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일곱 대접 심판 전에 부를 승리의 새 노래 [계 15:1-8]
 – 2025년 07월 23일
– 2025년 07월 23일 –
계 15:1-8 일곱 대접 심판 전에 부를 승리의 새 노래
    
15장은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하고,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리고 16:21까지 진행될 일곱 대접 재앙의 실행을 위한 준비로 마무리된다. 특히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두루마리(12~15장)의 절정이다.
    
어린 양의 노래(15:2~4)는 두루마리(12:1~14:20)의 결론이자 동시에 대접 심판 시리즈(16장)의 서론이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용의 삼위일체(666)에 대한 어린양의 승리로 인해 두 가지 추수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어린양의 노래는 어린양의 승리를 극대화하며,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본문에서 곡식의 추수 의미를 모세의 노래 패턴을 따라 강조한다. 어린양의 승리는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다(15:1, 5~8). 포도 추수 환상은 대접 심판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된다.
    
    
    
1.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찬양(1~4절)
요한은 일곱 재앙이 마지막이라고 언급한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시리즈에 이은 일곱 대접이 가져올 마지막 재앙이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마지막”이라는 것이 모든 심판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땅과 불신자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내려졌지만, 악의 근원인 사탄과 그 졸개들에 대한 심판과 처벌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4장에서도 하늘에 올라 유리 바다를 본 적이 있다고 했었다(4:6). 그런데 본문에는 유리 바다에 불이 섞여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이긴 사람들을 보는데, 그들은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았으며, 짐승을 이긴 사람들이다. 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대로 새 예루살렘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21:7). 하지만 그 전에 사탄과 졸개들이 성도들을 죽이므로 이기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11:7; 13:7).
    
이긴 성도들은 거문고(키따라, ‘하프처럼 생긴 현악기’)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하던 자기 백성을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듯이 다시 한번 자신의 백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해 내신다. 출애굽 때는 열 재앙으로, 계시록에서는 일곱 재앙으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애굽과 로마에 내리셨다. 그러므로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 부른 모래의 노래는 승리의 노래였다(출 15:1~18). 동일하게 3~4절도 승리의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는 “미리 부르는 노래”다.
    
미리 부르는 노래에 담긴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이미 하신 분이고. 그의 성실하심이 변하지 않으시기에 다시 자기 백성을 구출해 내실 것을 확신한다.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고, 오직 예배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하신 분이며, 결국 모든 민족이 와서 경배하게 될 것이다.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라는 모세의 노래가 어린 양의 노래로 불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새로운 출애굽을 어린 양을 통해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의 사자(메시아)에게 주신 약속을 죽임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 이루셔서 그의 피로 모든 민족으로부터 속량해 내신(5:5~10) 하나님의 역사가 어린 양의 노래에 함축되어 있다.
    
이긴 자들은 하늘의 유리 바닷가에서 단지 그들의 적이 멸망한 것을 노래(모세의 노래)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민족이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영화롭게 하고,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을 노래(어린 양의 노래) 한다. 이긴 성도들은 짐승의 유혹과 압제를 경배와 찬양으로, 예배로 이겨 냈다.
    
그러므로 일곱 재앙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점점 분명해진다.
    
    
    
2. 일곱 대접 재앙이 성전으로부터(5~8절)
요한은 일곱 나팔 심판을 마지막(에스카토스) 재앙으로 부른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마지막 시리즈의 마지막 재앙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재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지를 다룬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인 심판과 나팔 심판이 시행되었다. 이들 심판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심판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소개되는 심판은 전혀 다르다. 회개할 기회가 없다. 심판의 연기도 물론 없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심판이다.
    
5~8절에서 일곱 대접 심판이 실행될 준비를 한다. 대접 심판은 성전의 이미지 속에서 시작된다. 성전과 대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소의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와 연결된다(5:8; 6:9~10; 8:2~5). 성도가 드린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과 피의 탄원 기도가 하늘에 상달된 것이다. 1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는 번역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마지막 재앙)에 가득 차 있다”라는 의미다. 7절에서 이를 반복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탄원에 깊이 탄식하시며 진노를 누르고 계셨다.
    
