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벨론의 멸망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8:20-19:10]
 – 2025년 07월 29일
– 2025년 07월 29일 –
계 18:20-19:10 바벨론의 멸망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
    
바벨론(로마) 멸망에 대한 세 그룹의 장송곡이 끝나고 하늘에서 또 한 소리가 하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즐거워하라고 외친다. 바벨론의 멸망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하늘에서 할렐루야가 세 번 울려 퍼지며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드려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이는 어린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는 의미다.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인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신부가 단장을 끝냈다.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1. 바벨론 심판에 대하여(18장 20~24절)
하늘에서 갑자기 “즐거워하라”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1~19절의 장송곡과 반대로 기쁨의 찬양을 부를 것을 외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애가가 장송곡이 아니라 축가를 불러야 한다. “하늘과 성도들(모든 믿는 자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 모두를 부른다. 이들은 어린양을 따르며 짐승과 바벨론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에베소서 2:20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다. 하늘에 이어 등장하는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성도에 속한 사람들이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따로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를 위해 받은 박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악 가운데 특히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박해한 것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내리신 것이다. 선명한 6:10의 성취다.
    
“힘센 천사”는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며 바벨론이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바벨론의 심판은 되돌릴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어 천사는 로마가 받을 심판을 일상생활의 예로 해석해 준다. 로마가 별생각 없이 즐겼던 모든 것들(음악과 음악가들, 직장인들과 그들의 일, 빛, 혼인식에서 나는 소리)이 없어져 죽은 도시가 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심판받는 이유는 첫째, 바벨론의 상인들이 자기들의 권세를 휘둘러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하고, 압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두로의 상인들처럼 ‘빛나는 왕관을 쓰고’ 군림하던 ‘귀족들’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 받으며 로마의 경제 체제에서 혜택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다(사 23:8; 겔 28:5, 9). 둘째, 만국을 속임수로 유혹하여 우상 숭배적이며 불의한 경제 체제에 참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벨론에서 성도들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며, 땅에 살던 다른 사람들도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으나(17:4), 큰 음녀가 붉은빛이 났던 이유는 무구한 자들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기 때문이다. 폭력과 죽음으로 통치했던 바벨론/로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맷돌이 바다에 가라앉듯이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일곱째 대접 심판(16:19)이 마무리된다.
    
    
    
2. 바벨론의 심판을 찬양하다(19장 1~8절)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다. 18:20에서 “성도들아, 즐거워하라”는 권면에 대한 하늘 성도들의 응답이다. 1~6절의 사중적인 할렐루야는 할렐 시편(시 113편~118편)들을 인용한다. 이 단락도 출애굽 사건들을 반영한다.
    
성도들은 무엇을 찬양하는가? 첫째, 의로운 심판을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탈리오 원칙”은 신적 정의의 원리다. 하나님 백성의 피로 땅을 황폐하게 한 자는 황폐해진다. 둘째, 바벨론 멸망으로 인해 찬양한다. 연기가 올라가는 장면은 바벨론의 멸망을 상징한다(14:11).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더불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표현한다(8:4). 셋째, 아멘 할렐루야는 신적 비준을 의미한다. 지금은 찬양할 때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들이 찬양할 때다.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넷째, ‘주가 통치하신다.’ 구약에서 대적의 심판은 하나님 왕권 확립의 신호다. 이사야는 ‘주가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 나라(사 40:9; 52:7; 61:10)를 복음으로 선포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 이미지로 표현하셨다.
    
이제 어린양의 혼인 잔치 준비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는 마지막 절차다. 잔치는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자리다. 이 자리에 어린양의 신부(성도)는 스스로 혼인 예복을 준비해 왔다. 음녀 바벨론에 저항하며 신실한 증언을 하였다. 그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데, 이는 성도의 “옳은 행실(디카이오마타)”을 가리킨다. 성도들의 삶에서 드러난 거룩함과 의로움이 그들의 신부 의상이 된다는 놀라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이 행실들은 성도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의복은 “허락하셨다(에도)”. 성도들은 그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만들었다(7:14). 이 신부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들의 의로운 행위는 어린양의 희생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문맥상 어색한 부분이 있다. 7절에서는 신부가 옷을 준비해 왔다고 기록하고, 8절에서는 신부의 옷이 주어진다고 표현한다. 모순일까? 그렇지 않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구원은 “주어지는” 수동성과 우리가 “이루어가는” 능동성의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주어지다(에도데)”라는 단어를 “허락하다, 승인하다”로 번역했다. 즉, 어린양이 준비한 옷을 입도록 허락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겠다. 신부가 허락받아 입게 되는 옷은 제사장의 옷이다. 이는 음녀 바벨론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복장과 대조된다(18:16).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을 입은 것이다.
    
