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3:1-10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사탄은 교회를 어떻게 핍박하는가? 용이 바다 모래에 섰다. 바다에서 첫 짐승이, 모래(땅)에서 둘째 짐승이 올라온다. 이들은 사탄의 대리인들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정치 지도자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 지도자다. 용과 더불어 666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가 괴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고, 그나마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수준이었으나 그것도 날씨에 따라 변하는 바다는 공포 그 자체였다. 다니엘 7:1~6은 네 마리의 악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이지만, 요한은 한 마리의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짐승은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괴물이었고, 메시아적 존재로 행동하는 존재였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된 것은 3절에서 용의 일곱 머리 중 하나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된 것 같았으나 상처가 나으며 온 세상을 놀라게 하며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게 되는 것 때문이다. 역사기록 중에 에를 들면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네로 황제가 68년에 자기 목을 칼로 찔러 자살한 것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과 음모론이 퍼지면서 로마 제국은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네 명의 황제들이 등장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전쟁을 수행하다가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고 혼란스러웠던 로마 정국을 수습한다. 이후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등극하여, 로마를 굳건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다. 주변국들과 부속민들이 로마 제국의 무소불위한 권세에 감탄을 자아낸다. 요한의 묘사는 네로의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와 같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첫째 짐승을 묘사한다.
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1~4절)
13장은 요한이 묘사하는 두 짐승의 이야기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1~10절)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11~18절)이다. 이 두 짐승은 구약에 등장하는 두 괴물, 바다의 리워야단(욥 41:1)과 땅의 베헤못(욥 40:15)을 패러디한 것이다. 구약에서 이 괴물들은 악의 세력을 대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파괴하는 존재들로 당시 묵시 문학(에녹서, 에스드라 2서, 바룩 2서 등)에 자주 등장한 소재였다. 용과 두 짐승은 가짜 삼위일체를 이루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 낸다. 악은 항상 하나님을 흉내 낸다. 그렇기에 악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일 수 있었다.
계시록 12장의 용은 4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흉내 내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5장의 어린 양을 흉내 낸다. 또 땅에서 올라온 짐승(11~18절)은 계시록 11장에 묘사된 성령의 사역을 흉내 낸다. 이후 13장의 사건들은 12장의 사건들이 끝난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12장에서 용이 여자를 박해한 것을 좀 더 상세하게 다른 상징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다.
용은 두 짐승의 조력을 받는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니엘 7장을 배경으로 묘사된다. 이 짐승은 다니엘 7장의 네 짐승(표범, 곰, 사자 등) 이 합쳐진 모습이며,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은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모든 제국(바벨론, 페르시아, 메대와 헬라)을 종합해서 상징하고 있는 것을 보아 모든 억압하는 제국들,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악의 제국들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그 어떤 정치권력이든 하나님의 진리를 넘보며 절대 권력을 추구할 때 짐승 같은 권력이 되는 것을 말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신적인 권위와 지위를 추구했고, 그 순간 그런 황제들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마적인 짐승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 것이다. 세상의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황제들은 자기들이 예배의 대상이 되길 원한다.
용(사탄)이 정치 지도자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구현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위임한 권세를 왜곡하여 사용하는 지도자는 짐승과 같다. 인가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3~4절을 통해 짐승의 일곱 머리 중의 하나가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면 온 땅이 경탄을 자아내며 짐승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짐승은 사탄에게 권세를 받았고, 아무와 비교할 수 없는 위엄과 명성을 얻는다. 계시록 기록 당시 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겪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강력한 로마로 굳건하게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는 로마에 대항하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노예로 끌려가 로마 판테온의 티투스의 개선문, 유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노동력으로 세운 콜로세움의 웅장함은 당시 사람들에게 탄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도미티안은 이런 일련의 통치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특히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황제 숭배를 주도했다.
용과 짐승의 권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성도가 핍박이나 거짓과 유혹에 맞서서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인내하며 견뎌낼 때 사탄과 그 대리 통치자들은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짐승의 권세(5~8절)
짐승은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입술’을 받아 마흔두 달 동안 일한 권세를 받았다(5절). 신성 모독하는 말은 거짓과 유혹의 근거다. 자기 신성화를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을 내뱉는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한다(6절). 또, 성도들과 싸워 이겨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7절) 행사하여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는다(8절). 하지만 기한은 마흔두 달 이다(5절).
