천)이 나의 길이 될 것이다.
    
**계시록이 이토록 격려와 소망의 책이었던가! 결국 증인(제자)은 승리하고 영광 받는다. 끝까지 증인의 삶을 포기하지 말자.
    
**늘 반전을 꿈꾸는 것이 인생인 듯하다. 인생이 꿈꾸는 반전은 “인생 역전”으로 흔히 부른다. 그런데 영원의 삶에서 “영원 역전”이 있음을 잊어버리면 곤란하다. 인생을 하나님 없이 마음껏 자기 마음대로 살다 결국 반전 없이 퇴장하는 인생은 가엾은 인생이다. 그러나 어떤 형편에 거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역전이 일어난 인생이 바로 나다! 주님의 제자다!
    
**결국 증인의 삶이 증인 되게 하시려고 “능력”을 주시고 “굵은 베옷”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이 참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어떤 형편에서든지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오늘도 증인으로 산다!. 주님의 능력과 “굵은 베옷(복음)”을 가지고…. 먼저 이 길을 가신 주님 따라…. 더예수님처럼….
    
    
    
*주님, 두 증인의 사명이 오늘 제게 주어진 것임을 압니다. 예수님처럼, 두 증인처럼 저도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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