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에덴의 영광과 임마누엘의 교제 회복 [계 21:22-22:5]
 – 2025년 08월 03일
– 2025년 08월 03일 –
계 21:22-22:5 에덴의 영광과 임마누엘의 교제 회복
    
천사가 보여 주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다. 새 예루살렘은 21:9에 의하면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다. 즉 장소,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공간적으로 묘사했다. 성 내부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놀랍게도 성전도 없고, 해나 달도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계속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밤이 없어서 문을 닫을 필요도 없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분명히 구별된다. 성 내부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다. 하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진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교제가 온전히 회복된다. 이와 같은 묘사는 새 예루살렘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영광)가 가득한 것을 표현하고, 이는 마치 세 에덴동산과 다름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에덴에서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것들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범위가 아니라 전 우주적인 새 창조다.
    
    
    
1. 새 예루살렘의 특징(21장 22~27절)
일단 성안에 건물이 없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의 1차 독자들은 주후 70년에 성전 멸망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성전 재건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러니 요한이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고 전할 때 놀랐을 것이다. 왜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새 예루살렘이 문자 그대로 어떤 건물이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교회)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이 없다기보다는 성전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다. 새 예루살렘 자체가 다 성전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공간 개념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성전이 되신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성전은 없지만,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와 영광이 새 예루살렘에 가득 차 전체가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된다. 결국 그리스도가 성전이기에 지상에서 보는 건물의 성전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상이 오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 성전으로 대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이 성전이 없다고 소개한 것은 당시 유대 사회의 성전 건축 열망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임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적인 장소와 거룩한 장소의 분리가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분리되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어린양의 희생은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이기에 더 이상 성전 제사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어린양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런 의미에서 성전이 된 것이다.
    
23~24절에서 이 성에서는 더 이상 해와 달이 필요 없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등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 더 이상 다른 빛이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24절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라고 한다. 이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정도로 새 예루살렘의 빛이 크고 찬란할 것임을 말한다. 이 표현의 강조점은 빛이 아니라 단지 유대 민족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열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게 되리라는 것이다.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표현도 그들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경배할 것임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짐승의 세력을 따랐던 땅의 왕들에게도 구원의 길 허락하시기를 마지막까지 원하심을 알 수 있다.
    
25절의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라는 표현에는 성문이 열려 있어 아무나 자유롭게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다는 것과 더 이상 죄와 그 죄의 영향력이 없다는 의미도 내재 되어 있다. 문이 항상 열려 있기에 만국이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그러나 27절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의 속성과 특징을 소개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끝까지 어린양의 길을 따르는 자들만 새 예루살렘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새로운 에덴으로서 새 예루살렘(22장 1~5절)
21:22~27을 통해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이자 지성소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에덴” 은유로 묘사된다. 이전에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예루살렘을 묘사했다면, 이 단락은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의 특징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의 회복을 그리고 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른다고 묘사한다. 생명수 강은 생명을 공급해 주는 큰 역사를 상징한다. 에덴동산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새 예루살렘은 풍성한 하늘 생명으로 가득 차고 고동치는 곳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동산이라는 이미지는 2절의 ‘생명나무’로 극대화된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구절은 에스겔 47:12를 인용한다. 여기서 실과나무들을 열두 개의 나무로 한정하고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결실의 지속성과 규칙성을 드러낸다. 에스겔에서는 치료 대상이 이스라엘로 한정되었지만, 요한계시록 안에서는 만국이 치료를 받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전 우주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에덴의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5절에서 그곳은 죄가 없는 곳이기에 다시는 저주가 없고(슥 14:11) 다시는 밤이 없다고 한다. 등불과 햇빛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이다(21:23, 25 반복).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과 어린양이 빛이 되어 비춰서 항상 낮처럼 밝아지고 열 왕이 영광을 가지고 그곳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일이 쉽게 될 것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보다는 누가 역사의 주인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세상의 권력을 잡은 것 같은 제국의 시스템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어린양을 따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충성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악과 환난을 통해 지쳐 쓰러져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격려한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가운데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주실 것이다(21:22~23).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새 예루살렘을 그 임재로 충만히 채우실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하여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며 주 안에서 부름을 받은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함께하시고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이 임마누엘의 약속이 나와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친히 그 등불이 되실 것이다(21:24~26). 그 빛을 통해 만국은 새 예루살렘을 거닐게 되고 땅의 왕들도 자기 영광과 존귀를 지니고 입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방으로 연결된 성문들은 밤낮 없이 열려 있기에 언제든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기회를 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속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고, 그분과 동행함으로 세상을 그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주를 경배하는 자리로 인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된 자들(21:8)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26~27절). 하지만 만국 가운데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그분의 통치와 영광을 찬양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 성의 주역이 될 것이다.
    
-새 창조를 통해 잃어버렸던 에덴의 생명과 영광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신다(22:1~5). 죄로 인한 저주가 떠나가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교제하고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다. 또 잃어버린 통치권(창 1:28)을 되찾아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다시 오실 주님의 기대이다.
    
*주님이 내 인생 가운데 임마누엘로 오신 일은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큰 위험 부담을 초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주님이 내 삶의 중심과 목표가 된다는 것이기에 주님을 향한 세상의 시선과 평가를 고스란히 이어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이 자기 욕망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을 탐하다가 하나님을 외면했다. 그것 때문에 구원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 하나님 말씀에 눈 감고 내 욕망만 자극하는 유혹이 무엇인지 잘 살피고 단호하게 척결하는 일이 우선 아닐까!
    
    
    
*주님, 새 예루살렘의 감격이 믿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내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만으로 충분한 새 예루살렘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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