요한은 이런 묘사를 통해 박해를 받는 성도들의 처지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견디도록 인내를 요청한다. 짐승의 권세는 “주어진” 권세다. 주권자가 빼앗아 가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1세기 성도들은 요한이 묘사하는 용과 두 짐승의 악마적인 다스림을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를 통해 경험하고 있던 일이었다. 동시에 로마의 권세자들이 자기를 신격화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백성(그의 장막)”을 모독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는 길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이 땅에 사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며 그들은 어린 양 대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3.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10절)
요한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레미야 15:2과 43:11을 인용하여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라고 권면한다. 짐승은 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설령 제거한다고 해도 정해진 기간에는 다른 짐승들이 더 큰 악을 행하며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짐승을 무너뜨리는 칼은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 선 검(1:16; 19:15)”, 곧 하나님의 말씀이 짐승을 이기는 무기다. 또, 오직 “예수가 주시라(고전 12:3)’는 고백과 그 고백 따라 살아내는 삶이 무기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과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짐승을 이기는 무기이기에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인내(휘포모네)”는 압력을 견디는 힘이다. 짐승을 예배하라는 압력을 견디면서 오직 어린 양만 따라가는 끈기와 결단이 요구된다. “믿음(피스티스)”은 “신실함”이다.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자기들 믿음의 삶에 대한 신실함을 의미한다. 성도가 신실할 수 있는 것은 땅에서 악의 제국들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주권은 흔들리지 않고 정의로운 심판은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배”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땅에 사는 자들”은 “누가 이 짐승 같으냐?”라며 그를 경배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요한은 사람은 누군가를 예배하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일깨운다. 만약 사람들이 온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에 충성하게 됨을 보여 준다. 사탄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유혹하여 짐승을 따르게 한다.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는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을 예배한다.
나는?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통치권을 위임하듯, 큰 용도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에게 세상을 다스릴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준다. “일곱 머리, 열 뿔, 열 왕관” 등 짐승의 외모와 능력은 용을 반영하며(12:3), 용과 더불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패배한 자들(12:7)이기에 그들의 위용과 위세는 허상이고 허세일 뿐이다. 그러니 잠시 기승을 부리는 사탄의 세력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그 실체와 최후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용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아류일 뿐이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살아난 것처럼(5:6) 용에게서 권세와 권능을 받은 짐승도 죽게 된 것 같더니 상처가 나아 살아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를 추종하고 숭배한다.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혼동할 만큼 사탄은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사람을 기만하고 세상을 미혹한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과 같다고 몸부림치며 보이려 하지만 모방할 뿐이었다.
-성도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는 기간에도(12:14), 짐승은 교회와 성도를 향한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과장된 말(교만함)과 신성 모독적인 말(참담함) 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 천하를 다스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승리요 제한적이고 표면적인 승리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세상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지만, 악한 짐승은 세세토록 통치하실 그리스도와 달리 영원한 패배와 멸망으로 끝날 것이다.
-악이 승리하는 듯 보이고 악한 세력이 위세를 떨치며 위협하고 미혹하는 마지막 때에, 이 땅의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일이다. “누가 능히 짐승과 더불어 싸우리요?(4절)”라고 세상은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내와 믿음으로 악한 짐승과의 싸움을 감당할 때, 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린양의 보혈과 말씀을 의지하여 싸울 때(12:11) 최후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탄의 세력은 거짓된 모방을 일삼는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모방하여 사람들이 용을 경배하게 한다. 이 단순한 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간다. 그만큼 사탄의 권세와 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말(언어)는 교만하기 짝이 없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일관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분별력과 신실한 언어 습관이 왜 중요한지 보여 준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탄이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약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보다 더 크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세상과 사탄의 유혹과 미혹 속에서도 잘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일상이 말씀과 점점 멀어져 있다면 그건 매우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탄은 오직 말씀의 검으로만 이길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와 비교하여 혼동할 만큼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성도를 기만하고 세상을 미혹한다. 우리 사는 세상도 유사 기독교와 각종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은사와 기적이 무성한 것에 누가 역사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주님, 사탄과 짐승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만을 잘 분별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순전한 믿음의 삶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결국 누구를 예배할 것이냐는 본질적인 질문에 나를 예배하지 않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만된 우상도 예배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 예배할 것을 다시 굳게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