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순식간에 무너질 바벨론, 그곳에서 나오라! [계 18:1-8]
 – 2025년 07월 27일
– 2025년 07월 27일 –
계 18:1-8 순식간에 무너질 바벨론, 그곳에서 나오라!
    
17장은 바벨론을 소개하고 그 멸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서술했다. 18장은 17:16의 언급에 대한 확장판이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근본 이유를 밝힌다. 바벨론은 더럽고 가증한 곳으로, 정치와 경제의 세계적 영향력으로 만국을 무너지게 한 장본인이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단호하다. 심판은 임박했다. 하늘에서는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도망가라!”
    
18장은 1세기 당시 유대와 로마 작가들을 통틀어서 로마제국의 경제 체제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이다. 문학적 배경은 구약의 두로 멸망에 대한 예언들이다(렘 50~51장; 사 23장). 특히 에스겔 26~28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두로는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며 즐기는 음녀와 같다. 두로는 토지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페니키아 문화의 중심도시다. 요한은 로마를 바벨론과 두로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로 본다. 두로와 로마가 동일한 바알 경제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는 약자를 착취하고, 이익을 뽑아내는 제국적인 경제 권세다. 로마는 역사에 나타난 악한 제국적 권력의 절정이자 총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1. 바벨론 멸망의 선포와 이유(1~3절)
1~3절은 하늘 법정에 바벨론을 세우는 일종의 기소장과 같다. 바벨론은 화려하고 권세가 있다. 실제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요한은 하늘의 포고령을 전달하는 천사를 더 권위 있게 묘사한다. 1절은 에스겔 43:2를 연상하게 되는데, 새 성전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환상(겔 40~48장)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21:23에서도 똑같은 본문을 인용한다. 이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곳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곳까지 한눈에 보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건설되기 위해서는 음녀 바벨론이 길을 비켜줘야 한다. 바벨론은 이미 17장에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먼저 어린양과 그의 신실한 증인들이 바벨론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짐승을 이겼다(17:14; 14:1~3). 바벨론은 짐승과 동맹국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망하는 길로 간다. 이제 하늘 보좌가 움직일 시간이다.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힘찬 음성으로 바벨론에 관한 기소장을 포고한다.
    
요한은 본문에서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대해 해석해 준 천사와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1절). 이 천사는 ‘큰 권세’를 가졌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지는 현상이 있었다. 이런 묘사는 천사가 전할 내용이 빛인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는 중대한 계시임을 보여준다. 천사는 “힘찬 음성”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고대의 장송곡 형식으로 외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2절)”로 시작된 천사의 외침은 바벨론이 멸망한 후의 모습을 이사야 13:19~22과 예레미야 50:39, 51:37의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요한이 묘사한 바벨론(로마)의 멸망 후의 모습은 ‘들짐승과 온갖 더럽고 가증한 새들(시체를 먹고 살기 때문)이 모여들고, 귀신과 각종 더러운 영의 소굴이다. 역사적으로 고대 바벨론 제국이 그들의 죄악 때문에 멸망한 것처럼 로마도 그들이 범한 영적인 범죄로 멸망할 것이다. 나라와 열방들이 바벨론의 길, 로마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들의 말로는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로마의 경우 요한의 시대에 백만 명에 달한 인구를 자랑했던 로마시는 6세기경에 이르러 침략, 기근, 전염병 등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3만 명 정도만 남은 황폐한 곳이 되고 말았다.
    
3절은 바벨론이 이렇게 무너진 이유를 설명한다. 바벨론은 자기뿐 아니라 만국(모든 민족)과 땅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을 끌어들여 “음행”하게 했다. “음행(포르네이아)”은 3절에서 두 번 언급하는데, 우상숭배로 인한 영적인 범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범했을 때 그 죄를 “음행”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바벨론의 음행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사치와 치부”로 연결되어 경제적인 범죄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묘사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벗어난 모든 신실하지 못한 관계다. 성적인 범죄가 아닌, 영적 간음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영적인 간음은 경제적인 문제와 엉켜 있었다. 우상숭배와 물질주의가 서로 연합하고 있었다. 이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경배하는 것, 특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탐욕 때문이며, 이 탐욕이 착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우상숭배와 사회정의를 함께 연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했었다. 우상숭배는 착취 강요를 동반한다. 요한은 땅의 상인들이 바벨론의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했다고 언급하는데, “사치의 세력”을 의역하면 “지나친 사치, 부끄러움 없는 사치”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두로, 로마와 그들의 길을 따라가는 모든 도시와 제국들이 물질주의에 함몰되고 사치와 착취에 취해 하나님의 진노 포도주를 마시고 심판을 받았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런 길을 따라야 하겠는가!
    
