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일곱 대접 재앙 _ 여섯째 대접~일곱째 대접 [계 16:12-21]
 – 2025년 07월 25일
– 2025년 07월 25일 –
계 16:12-21 일곱 대접 재앙 _ 여섯째 대접~일곱째 대접
    
여섯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진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마련되는 동시에 더러운 영 셋이 가짜 삼위일체(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 더러운 영들은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아 하늘의 군대와 전쟁을 준비한다(19:19).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며 다 되었다는 소리가 보좌로부터 나오고 바벨론 멸망(17~18장)이 눈앞에 있음을 예고한다. 여섯째와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며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완결된다.
    
    
    
1. 여섯째 대접 재앙(12~16절)
큰 강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된다. 여섯째 대접 심판은 이만만의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불신자 3분의 1을 죽인(9:13~21) 여섯째 나팔 심판의 확장이다. 출애굽에서 홍해가 마르는 것은 구원의 신호였으나, 본문은 유브라데 강이 마르면서 멸망의 신호를 보인다. 출애굽 서사에서 바닷물이나 강물이 마르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 혹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자연이 반응하는 것임을 구약 곳곳에서 드러낸다(출 14:21~22; 수 3:14~17; 사 50:2; 호 13:15; 나훔 1:4). 여기에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17~21절) 하나님의 임재가 번개, 천둥, 지진을 동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순간 요한은 “또 내가 보매”라고 언급하며 여섯째 대접이 쏟아져 이루어질 결과를 다른 환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파르티아 왕들뿐 아니라 “온 천하 왕들”이 모여 마지막 전쟁을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내용이다. 가짜 삼위일체인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귀신의 영)이 이적을 행하며 마지막에 일어날 하나님과의 전쟁을 위하여 온 세계의 왕들을 불러 모은다. 요한은 그날을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라고 묘사한다. “큰 날”은 구약에서는 “주님의 날”을 가리킨다. 사탄은 로마 제국 황제와 거짓 선지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귀신들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큰 날에 있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이게 한다.
    
그곳이 “아마겟돈”이다. 요한은 이 지명이 “히브리어”임을 밝힌다. “하르(산)”와 “므깃도(이스라엘 북부의 평원)”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므깃도 언덕(산)”쯤 된다. 구약에서 이 지역은 여러 번 결정적인 전투와 대량 살육이 일어났던 격전지였다. 갈멜산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 지역을 지칭할까? 추측하기로는 엘리야 시대를 되돌아보라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 엘리야와 맞붙기 위해 모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다 모였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증명해야 했다. 결국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바알은 잠을 잤다. 그 결과 거짓 선지자들은 도륙을 당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서려 있는 지명이 붙은 아마겟돈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한 세력을 다 불러 모으신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더러운 개구리 영이 속이는 활동을 하도록 풀어주신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제국의 체제에 부역하고 결속한 나라들을 한번에 심판하기 위함이다. 즉, 아마겟돈은 우상 숭배자들의 심판을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다.
    
요한은 아마겟돈이 가진 이러한 의미를 담아 상징적으로 이 지명을 사용한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왕들이 패배했듯이(삿 5:19~21), 거짓 선지자들이 멸망했듯이(왕상 18:4), 새 예루살렘을 대항하는 모든 열방이 멸망을 한 곳이자, 모든 새 이스라엘이 통곡하며 회개하는 곳(슥 12:9~12)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마겟돈 전쟁을 경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함께 언급된 도둑의 비유는(15절)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또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밤중에 잠을 잘 때 벌거벗고 자는데, 깨어있지 않으면(언제든지 대비하고 있지 않으면) 벌거벗고 허둥대는 모습으로 수치를 당할 수 있음을 일깨우며, 아마겟돈 전쟁을 대비하라는 의미다.
    
    
    
2. 일곱째 대접 재앙(17~21절)
이제 제국의 체제는 바벨론과 그 동맹군이 한자리에 모여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왜 멸망하는가? 바벨론이 한 일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열방에서 진노를 드러내며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바벨론의 정치와 경제체제에 합류하거나 협력하지 않은 자들에게 분노하여 공격하였다. 부역하는 자들에게는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다.
    
일곱째 대접이 공중에 쏟아질 때 성전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나와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되었다(게고넨)”는 일곱 시리즈(인, 나팔, 대접)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완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정한 마지막은 새 창조 때 올 것인데, 그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이루었다(게고난)”라고 선언(21:6)하실 것이다.
    
