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7:1-14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포로 됨의 슬픔을 애곡하는 금식 절기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벧엘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보낸다.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금식이 진정 여호와를 위함이었는지 혹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되묻는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옛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심판이 임했었다고 상기 시키신다.
1.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1~7절).
1~3절에서 이스라엘이 금식 문제를 제기하고, 4~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에 응답하시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금시 문제를 포함하여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셨다. 7절에서 표현되었듯 현재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였다. 이런 태도는 벧엘 사람들이 금식 문제를 제기했을 때 드러났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전달된 율법을 구성하는 두 가지 큰 기둥, 곧 하나님과의 관계 및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에 초점이 있었다.
3절의 “오월” 중의 금식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위한 금식을 가리킨다(왕하 25:8~9). 벧엘 사람들은 성전이 완성되어 가기에 금식 준수가 필요 없다고 지적한다. 5절에서 ‘일곱째 달’의 금식도 포함하는데, 벧엘 사람들은 다섯째 달의 금식만을 언급했으나 하나님의 응답에는 전반적인 금식 문제가 언급된다. 일곱째 달의 금식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시드기야를 끌고 간 후 대신 세웠던 그달리야가 죽은 것을 기리며 금식한 것을 가리킨다(왕하 25:25; 렘 41:1~3).
5절의 ‘칠십 년 동안’은 1:12에서도 같은 칠십 년 기간을 언급한 바 있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고(주전 586년) 현재의 시점인 다리오 왕 제4년(주전 518)까지의 대략적인 기간이다. 금식은 이처럼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며,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시점부터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라는 응답은 언뜻 보기에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벧엘 사람들은 성전이 완성되어가는 시점에서 성전 파괴를 기억하는 금식을 계속해야 하는지 여부를 묻는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 여부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 정말 여호와를 위한 금식이었는지를 물으신다. 이 수사적인 질문은 금식에 관한 논쟁을 다루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문제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즉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 메시지다.
성전 건축 자체가 이스라엘의 목표가 아니다. 성전 건축이 완성된다고 하여 금식과 애통이 없어지고 무조건적으로 샬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전 건축은 이 관계를 위한 것이다. 혹시 성전이 파괴되기 전의 성전 제의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성전으로 남는다면, 그들은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6절의 “너희”에 대한 강조는 여호와 하나님, 곧 “나”를 위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결국 이스라엘이 하는 금식이 여호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7절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상기시킨다. 이에 따른 구체적은 내용은 8~14절로 이어진다. 예루살렘 멸망 전에 선포된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연관시키는 이유는, 벧엘 사람들이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할 때 보인 종교적 형식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 인해 예루살렘이 멸망했음을 망각하고 있었다. 금식의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 곧 언약적인 관계에 대한 성찰 없이 형식적이고 관습에 치우친 금식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부여될 수 없었다.
2.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8~14절).
이스라엘이 금식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시며 응답하신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옛 선지자들을 통해 전한 메시지에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된다.
성전건축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뤄지는 시발점이다. 건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전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중심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종교적이고 형식적인(금식, 성전) 영역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문제(7:6), 즉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출발은 옛 선지자를 통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8~10절은 7절에서 제기한 대로 “옛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이것은 오경의 율법에서도 언급되었다. 9절의 “인애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닮고 행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10절의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라는 표현은 사회적 약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율법에서 자주 다뤄지며, 예언서에서도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할 때 빈번하게 나타난다. 또 ‘마음에 도모하는 행위’는 미리 마음 속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으로 단지 즉흥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악을 범한 것과는 다르다. 이전 선지자들이 종종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지적한 바와 같다(렘 5:26; 6:13).
11~12절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거듭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고한 모습을 지적한다. “등을 돌리며(직역하면 고집스런 어깨를 내밀며)”는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가리킨다(느 9:29). “귀를 막으며”역시 순종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12절의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라는 표현도 신체의 일부를 견고하게 하여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3~14절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셨음을 지적한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서 언약에 순종하지 못할 때 언약적인 저주로 경고한 바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고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다(출 2:23). 여호와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그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셨다(출 34:6). 그러나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사 1:15; 렘 11: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외면했다.
14절은 이스라엘을 추방하여 흩었던 사건을 상기시킨다. “내가 바람으로 불어”는 이미 2:6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이미 예고된 것으로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언약적인 저주를 실행하신다. “땅을 황폐하게” 하는 것 역시 언약적인 저주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강조되었다(레 26:33; 렘 7:34; 겔 12:19; 습 3:6).
이렇게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포로에서 돌아온 당시 이스라엘에게도 계속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벧엘 사람들이 와서 성전 파괴를 기억하는 금식을 포로에서 귀환하여 오나성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계속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스가랴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었던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성전 파괴를 기억하는 금식을 해온 일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는지 묻는다. 성전이 있고 금식이 있다고 해서 이 나라에 샬롬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성전 건축이나 성실한 제의가 아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위하여 종교 생활을 하는 한 그들은 다시 한 번 멸망의 이유를 쌓는 사람들에 그칠 것이다.
-여호와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금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금식은 곡기를 끊음으로써 철저히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만 오롯이 내 안에서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금식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정의로운 재판, 구제, 사회 정의 등을 요구하는 선지자의 말에 귀를 막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채로 아무리 많은 제의를 바치고 금식을 하고 성전을 짖는다 해도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금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기 욕망에 대하여 금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편하게 여겨 외면했기 때문이다.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수치심을 잃어버렸다.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염치를 몰랐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흩어버리신 것이다. 애굽에서 건진 자기 백성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도 듣지 않으셨다. 하지만 포로에서 돌아왔는데도 그때 그 문제가 오늘에도 재현되고 있었다. 답답할 노릇 아닌가! 그런 마음과 태도로 하는 금식이 무슨 소용일까!
*신앙생활이 외적인 형식과 행동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탈이 난다. 여호와께서는 형식을 따라 마음이 없는 형식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내면의 동기와 확고한 신앙의 결단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들이 종교적 의식으로 지켜온 5월 금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고 경건을 과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금식을 계속 하느냐 마느냐를 먼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숙함이 없이 금식과 같은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껍대기뿐인 신앙을 먼저 깨뜨려야 한다. 오늘의 삶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면서 실제는 내 안의 욕망을 채우려는 숨은 동기가 있다면 말씀 앞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기를 갈망한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랄 수 있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누리며 사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 사람들이 금식에 대해 질문한 것은 자신들이 포로 생활 중에 금식이라는 행위를 가나안 땅에서도 지속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행위가 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충분히 교훈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길이 형통한 삶임을 가르쳐 주신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은 삶 속에서 의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맺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 얼마나 의와 평강이 넘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에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면 좋겠다.
*결국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하여 형벌을 받았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응답받지 못한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하시는 묵상 앞에 기꺼이 순종의 멍에를 메고 오늘 하루를 채워 가리라.
*4일의 긴 여정을 오늘 마무리한다.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도 특별하기만한 장모님의 발인은 두고 두고 마음에 새겨질 듯 하다. 어느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을 것”이다. 사랑으로 살다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걸음을 따라 하늘나그네의 삶을 담담히 걸어가리라.
*장례기간 동안 보여주신 더온누리 성도님들의 사랑도 크나 큰 빛으로, 평생 간직하며 기꺼이 감당해야 할 사랑의 빚으로 4일 동안 우리 가족의 마음에 채워주셨다. 사랑하며 살리라 거듭 결심해본다.
*주님, 형식에 함몰되어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를 놓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사역에 치우쳐 주님과의 동행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님,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며 지금 이곳에서 그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