    
    
2.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4~6절)
짐승의 지배가 극에 달하여 음녀 바벨론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당시 로마 부유층의 삶이었다. “내 백성”은 언약 용어다.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요한은 단호하게 경고를 보낸다. 좋든 싫든 바벨론의 풍조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내는 경고다. 바벨론의 체제 안에서 타협하든, 순응하든, 침묵하고 중립을 지키든, 제국의 체제에 부역하는 자가 되든 그 영향력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한은 분명하게 외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그 수중에서 탈출하라! 다른 가치관에 기초하여 일상에 대한 시각이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가치라는 분명한 시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바벨론이 다스리는 나라에서의 유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경고를 이미 선포했었다(렘 51:45; 사 52:11).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6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새번역).”라고 강권했다.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어느 곳이든 성도는 탈출해야 한다. 이것은 지리적인 탈출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벨론의 가치와 생활 방식과 단호하게 결별하라”는 경고다. 핍박과 순교까지 각오하며 타협하거나 동화하지 말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바벨론의 사악한 뜻에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바벨론의 사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야 한다. 경제적 안전보장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유혹을 뿌리칠 대가가 너무 크다. 또 로마제국의 영향력은 너무 막강하다. 로마의 권세와 음행의 포도주인 로마 황제 숭배 요구를 열방은 뿌리칠 수 없다. 거역하면 로마의 분노를 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응하게 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게 만든다. 한 번 마시면 중독되어 바벨론의 파괴적인 영향력에 저항하려는 모든 욕구들을 제거해 버린다. 중독되면 맹목적인 탐닉을 하게 되고, 감각과 분별력이 마비된다.
    
로마제국의 죄는 열방을 정치적 안전보장과 경제적 풍요를 미끼로 황제 숭배의 길로 가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호 관계는 상인들의 배만 부르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 제공하는 평화(Pax Romana)다. 이것에 속으면 안 된다. 로마에 부속된 나라의 백성은 엄청난 세금과 부역을 제공했다. 이에 비해 로마가 제공하는 혜택은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돌아갔다. 대부분의 하층민은 노동 착취와 세금 수탈로 신음하고 있는 평화가 로마의 평화다. 로마는 자신의 경제적 자원을 신뢰하라고 열방에 강요한다. 바벨론식 교만의 표현이고 우상숭배의 형식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정죄와 심판뿐이다.
    
6~7a절은 로마제국의 행한 그대로 갚아 주라고 명령한다. ‘섞은 잔도 갑절로’ 갚아 주라고 한다. “갑절로(디플로오)”는 갑절의 의미도 있지만, “복사하다, 똑같은”이라는 의미도 있기에 저지른 죄만큼 돌려주라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이사에게 세금 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에서도 나타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가르치셨는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정교분리의 근거로 인용되지만, 당시 시대에는 정교분리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 가르침은 마카비 시대의 슬로건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드려라!, 가이사가 무엇을 해주었는가? 그대로 갚아주라!”는 메시지였는데, 로마가 유대에 은택을 베풀었다면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압제와 고통을 안겨주었으면 그대로 갚아 주라는 혁명적인 메시지였다.
    
7절 상반절에서 그 의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라고 선언한다. 로마가 영광 사치를 누리기 위해 착취했던 만큼 자신들에게 “고통과 애통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나누어야 할 물건들을 독식한 만큼 그들에게 고통이 돌아갈 것이다. 바벨론이 저지른 범죄는 어마어마하므로 되돌려 받을 처벌도 그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3. 바벨론은 하루 만에 무너진다(7b~8절).
그러나 바벨론은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권력과 부, 17:3~4), 과부가 아니기에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고대의 시인들은 로마를 여왕과 여주인으로 표현하며 그 통치가 영원할 것이라고 찬양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이사야가 바벨론에게 경고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방탕한 여인아, 이제 너는 이 말을 들어 보아라. 네가 평안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나는 과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자식을 잃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였지만, (사 47:8, 새번역)” 그리고 에스겔도 이에 동참한다.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 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겔 28:2, 새번역).”
    