    
    
3.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자가 복이 있다(19장 9~10절).
천사가 이렇게 선언한다. 가장 본질적이고 은혜로운 복이 아닌가! 일곱 우레 심판을 기록하지 말라던 천사는 이 축복 선언을 기록하라고 한다. 그런데 요한이 그 천사를 숭배하려고 한다. (18~19장에서는 바벨론 멸망을 두고 서로 다른 음성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들리기에 요한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천사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면서 자기도 동료들 가운데 하나라고 밝힌다. 그리고 천사는 참된 영이 하는 예언은 예수를 증거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한편, 바벨론에게 임하는 심판을 바라보면서 현재 제국적 체제에 부역해 왔던 독자들은 선택을 요구받는다. 당시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이세벨과 발람의 목소리가 권력자와 경제적 강자들을 통해 강력하게 전달되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계시록의 마지막까지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울려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목소리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다.
    
하나님의 통치는 바벨론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애통함이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쁨과 구원이 된다.
    
    
    
나는?
-맷돌 같은 돌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으로 바벨론의 영원한 멸망을 선언했다. 그 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와 볼 수 없는 광경에 대하여 열거한다. 큰 성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영원한 가치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우며 살아야 할 것을 깨우친다. 영원한 반석인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멸망한 바벨론 성안에서는 다시는 결혼식이 거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완성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린양의 신부로 그분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이 결혼 잔치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공로 때문이다. 주님이 성도를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맞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부인 우리는 세마포 옷을 더럽히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신랑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부가 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교회는 더욱 깨어 기도하고 세상에 굴하거나 물들지 말고 서로의 약함을 용납하는 사랑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힘을 얻고 낙심하거나 타협한 성도들이 돌아올 것이다.
    
-복술로 만국을 미혹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며 스스로 높아졌던 바벨론은 바다에 떨어져 사라진 맷돌처럼 철저하게 몰락한다. 죄와 향락에 취해 살던 도성에 노래와 희락이 사라지고 부와 사치의 상징이던 바벨론은 생의 모든 기반을 잃은 채 황량한 폐허가 될 것이다.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영원한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던 악인들의 번영은 잠시뿐이다.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악인의 길을 부러워하거나 따르지 말라. 심판의 날은 내가 의지하고 내게 만족을 주던 모든 것이 헛되고 허망했음을 드러낼 것이다.
    
-바벨론의 심판을 기뻐하라는 요청(18:20)에 성도들이 승리의 찬가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고 성도들을 피 흘리게 한 바벨론을 멸하시고 그들의 피를 신원하시는 하나님이 구원하는 능력과 통치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무리 절망적인 역사 속에서도 악에 위축되지 않고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궁극적인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악을 과대평가하고 하나님을 과소평가할 때 찬양도 순종도 할 수 없다. 악의 실체를 직시하고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헛된 두려움은 사라지고 담대할 수 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교회(신부)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단장한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상에 굴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신부를 위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준비해 주신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다. 시작도 과정도 결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이끄신다.
    
-천사는 요한의 경배를 거절하며 자신도 대언하는 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주께 돌아가야 할 경배와 영광이 주님께만 드려지도록 했다. 기억해야 한다. 자기 우상화, 자기 절대화의 유혹은 복음 증거자들을 넘어뜨리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 초대장이다.
 
*본문에서 “할렐루야”를 외친다. 요한계시록에서 유일하게 이 장면에서 등장한다. 바벨론의 철저한 심판을 바라보며(19장 1~2절), 그 심판이 영원함을 확인하며(19장 3절),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19장 6~7절) 울려 퍼진다. 신앙 성향에 따라 인사말로 주고받는 “할렐루야”가 계시록에서는 철저하게 절제되며 사용된 것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여전히 바벨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견뎌낸 성도들이 모든 심판이 마무리되고 어린양 혼인잔치에 이르러서야 목놓아 외친 것이다.
 
*”할렐루야”의 무게와 가치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마침내 그 날에 이르러 나의 입술에서 목놓아 할렐루야를 외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은 거룩한 은혜를 부어주신 뜻을 따라 세상과 구별되며 거룩하고 진실하게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바벨론과 같은 세상 가치, 방식의 유혹에 담대하게 맞서며 용기 있게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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