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8:14-23 슬픔 끝 기쁨 시작, 하나님 나라 제사장의 사명따라
여호와께서는 과거 조상들의 죄로 인해 격노하여 악(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으나, 이제는 돌이켜 예루살렘과 유다 집에 선을 행하기로 계획하신다. 백성들도 돌이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 진리와 평화의 일을 행하고 사랑할 것을 명령 받는다. 애통을 기념하던 금식일들은 기쁨의 축제로 변할 것이고, 흩어진 백성과 이방 민족은 여호와를 찾고 은혜를 구하러 예루살렘에 오게 될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14~17절)
회복에 대한 분명한 약속(11~13절) 이후 “손을 견고히 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14~15절을 통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말한 후, 16~17절에서 이에 반응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권고한다. 그 내용은 이미 시내산 언약에서 선포된 십계명에 포함된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덕목들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약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14~15절은 스가랴를 통해 왜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지를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격노하여 ‘재앙’을 내리셨지만, 이제는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기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언약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으나 이제는 뜻을 돌이켜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을 바꾸었기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야 하는가? 이것을 16~17절에서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버렸던 것, 즉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마음과 힘을 다해 순종해야 한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면서까지 말씀을 외면하였다. 또한, 16절의 ‘성문’에서 이루어진 재판이 왜곡되어 공정하고 “화평(샬롬)”을 가져오지 못했다. 17절의 거짓 맹세하는 것은 특히 5장의 환상에서도 죄악으로 지적 되었던 것이다(5:4). ‘마음에 해하기를 도모’한다는 것도 7:10에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맥락에서 이미 지적이 되었었다. 이 모든 것은 언약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들이었다.
2. 금식과 관련된 약속(18~19절)
이 단락은 7:1~7에서 제기되었던 금식(다섯째 달, 일곱째 달 금식)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본문은 단지 벧엘 사람들이 질문했던 금식만이 아닌, 넷째 달과 열째 달을 추가하여 지킨 전반적인 금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7장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내용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금식을 다시 언급한다. 그럼에도 금식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회복의 약속은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말씀과 이어져 예루살렘 회복과 구원의 때가 되면 고통의 금식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전의 금식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가 깊은 금식이었으나, 이제는 여호와의 승리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온전한 모습을 의미한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회복을 약속하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옴에 대해 동시에 강조하신다. 금식이 단지 금식을 준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그들 삶의 중심을 온전히 돌이켰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문제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누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다운 삶,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진리와 평강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권고는 8:16~17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의 삶에 온전히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리’는 단순하게 사실의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포함한다. ‘평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자 덕목이기도 하다.
3. 온 열방과 민족이 주님께로(20~23절)
그 날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진실로 화평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때, 땅과 하늘이 이 백성을 위해 이슬을 내리고 곡식을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고 아무도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남을 해하려는 마음 없이 은혜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첫 이스라엘처럼(출 19:5~6)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온 열국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나아올 것이다(20절). 이 예언은 8:13에서 이스라엘이 “복”이 됨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이 “복”은 개인적인 복의 의미를 넘어선 ‘타자’를 위한, 혹은 ‘타자’를 향한 확대된 개념의 복이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아오게 되는 길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원래 아브라함 언약(창 12:3)과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는 배경(출 19:6, 제사장 나라)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목적이었다.
20~23절은 온 민족이 주께 나오는 장면을 소개한다. 20절에서는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22절에서는 성읍에서 나라로 확대, 발전한다. 이러한 묘사는 여호와의 약속이 점차 확고하게 이루어질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다. 23절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는 복종이나 충성의 의미일수도 있고, 도움을 구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문맥상으로는 도움을 구하는 묘사다. ‘함께 하신다’는 표현에도 언약 관계가 표현되어 있고, 언약의 온전한 회복을 묘사한다(8:3; 겔 48:35).
금식 문제는 성전과 관련하여 처음 제기되었고(7장), 이제는 성전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게 온전한 미래상을 제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서도 이스라엘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언약 백성의 삶을 저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성전 재건은 온전한 의미의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전 역시 금식처럼 관습으로만 남고 그 의미는 퇴색할 것이다.
성전은 본래 여호와의 거하심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받는다. 여호와와 그 백성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것으로(19절), 스스로 복이 됨을 통해(8:13) 이루어진다. 그때 온 열방과 민족은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일(8:20~23)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모습이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미래의 청사진이다.
나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 때문에 내리신 진노를, 이제 은혜로 바꾸시기로 작정하셨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14~15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 베푸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이 정하신 뜻과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뜻에 있지 않고 복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의 약속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공동체는 은혜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진실과 정의 안에서 우리 가운데 새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면, 삶 속에 마땅히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16~17절).
-우리 더온누리공동체는 이처럼 우리의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 했을까?
-금식의 절기를 기쁨과 희락의 절기로 바꾸신다(18~19절). 바벨론에서 행하던 대로 계속해서 금식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7:3), 이제 더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슬픈 금식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영광 가운데 축제의 날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의 운명을 저주에서 복으로 바꿔 주신 하나님 은혜를 힘입어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도록 허락하신 은혜에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진리의 성읍으로 회복하시어 만국백성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게 하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제사장 나라(출 19:5~6)’의 중보적인 사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저마다 언어가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유대인의 옷을 붙잡고 함께 가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아브라함을 통해 세계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 안에서(갈 3:6~8), 오순절에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사건 안에서(행 2장), 계속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성취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더온누리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제사장 나라”의 중보적 사명을 지금 여기에서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가!
*과거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였고, 현재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14~15절)임을 깨닫게 하신다. 즉 하나님 나라는 심판을 결론으로 삼지 않고, 은혜로 다시 시작하는 나라다. 과거의 죄와 실패가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하신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가신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진리와 정의”라는 공동체성이 선명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단순한 구원의 체험을 넘어 삶 속에서 정의와 화평, 진실함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은 단지 개인 경건의 삶을 넘어 공동체가 말씀에서 제시되는 윤리적인 삶의 실천을 요구받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될것을 깨우친다.
*예루살렘은 이방 나라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는 말씀이 오늘날 과연 더온누리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까? 우리 더온누리공동체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고, 하나님을 찾는 구도의 매력’이 발산되는 공동체일까? 이런 매력이 있을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복음을 찾아오게 하는 영적인 중력이 우리 공동체에 작동하고 있을까? 이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따라 정의와 화평, 진실함으로 살아낼때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겠는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을 나도 만나고 싶다. 나도 당신처럼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나도 당신처럼이라면 예수를 꼭 믿고 싶다. 이런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삶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이 역동하는 삶이다. 그런 삶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해야 나타나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성실하고 평화하는 삶을 추구하며 유지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영적 동력이자, 중력이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삶을 꿈꾸어 보자.
*주님, 지금 여기임한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더온누리공동체가 ‘제사장 나라’의 사명으로 누리며 살아내어, 소망 없는 이 세상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겠습니다. 이 일을 우리 더온누리공동체가 진실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며 서 있겠습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을 세상이 찾아오는 영적 중력이 생동하는 매력적인 교회로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