요한이 본 하늘 성전에 있는 증거 장막은 땅의 장막 원형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행해졌던 증거 장막 성전이 하늘에서 열리며, 일곱 대접 재앙이 예배 의식의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깨끗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천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금”대접(홍보에)”은 제사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닌 넓적한 그릇으로 묘사한다. 이 그릇들이 하나씩 쏟을 것이다(16:1~21). “쏟다”라는 동사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속죄 제물의 피를 제단 위에 쏟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다(레 4:6~7, 17~18, 25, 30). 그렇다면 대접에 가득 담은 진노의 재앙을 땅에 쏟는 것은 일종의 예배 행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일곱 재앙이 이어나기 직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찬 것을 연기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광 임재가 가득한 가운데 일곱 대접 재앙이 쏟아진다. 이 모습을 요한은 선명하게 예배의 맥락으로 그리는 것은 짐승을 이긴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서 믿음의 찬양을 올려 드리는 모습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이다.
    
이와 같은 찬양의 원인은 순교 당한 성도들의 복수를 위한 탄원(5:8; 6:9~11; 8:3~5)이 대접 심판으로 이어지는 응답이기 때문이며, 8절을 통해 밝히듯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표현(사 6장; 겔 10장)이며, 하나님의 이와 같은 현존하심이 진노를 표현할 때는 무시무시해서 어떤 존재도 서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중보기도 시간은 이제부터 의미 없고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나는?
-일곱 인(6~7장)과 일곱 나팔(8~14장) 재앙에 이어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15~16장)을 예고한다. 한시적이나 국지적인 재앙이 아닌 전 우주적인 최후의 재앙이다. 세상을 향한 진노가 끝나고, 구속의 계획도 완성될 것이다. 악의 도성인 바벨론은 멸망하고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은 기어코 완성될 것이다(17~21장).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심판도 없지만, 더 이상 회개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 바닷가에 서서 바로와 그 군대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출 15장), 짐승(정치적 압제)과 그 우상(종교적 압력)과 그 이름의 수(경제적 압박)를 이기고 심판에서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구속받은 성도들의 구원과 승리의 찬양이다.
    
-악의 세력들이 득세하여 하나님 백성의 찬양을 가로막으나 그분의 완전한 통치와 구속을 찬양할 날, 성도들의 서툰 찬양을 온전케 하실 날은 반드시 임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주, 만국의 왕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을 보내셔서 악의 세력을 궤멸하실 것이다. 사탄의 위세와 세상 권력이 아무리 크고 강하여 주의 백성들을 위협한다 한들 하늘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통치자임을 기억하고 확인할 때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하고 찬양할 수 있다.
    
-하늘 성전에서 나온 일곱 천사가 받은 일곱 대접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찬 것은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5:8; 16:6). 그들의 신원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늘 성전에 가득한 연기로 보여주신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결연한 심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악인들을 향한 최후의 심판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피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려울 것이다.
    
-최종적인 대접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재앙이라면, 크고 무시무시한 재앙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재앙인 이유는 마지막 재앙이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드라마가 드디어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불 섞인 유리 바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삼중 위협과 고통을 극복하고 선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정절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상황에서, 끌까지 짐승의 위협과 핍박, 경제적 불이익을 견뎌내었기에 위대한 승리자들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모세의 노래, 즉 어린 양의 노래’다. 이것은 오직 자신들의 승리가 어린양의 공로로 인하여 주어진 것임을 감사 찬송하고 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만유의 주재로 세상과 교회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신실함이 이와 같은 실패와 시험에서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주의 말씀이 신앙의 여정 속 액세서리가 되지 않도록 성실하게 배우고 따르며 믿고 살아내는 이에게 우리 바닷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를 부르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크고 놀라운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핍박 속에서 유혹을 이긴 성도들은 그 심판을 피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나의 걸음도 이와 같으리라.
    
    
    
*주님,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찬 것이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을 보며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돌보아 주시는 소망과 절박한 현실에 대한 인내가 생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유리 바닷가에 서서 부를 모래의 노래를 상상하며 인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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