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3:11-18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이어 땅에서 둘째 짐승이 올라온다. 첫째 짐승이 ‘리워야단’과 비슷했다면, 둘째 짐승은 ‘베헤못’과 비슷하다. 이 짐승을 요한은 이후에 “거짓 선지자”로 부른다(16:13; 19:20; 20:10). 둘째 짐승의 특징은 ‘어린 양의 모습으로 흡사하게 꾸미고, 용처럼 말한다(11절).’ 성령을 패러디하는 모습이다. 이는 첫째 짐승이 로마 제국과 황제를 상징한다면, 둘째 짐승은 그 제국과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유혹하는 역할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둘째 짐승은 큰 이적으로 미혹하여 첫째 짐승을 우상숭배 하게 만든다. 우상숭배 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짐승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짐승의 수인 666을 받게 한다. 그 표가 없으면 거래를 할 수 없다.
1.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11~12절)
13:1~10은 대부분 과거형 동사를 사용하지만, 본 단락(11~18절)은 대부분 현재형 동사를 사용한다. 첫째 짐승 이야기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라는 의미다. 하지만 둘째 짐승 이야기는 현재 경험하는 상황과 가까운 것을 사용해 강조한다. 당시 1차 독자였던 아시아 지방의 성도들에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둘째 짐승은 아시아 지방에서 로마 제국의 권력을 위임받아 제국의 시스템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는 세력일 것이다. 또한 둘째 짐승은 어린 양 예수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나 용처럼 이야기한다.
용과 두 짐승은 하나님(4:3, 11), 어린 양(5:6, 12), 성령(1:4; 3:1; 4:5; 5:6)을 흉낸 내며 거짓 삼위일체를 지향하는데, 용은 하나님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리스도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성령을 흉내 낸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권세를 주는 것처럼 용이 첫째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둘째 짐승은 그 권세를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한다. 이를 통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첫째 짐승을 예배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감동을 주는 것을 흉내를 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둘째 짐승은 아시아 지역의 관리들을 상징하고, 그들은 황제 숭배를 고취하며 로마에 충성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2. 둘째 짐승의 활동(13~17절)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과 동일하게 “큰 이적”을 행함으로 미혹한다. 그는 엘리야와 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는 자다(13절).
둘째 짐승이 이적을 통해 땅에 사는 자들이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했다는 것은 그의 역할이 매우 “종교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1세기 당시 로마 제국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황제 숭배는 곧 로마 권력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지역의 지도자들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로마 권력을 향한 추구와 탐욕이었다. 그러므로 둘째 짐승의 종교적인 활동은 치밀하고 왕성할 수밖에 없었다. 즉,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것에는 자기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으리라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라고 한다(14절). 이 우상은 제국 전체에 퍼져 있었으나 당시 특히 아시아 지방에 많이 세워진 황제의 신상이다. 둘째 짐승이 그 우상에게 생기(프뉴마)를 주어 말을 하게 했다는 것은 11장에서 하나님이 죽임당한 두 증인에게 생기(프뉴마)를 주어 살려낸 것(11:11)을 흉낸 낸 것이다. 사람의 입을 지으시고 말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출 4:11)을 모방한 것이다. 이는 당시 마술의 일종인데 이 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려 했다. 1세기경 마술사들이 진흙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들에게 생기를 주고 말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펴져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 특히 애굽의 마술사들은 주문을 외우거나 약물을 사용하여 인형들을 움직이고 말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이야기였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에 익숙한 1세기 독자들은 15절의 현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한편, 주의해야할 것은 둘째 짐승으로부터 생기를 받고 말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중요한 경고를 우리에게 준다. 영적 현상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이다. 진정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시험(도키마조)”해야 한다. “도키마조”는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행동을 지칭한다.
또한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않는 자를 죽일 수 있는 권세를 받았다(15절).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억압과 강제, 전체주의를 통한 우상숭배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야기와 같다.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도록 강요하고 거부하는 자는 죽일 것을 명령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거부하고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살았다(단 3장). 그런데 요한의 환상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었다(11:7; 13:7). 이 이야기는 당시 에베소에 세워진 도미티아누스의 신상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황제 숭배의 위험이 그들 앞에 강요되는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둘째 짐승은 “모든 자”가 “짐승의 표”를 받게 하여 경제생활을 통제하려 했다(16~17절).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사람,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유인이나 노예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표(카라그마)”는 계시록에서 일곱 번 사용된다. 모두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만 사용된다(13:16, 17; 14:9, 11; 16:2; 19:20; 20:4). 이마에 표를 받는 것은 ‘내면의 헌신’을 가리키며, 오른손에 받는 표는 그 헌신을 실제 삶에서 실행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마나 오른손에 표를 받는 것도 성도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는 것에 대한 모방이다(7:2~3; 8:4; 14:1; 22:4).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짐승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이다. 짐승의 삶의 방식을 따라간다는 의미다. 이 문제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면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 더불어 경제 활동의 제약으로 이어진다면, 어린 양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 될 것은 자명하다.
돌아보자. 에베소 교회 ‘거짓 사도들(2:2)’의 가르침, 버가모 교회 ‘발람과 니골라당(2:14~15)’의 가르침,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 이세벨(2:20~24)의 가르침 모두 “타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제국의 황제를 숭배하는 시스템을 동시에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분명하게 그 거짓 주장들을 반박하고 있다.
3. 짐승의 수 “666”(18절)
요한은 17절에서 짐승의 표가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의 숫자라고 언급했다. 요한이 가리키는 짐승은 둘째 짐승이 아니라 첫째 짐승이 분명하다. 요한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총명함으로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라고 말하며 그 수가 육백육십육이라 밝힌다. 즉,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의미다.
