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4:1-13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의 구원과 승리의 새 노래
14장에서 요한은 세 환상을 보게 된다. 12~13장에서 본 것과는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용과 짐승들을 따르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받게 되는 심판의 환상과 어린 양을 신실하게 따르며 박해받는 사람들이 받게 될 구원의 환상이 그것이다. 13장만 보면 교회는 공포와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4장을 함께 보아야 하는데, 십사만 사천이 어린양의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고 승전가를 부른다.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장면을 본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다. 하늘의 세 천사는 영원한 복음과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를 전파한다. 하늘에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온다.
1. 어린양을 예배할 것인가? 짐승을 숭배할 것인가?(1~5절)
요한은 13장의 짐승과 14장의 어린양을 연이어 배치하여 진정한 충성의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14장은 13장과 대조된다. 666에 기겁하는 자들은 144,000을 보아야 한다. 어린양이 십사만 사천과 함께 시온산에 섰다(1절). “시온산”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다. 이는 결국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사 2:2; 미 4:1).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올 것을 꿈꾼 장소이기도 하다. 계시록 21:10에서 요한은 하늘의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모습은 시온산이 왕이 세워지는 곳을 노래하는 시편 2:6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온산은 거룩한 산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고 하늘 보좌로 연결되는 통로이다(시 11:4).
요한은 땅의 시온산이 아닌 하늘 보좌 환상을 보며 이 기록을 남겼다. 하늘 성전에서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새 노래를 듣게 된다(3절). 십사만 사천이 이마에 받은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은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은 자들(13:16)과 대조된다. 당시 이마에 표를 받거나 인침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주인이 그리고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십사만 사천은 어린 양에게 속해 있는 어린 양의 군대였다.
요한이 들은 큰 소리는 현악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담은 소리였고, 그 곡조에 맞춰 십사만 사천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 어린 양의 군대가 부르는 새 노래는 영적 전쟁을 향한 출정가일 수 있다. 하늘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땅에서는 오직 “속량함을 받은(3절, 아고라조-값을 치르고 사다)” 십사만 사천만이 배울 수 있는 노래다. 또 4절은 이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표현한다. 이 이미지는 예레미야 2:2~3이 배경이다. 첫 출애굽을 가리키는 이야기로 더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십사만 사천은 어린 양의 명령을 따라 어디든지 따라간다(4절). 이 모습은 영적 전쟁에서 오직 순종의 모습으로 싸우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며, 그들이 어린 양의 군대로서 철저하게 준비된 자들임을 보여준다.
어린 양을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들은 큰 창녀 바벨론(로마)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바벨론이 유혹하는 음행(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짐승을 따르는 자들과 달리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5절)”이다. 십사만 사천은 죽임당한 어린 양처럼 온전한 희생을 드리는 자들이다. 요한은 이 십사만 사천의 정체에 대해 그리스도 안의 성도들이지만, 그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순교자로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들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사 53:9). 또한 첫 열매기에 더 큰 수확이 올 것도 환상을 통해 기대하게 한다.
2. 세 천사의 메시지(6~11절)
요한은 이 단락에서 ‘또 다른 천사’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이미 등장했던 천사들과 다른 천사라는 의미다. 본 단락에서 등장하는 세 천사는 특별한 임무를 받은 천사들로 각기 다른 메시지를 공포한다. 그들은 복음에 관한 일을 하는 천사들이었다. 첫째 천사가 공중을 날아가며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한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이라는 묘사는 13장에서 짐승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7절), 5장에서는 어린 양의 피로 속량 받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9절) 사용되었다. 복음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복음이 구원 못 할 사람도 한 사람도 없음을 보여준다. 땅의 모든 사람은 누구라도 짐승의 유혹에 빠질 수 있으나 구원받을 기회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라”이다. 한편, 첫째 천사가 공중으로 날아다니며 큰소리로 이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가능한 넓은 범위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전하려는 것이다. 심판의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회개의 외침임과 동시에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다.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을 선포한다. 이것은 요한이 천사의 입을 통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로마 제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붕괴는 18:1~19:4를 통해 자세하게 다룬다. 본문은 로마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로마 제국이 모든 나라를 유혹하여 음행(우상숭배)으로 이끈 죄를 폭로한다. 로마가 모든 나라에 먹인 것은 ‘진노의 포도주’였다. 이는 로마가 모든 나라들을 꾀어 저지르게 하는 악행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려오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천사도 큰 음성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짐승의 표(666)를 받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 포도주는 어떤 것으로도 희석하지 않은 강력한 독주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공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단락의 메시지는 문자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난해하지만, 분명한 것은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을 경고하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은 영원히 쉼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3. 권면과 위로(12~13절)
요한은 본문을 통해 성도의 정체성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다.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의 신실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다. “예수의 신실함”을 지키는 성도는 예수가 어디로 가든지 따르며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키는 자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하늘의 음성이 들려주는 축복을 알려준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지금 이후로(아프 아르티)”는 문맥상 “아파르티(틀림없이)”라는 단어일 가능성이 크다. 이 단어의 의미로 문맥을 파악하면 ‘어떤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확인’의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즉,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틀림없이 복이 있도다. 이 축복의 말씀에 성령이 동의하며 그들에게 안식이 주어짐을 확인한다. 새번역은 13절 후반절의 천사의 음성을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한다.
