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내게로 돌아오라 [슥 1:1-6]
 – 2025년 08월 05일
– 2025년 08월 05일 –
슥 1:1-6 내게로 돌아오라
 
본문은 스가랴 전체의 서론적인 역할을 한다. 스가랴에게 첫 번째 말씀이 임한다. 과거 조상들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현재 스가랴의 말씀을 듣는 세대에게 돌이킬 것을 선포한다. 과거 조상들은 이전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심판을 받았다. 스가랴의 메시지를 듣는 백성은 과거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그 전철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옛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다 백성들을 귀환시켰다(대하 36장, 스 1장).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제단을 만들고 성전 공사를 시작했으나(스 3장), 이윽고 이 성전 공사는 그 땅 대적들의 방해에 직면하여 다리오왕 제2년까지 중단된다(스 4장). 에스라서는 이런 배경에서 그들이 성전 건축을 계속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스 5:1).
 
 
 
1. 배경(1절)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의 주제를 공유하는 선지서는 학개와 스가랴다. 학개에게 세 번째 말씀이 임한 다리오왕 2년 일곱째 달 21일(학 2:1~9)과 마지막 네 번째 말씀이 임한 아홉째 달 24일(주전 520년경, 학 2:10~23) 사이, 같은 해 여덟째 달에 “잇도의 아들(손자)이요, 베레가의 아들인선지자 스가랴에게(1절)” 첫 번째 말씀이 임한다.
 
스가랴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시기를 세 번 언급한다(1:1; 1:7; 7:1). 이를 통해 스가랴 전체의 흐름을 가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곧 장면이 바뀌거나 주제의 흐름이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표시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언급을 중심으로 1:1~6과 1:7~6:15과 7:1~8:23로 구분된다. 9장 이후부터는 시간에 대한 언급과는 다른 표시어가 등장한다.
 
당시 다리오가 집권한 초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속국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졌으나 이내 반란을 진압하여 스가랴가 활동할 때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첫 환상(1:7~17)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다’고 한 것은 이런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반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아직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 회개와 회복(2~4절)
2절은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고 표현하여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전달된 메시지임을 추측케 한다. 당시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포로 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가랴 당시(주전 520년경) 이스라엘이 주전 538년 1차 바벨론에서 돌아오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 내외의 어려움으로 중단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국제 정치와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은 더욱 포로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남유다는 왜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됐는가?”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 공동체를 회복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허락했겠는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왜 성전 재건에 대한 방해가 있었는가?, 과연 성전을 재건하는 데 의미가 있는가?’ 등등이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조상들의 문제였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약속과는 달리 성전과 신앙 공동체의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너희”에게 있었다.
 
2~4절의 “너희의 조상들에게”는 과거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점의 이스라엘에게도 이 말씀은 그대로 해당한다. 스가랴는 과거 이스라엘 모습에 빗대어 현재 이스라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단락의  핵심 표현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이다. 이 표현은 스가랴서의 전체 주제를 통제한다.
 
이전 세대가 선지자의 말에 귈르 기울이지 않아 자신들의 악한 행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결국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악한 길과 악한 행위”는 병행을 이루며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를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듣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조상들의 불순종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현 세대 이스라엘 역시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3.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5~6절)
5절에서의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라는 표현은 6절의 “내 말과 내 법도가 영원하며 끝까지 미치는” 것과 대조된다. 이를 통해 조상들이나 심지어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6절은 조상들이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존재들이지만 여호와의 말씀과 법도(율법)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 행한 대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곧 율법에 기록한 대로 조상들에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행하셨다는 표현에서도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심판하신 근거가 그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법도와 말씀이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내산 언약(레 26장)과 모압 언약(신 28장)에서 언약적인 저주와 축복을 선포하여 언약에 충실할 것을 경고하셨다. 이 언약에 따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약속의 땅에ㅏ서 쫓겨나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점령과 정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백성답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출 19:6).
 