“666”은 무엇일까? 이 의미를 푸는 열쇠는 본문과 당시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여섯째 심판은 우상 숭배자들이 받는 심판이다.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 666은 용과 두 짐승의 삼위일체다. 전통적인 히브리인의 숫자에 담긴 의미로 보면 6은 불완전수, 7은 완전수, 8은 새 창조의 수다. 666은 사탄의 삼위일체를, 777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888은 그리스도를 뜻한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수비학(게마트리아)”이다. 히브리어 문자를 숫자로 변환하여 이름에 있는 각 철자의 값을 더하는 헬라식 관행이었다. 모든 문자는 그에 해당하는 숫자를 지니고 있으며, 단어나 이름의 경우 각 철자에 해당하는 숫자들을 모두 더하면 그 말이 지닌 의미가 나타난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666”에 대한 게마트리아 해석은 “네로 황제(Nero Caesar)”이다. 히브리어식으로 치환하여 이해하자면 “n=50+r=200+w=6+n=50+q=100+s=60+r=200=666″이 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당시 로마에 퍼진 네로의 환생설과 도미티아누스가 네로의 흉내를 냈던 것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한 결과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17절의 “그 이름의 수”라고 말한 것에서 착안한다.
여기에 전체 맥락과 의미를 집중하여 말씀은 말씀 안에서 최대한 이해해야 한다. “666” 자체만 묵상하면 오해의 늪에 깊이 빠진다. 계시록 전체 문맥에서 “666”은 “144”와 함께 비교하며 이해해야 할 것이다. 666은 인간의 수, 짐승의 수다. 144는 천사가 측량한 새 예루살렘의 수(계 21:16~17)다. 14장에서는 144,000이 666을 이기고 승전가를 부른다. 요한은 어떤 특정 인물을 상징하려는 것보다 완전수 7에 하나 모자라는 숫자 6 셋이 모여 보여 주는 “완전히 불완전한” 존재를 상징한다. 요한은 “그것은 사람의 수”라고 했을 때 정관사가 없는 사람(안뜨로포스)이라고 썼고 이런 경우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666은 자기를 우상화하고 경배하게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제국을 상징하며, 역사적으로 그 어떤 지도자나 나라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우상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따르는 성도는 “지혜와 총명”으로 짐승의 정체를 분별하여 폭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666은 어떤 의미인가? 666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모든 체제다. 반면, 144는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하는 모든 체제다. 666은 태고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역사 속에 부상했다가, 어린 양의 군대 114,000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사라졌다. 666은 사탄이 그 근원이다. 사탄은 정치세력과 종교 세력과 동맹을 맺고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킨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하지만,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 인간을 천사의 수준으로 고양해 왕 같은 제사장을 만드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자는 666의 표를 받은 자들인 것이다.
18절의 지혜와 총명은 분별력과 통찰력을 의미한다. 용이 앞장 세운 짐승의 정체를 분별하고 저항하라는 것이다. 주변 사회를 지배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짐승의 체제에 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해 상상력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배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배는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하늘의 시각에서 갖도록 만든다.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의 전조가 드리운다 해도 “저항하라”는 것이 13장의 메시지다. 배제와 소외로 협박하는 “순응하라”는 사회적 압박을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용과 두 짐승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철저하게 모방한다.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권세를 받은 것처럼 첫째 짐승(로마 제국)도 용에게서 권세를 받았고(2절),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영광을 돌리듯, 둘째 짐승(거짓 선지자, 거짓 지도자, 거짓 영)도 땅의 사람들이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미혹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방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와해시키는데 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탄의 눈속임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현혹되기 쉽다. 인간의 탐욕을 부채질하는 사탄의 기만과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을 판독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 짐승은 큰 이적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며 우상을 숭배하도록 유혹한다. 두 증인처럼(11:4)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는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도 하였다. 지금도 사탄은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나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때로는 회유나 위협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한다. 그리고 우리를 생명과 자유와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말씀과 달리 우상은 죽음과 속박과 탐욕으로 끌고 간다. 진리를 떠난 은사나 체험이나 영성을 주의하고 분별해야 할 이유다. 지나치게 경계해도 부족한 것이 영적 전쟁의 현장이다.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의 이마에 인을 치듯(7:3~4), 둘째 짐승도 짐승에게 속한 자들의 손이나 이마에 그 이름이나 수가 새겨진 표를 받게 한다. 특히 황제 숭배를 거부한 자에게 경제적인 압박과 제재가 가해지자, 사람들은 신분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짐승의 표를 받았다. 지금 이 시대는 부와 힘을 우상으로 삼고 생존과 생계로 우리를 옥죄며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고 있다. 당장은 우리에게 밥줄을 주는 저 세상만이 생명줄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원천임을 잊으면 안 된다.
-악의 세력들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모방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영광을 빼앗는데 있다. 우리도 겉으로는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다고 말도 하고 일도 하나, 실제로는 언제든 나의 왕국과 명성을 위해 일하도록 미혹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항상 깨어 겸비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거스르면서까지 거짓 안심을 심어주는 이단의 미혹에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또 욕망과 야망을 부추기는 우상숭배의 유혹에 나는 어떻게 맞서는가?
*주님, 둘째 짐승의 유혹이 또다시 강력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주술과 무속, 사이비, 이단의 준동들은 더욱 거세어만 갑니다. 주의하고 분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는 삶이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