이 언급들을 통해 바벨론의 추종자들은 “안식 없이 쉬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천지 창조에서 베푸셨던 안식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성도가 바벨론의 경제적 유혹을 뿌리치고,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안식은 저항이다. 바벨론의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나는?
-주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늘 서 계신다. 어린양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십사만 사천)과 함께 시온산에 서신다. 용과 두 짐승의 거센 핍박과 미혹 속에서(12~13장) 영적 전투를 벌인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지키셨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고 박해는 격해지며 그 신원의 부르짖음은 높아져만 가지만,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은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구원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식은 전의를 다시 불태워 바다 위에 선 용(12:17)과 끝까지 우리와 함께 서 계신 주님을 의지하여 맞서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새 노래를 부른다.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랑이신 예수를 향해 믿음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어린 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른 사람들, 모래 위에 선 용(12:17)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만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이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은 지금도 어린 양을 따르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위로를 주고, 악한 세력들의 거센 도전 앞에서 끝까지 저항할 것을 격려해 준다. “오늘” 고난 앞에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이 “내일” 주님 앞에서 정결한 모습으로 “새 노래”를 찬양하는 십사만 사천의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결국 심판을 맞이한다. 성도들을 박해하고 모든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도 안식(구원)을 얻지 못한 채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아 세상에서의 안전과 안락을 꿈꾸던 자들은 영원한 쉼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을 섬기고 따르다가 죽은 성도들은 잠시 고난을 겪지만,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은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영원한 파괴와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을 지키고 주를 따라온 삶의 결과가 나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성급히 불평하기보다 그 너머를 바라보며 믿음의 인내를 가질 때 참 안식과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시온산에 서서 부를 새 노래, 즉 찬양은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의 것이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주께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그날까지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 때, 고단한 광야 길과 같은 인생길이라도 하늘 영광을 맛보며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복은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부라기 보다, 믿음을 지키다가 주 안에서 순교의(순교자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이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는(속할 수 없는,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소유 되었으므로) 하늘 순례자로서 주님의 은총으로 살기를 구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 하리라.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의 활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그들의 ‘666’을 보면 막연하고 큰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어린 양과 함께 선 “144,000”이다. 곧 충성되게 복음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내어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한 자들이다. 이마에 짐승의 표가 아닌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써진 성도들이다(1절).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도록 억압하는 지도자들의 폭거만 보면 절망이다(13장). 하지만 어린 양과 그와 함께 선 144,000을 보면 감격이다. 이들이 어린 양과 시온산에 함께 서서 무엇을 하는가?
*새 노래는 결국 삶의 노래다! 용과 두 짐승의 유혹을 꿋꿋이 이겨낸 삶을 살아낸 자들만이 저마다의 승리의 환호성을 외칠 수 있다. 음녀의 유혹을 이기고, 어린 양을 향한 절개를 지켜 ‘666’을 받지 않은 삶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여 그 뒤를 따라간 삶의 노래가 “새 노래”다.
*그렇다면 ‘새 노래’ 버전은 무수히 번안되어 불릴 노래다. 각자의 삶의 현장이라는 색이 입혀진 것이고, 각기 맞선 영적 전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진 것이며, 어린 양을 뒤따라가는 우직함이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굳건히 버틴 삶의 노래들일 것이다. 그렇게 어린 양 예수의 증인의 삶을 각기 살아낸 무수한 무리들(114,000)이 마음을 모아 외치는 소리다. 나의 노래이자, 공동체(교회)의 노래다.
*일곱 번째 인을 떼기 전에 여전히 어린 양 예수는 우상숭배에 함몰된 세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세 천사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심판과 그때를 외치며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가히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어린 양 예수님답다. 결코 먼저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직도 기회가 있다. 어린 양에게 진노의 포도주를 받을 것인가? 새 노래의 포도주를 받을 것인가?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삶에 늘 평안이 이는 것이 아니기에 성경은 인내를 줄곧 요청한다. 특히나 마지막 때 “인내”는 나를 “영원한 안식”을 더욱 사모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잠시의 고난을 인내할 때 영원한 안식을 받는다.
*잠시의 인내는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내가 원하는 결과와 다를 때 특히 요청된다. 내 기대와 다른 오늘이 되더라도 “인내”하자. 성급하게 불평하지 말자. 인내 너머의 안식을 소망함으로 견디자.
*주님, 오늘도 주님과 함께 부를 새 노래를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나의 새 노래 가사가 써지는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오직 어린 양을 따라, 믿음의 삶으로 써지는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