그러므로 현재의 이스라엘은 언약의 길을 떠난 조상들을 하나님꼐서 쫓아내시고 포로로 만드신 비극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 땅을 차지한 것이 끝이 아니듯이,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얼마나 듣고 또 들었던 말인가? 그 조상들에게 외치고 또 외쳤던 말인데, 불순종의 결과인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 세대의 이스라엘에게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너희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대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조상들과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 아니겠나!
 
-급기야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오랜 포로생활의 수치를 겪고서도 그들은 ‘악한 행위에서 떠나서 돌아오라’는 명령을 듣고 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 그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시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조상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분의 약속도 영원하고 그분의 경고도 영원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포로기 이후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 주어진 스가랴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개 촉구가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기본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다(마 4:17). 스가랴 시대의 “내게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와 다름 없다. 과거의 실패나 조상의 죄에 매이지 않고 지금 회개하고 결단하여 새로운 출발로 담대하게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임마누엘의 약속을 환기 시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종교적인 행위와 이에 따른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을 열망하신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확고하게 세워가야 할 핵심 정체성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 가기 위해 스가랴는 “조상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조상들이 범했던 똑같은 실수를 후손들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상들의 실패를 거울 삼아 여호와만 의지하는 바른 길을 걸으라고 하신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일관되었다. 하나님은 무수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악한 길과 악한 행실에서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증거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완고하게 듣지 않는다. 단순히 못듣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다. 이런 완악함이 튿정 시대와 세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모든 시대와 세대에 되플이 되어 나타난다.
 
*우리 공동체는 어떨까? 현재의 상황만 바라보고 영적인 통찰과 각성이 생동하고 있을까? 조상들의 죄악과 심판의 역사를 잊지 않고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민감하게 마음을 지키고 있을까? 다음세대가 죄악의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수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변하지 않는 그 진리의 말씀 위에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가!
 
*전 시대를 아우르며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네게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사랑의 외침이 우리의 새대에서 절규가 된다면 소망이 없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상황과 여건을 탓하는 것은 불신앙의 삶의 방식이다. 신앙의 삶의 방식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여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지금 상황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이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인내하는 믿음이 나에게 필요하다.
 
*스가랴는 회개의 중요성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특히 3절은 회개의 핵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관계회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능동적인 반응도 요구하시고 계심을 놓치면 안 된다. 신앙은 결국 “반응”이다. 나의 감정이나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다. 스가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깊이 반응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리라 믿는다.
 
*조상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지혜”다. 기록된 말씀은 죄의 반복을 용인하지 않는다. 스가랴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던 역사를 상기시켰다.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다. 오늘날 하나님의 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닐까? 교회의 과거 실패나 잘못을 교훈 삼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동시에 역사 속에서 죄악 반복되는 죄악이 지금 이곳에서 발현되지 않도록 미혹하지 말것을 요청한다.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되짚어야 할 말씀이다. 그동안 평양 대부흥운동이나 70~80년대 부흥을 모델로 삼고 다시 그때의 한국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그나마 순수한 열망으로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겉으로 회개를 부르짖으며 열망했지만, ‘부르짖음’이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20여년이 지났지만, 되려 한국교회는 외양이나 수준에 있어 심각한 후퇴중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본질”을 간과하고 “향수”에 젖은 감성적인 시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것보다, 전통과 형식, 제도에 부흥을 원했고, 더 나아가 지나친 우경화에 빠진 결과다. 즉, 교회가 스스로를 성찰할 시각과 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간과한 채, 그저 외양만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내게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마음에 반응하여 말씀을 따라 순순히 살아내는 걸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드러나지 않으려 해도 빛된 존재로 소금과 같은 영향력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도 깨닫게 하는 말씀이다. 반복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부르신 것이 그 증거다. 나에게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하게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특히나 오늘날은 세속의 가치 방식에는 민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에는 둔감하기 짝이 없지는 않는가? 진지하게 되돌아 볼 일이다. 
 
 
 
*주님, 그 놀랍고 변함없는 사랑이 교회를 생동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더온누리공동체가 그 사랑안에 거하도록 기록된 말씀의 역사를 늘 기억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내게로 돌아오라는 음성이 여전히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랑안에 거하며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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