“되었다”라고 선언할 때 “번개가 치고 음성들이 나고,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다(18절).” 즉 하나님의 현현이 나타났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큰 성 바벨론”의 교만한 불의를 기억하시고 심판을 내리신다(19~20절). 바벨론은 세 갈래로 나뉘고, 다른 민족의 도시들도 무너져 내린다. 바벨론과 모든 도시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피할 곳, 숨을 곳이 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20:1~22:6에서 다시 이어진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잔(19절)을 받고 모든 섬과 산들이 자취를 감춘다고 선언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내려오실 때 피조물이 두려움에 떨고 숨을 것을 표현한다. 어마어마한(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떨어지지만, 사람들은 다시 한번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이것으로 일곱 대접 심판은 끝난다.
    
요한은 왜 대접 재앙의 마지막을 큰 지진과 우박 재앙으로 묘사하였을까? 이는 출애굽 사건에서 재앙 시리즈가 갖는 의미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본문의 경우 여리고 함락의 모습을 마지막 심판의 결정적인 핵심 모델로 선택했다. 여리고 함락은 아모리 족속에게 내린 큰 우박으로 마무리된다(수 10:11). 짐승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들은 재앙이 크면 클수록 회개하지 않고 신성 모독하는 행위를 지속한다. 더 이상 회개의 여지가 없다.
    
일곱 대접 재앙은 17~20장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발생하는 일들을 기술하고 있지 않다. 17~20장은 일곱 대접에서 그리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환상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악의 중심부인 ‘짐승의 보좌(13:2)’를 겨냥하여 심판하신다. 이 재앙으로 온 나라가 캄캄해지고 백성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흑암 속의 공포와 고통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와 회개로 이어지진 않았다. 끝내 돌이키지 않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제 최후의 심판뿐이다.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지 말고, 고질적인 죄와 고집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매를 드시는 하나님께 용기를 내 돌아가야 한다.
    
-주님이 도적같이 홀연히 오실 그날에, 깨어있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거절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를 향한 신앙의 정절과 어린양의 신부로서 존귀한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자들이다.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로서 영적인 무방비 상태가 아니라 늘 깨어 근신하며 살아내야 할 것이다.
    
-유브라데 강물을 말림으로써 큰 전쟁이 일어나게 하신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더러운 영을 보내, 온 천하의 왕들을 꾀어 세력을 규합하고, 격전지인 아마겟돈에 집결하여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하나님과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이것은 악의 권세와 역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무대였다. 이 전쟁은 주의 재림으로 종결되고,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던 자리는 그들의 무덤이 된다.
    
-교만하고도 건재할 수 없고, 악을 행하고도 살아남을 수 없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미혹하는 사탄의 음성에 귀를 막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통치 영역인 “공중”에 쏟으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끝난다(되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큰 지진”과 “큰 우박”으로 “큰 성” 바벨론을 완전히 파괴하실 것이다. 음행의 포도주를 열국에 마시게 하던 그들의 죄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진노의 포도주로 철저히 응보를 하셨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항복하고 돌아오게 될 때, 받아주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그분의 계획을 가로막으려는 전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으로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전쟁의 큰 날에 주님의 인류를 향한 계획이 완성되고, 원수들은 모두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는 어떤 자세로 살아내야 하는가? 15절의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 되다고 하신 말씀 따라 살아내야 한다.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쩌면 이리 똑같은가? 하나님을 향한 비방(11, 21절)과 회개하지 않음(11절)이다. 종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대적하는 때가 종말이다. 개인과 국가와 체제에서 이를 실행하며 노골적으로 반성경적인 가치를 정당화하는 때가 하나님의 진노 포도주가 쏟아질 때가 가까울 때이다. 지금이 아니고 어느 때일까?
    
*더구나 ‘귀신의 영’은 겉으로는 힘을 합하고 세를 규합시켜 제국의 힘을 과시하게 한다. 여러 이적(기적)은 덤이다. 그러니 분별하지 못하는 인생들은 영락없이 휩쓸리기 마련이다. 세력과 이적을 빙자한 여러 반 성경적인 가치들의 보편화가 이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노골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 영락없이 종말이다!
    
*한 가지 확실하다. 아무리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의 돌이킴(회개)이 이리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일방적으로 거부한다. 일방적인 큰 사랑의 가치를 모른 채 지금 섬기는 우상의 현실적인 사랑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아…. 어찌 살 것인가…?
    
    
    
*주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지금, 더욱 주의 말씀의 도를 따라 말씀의 옷을 벗지 않고 홀연히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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