이러한 교만한 표현은 그들이 당할 세 가지 재앙(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에 대조되며 6장의 네 말을 타고 오는 자가 가져올 재앙들을 반향 한다. 또한 17:16에서 말했던 것처럼 열 뿔(왕)과 짐승에 의해 처벌이 주어진다. 바벨론은 불에 탈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하루” 동안에 일어날 것인데(사 47:9), 하나님의 심판이 순식간에 이 도성에 닥칠 것을 가리킨다.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50:34의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에서 온 것이다. 바벨론과 그 길을 간 로마와 같은 제국들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이며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시는” 분은 아니다(출 34:6~7).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음행(우상숭배와 엉겨 붙은 물질주의와 착취)을 향해 무섭게 몰아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서 빨리 나와야 한다. 바벨론의 정치적 경제적 안전보장이 갑자기 사라지면, 교만한 자부심은 근거가 없고 미혹임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안전하다고 자부하고 안주하던 바벨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 당한 역사적 사실이 요한이 본 환상을 깊게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그날 밤에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 다리우스의 나이는 예순두 살이었다(새번역, 단 5:30~31).”
    
    
    
나는?
-바벨론은 무너지고 말 크고 화려한 제국이다. 하늘의 천사가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한다. 바벨론의 겉모습은 영화로웠으나 속은 귀신과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더럽고 가증한 곳이다. 여왕 행세를 하며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지만, 실상 음란한 매춘부에 불과하다. 음행의 포도주로 만국을 유혹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 빠뜨렸으며, 땅의 상인들도 과도한 사치와 부당한 축재로 몰락의 길을 가게 했다.
    
-크고 화려했던 큰 성 바벨론이 산신이 파괴되어 폐허가 된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광의 성은 귀신과 더러운 영과 가증한 새들의 음산한 소굴로 전락한다. 열국 앞에서 여왕 행세하며 찬란한 미래를 자신하고 장담했지만, 한순간(하루 동안) 무너질 것이다. 현재의 위세와 위력이 강하고 대단해 보인들 바벨론은 “무너질 성”이고, 이미 “무너진 성”이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가 의지하고 기대만큼 안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한순간에 사라질 것에 내 안전과 미래를 걸어두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면 안 된다.
    
-누군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리고, 한편에서는 극심한 빈궁에 시달리는 불의를 조장하는 세계는 영원할 수 없다. 억압적 정치와 이를 축복하는 종교, 탐욕스러운 자본의 삼위일체는 공멸을 부추기는 공동체일 뿐이다. 한순간에 사라질 것에 의지하지 말라.
    
-바벨론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음행의 배후였고 교만의 원흉이었다. 만국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였고, 땅의 왕들을 탐욕의 길로 이끌었으며, 부당한 축재와 과도한 사치를 조장했다. 이들 통해 땅의 상인들을 자만과 허영의 덫에 빠지게 했다. 오늘날 물질(돈)이 위세를 떨치는 바벨론의 문화 속에 살면서 자족하는 법을 잊은 채, 자주 남과 비교하고, 이미 가진 것도 누리지 못하면서 없는 것만 탐하고 있지 않는가?
    
-짐승의 지배권이 극에 달하고 음녀 바벨론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소비문화가 정점을 찍는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멸망의 도성에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들이 받을 재앙에서 어서 피하라”고 호소하신다. 음녀가 주는 포도주에 취해 바벨론이 추구하는 가치에 편승한다면 재앙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다. 타협과 순응, 침묵과 위선적 중립으로 제국의 악에 부역한다면 화를 당할 것이다. 무지와 외면을 핑계할 수 없다.
    
-세상의 가치와 생활 방식과 결별하고 하나님 나라 비전으로 살지 않으면 함께 멸망한다. 중독되면 저항 의지마저 상실한다. 두렵지 않은가! 주의 뜻이 분명한데도 거짓 안전이나 근거 없는 확신으로 죄를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벨론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 그들의 불의는 무서운 진노를 촉발할 만큼 가득 찼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아 주라 명령하신다. 그들이 누린 사치와 영화만큼 고통과 애통으로 되돌려주라 하신다. 음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하나, 그 오만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다. 사망과 애통과 흉년으로 치시고, 마침내 그 성을 불살라 버리실 것이다. 이로써 심판하시는 주가 두렵고 무서우며 강한 분임을 천하에 드러내신다.
    
-바벨론의 거짓 위상에 현혹되지 말라. 철옹성 같은 위세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장고한 세월 견고하게 구축한 정치, 경제 체제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잠깐의 부귀영화로 의기양양했지만, 결국 영원한 고통과 파멸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바벨론의 위용이 얼마나 허상인지, 반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주님, 오! 주님, 한순간에 무너질 세상 가치에 제 삶이 지탱되지 않도록 도우소서. 영원한 반석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라 전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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