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1:1-17 선한 목자 음성을 듣고 따라 가리라
11장은 문맥이 부자연스러워 스가랴서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이다. ‘목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묶여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3절은 이방 민족의 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로서 11장 전체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한다. 4~14절은 스가랴의 상징적 행동으로서 목자에 대한 실상을 드러낸다. 15~17절도 상징적 행동으로 못된 목자가 하는 행위의 실상과 그에 대한 심판을 전한다.
1. 서론(1~3절)
1~3절은 레바논과 바산, 요단에게 심판이 내려진다. 하나님은 열국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다. 이 단락은 목자들(곧 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레바논, 바산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들(1~2절), 어린 사자(젊은 사자, 3절)는 지도자를 가리킨다(렘 22:20~23).
하나님의 심판은 ‘아름다운 나무들’과 ‘무성한 숲’을 쓰러뜨림으로써 시행된다. 심판의 대상을 지도자에 국한하지 않고 레바논과 바산의 백성 전체를 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3절에서도 목자들과 어린 사자가 곡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영화로운 것’,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을 밝힌다. 특히 나무와 숲을 언급하는 것은 한 나라의 기반, 즉 백성의 파멸을 의미한다. 백성 없는 지도자가 있을 수 없다. 나무와 숲이 쓰러지는데, 하물며 지고지순한 백향목과 상수리나무들이 견딜수 있었을까? 백성들의 몰락은 지도자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백성과 지도자의 관계(양과 목자의 관계)는 4~17절에서도 계속된다. 양 떼가 온전하지 않고 목자들이 있을 수 없는데, ‘잡혀 죽을 양 떼’를 자신과 무관하게 이익의 대상으로 만 보는 것은 스스로가 어리석은 목자인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의 날을 피해갈 수 없다.
2. 상징적 행동(4~14절)
크게 두 가지의 상징적 행동을 소개한다. 하나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역할인데, 4~6절은 목자로서 상징적 행동을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소개했다. 7~9절은 이 지시에 따라 양떼를 돌보려 했으나 다른 목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만두게 하신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양 떼는 더욱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9절). 10~14절은 양 떼를 넘겨주고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는 비참한 목자의 모습을 그린다.
또 다른 상징적인 행동은 은총과 연합이라고 새긴 막대기를 취하는 행위로,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10~14절에서 다시 이 막대기와 관련된 상징적 행동이 나온다. 에스겔(4:1~17; 5:1~4; 26:1~6)은 상징적 행동을 통해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4절의 ‘잡혀 죽을 양 떼’에 대한 언급이 5절에서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목자들의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제대로 된 목자가 없는 이스라엘의 운명은 잡혀 죽게 될 양 떼와 같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잡혀 죽을 운명의 양 떼를 기르도록 하나님은 명령하고, 이 명령대로 스가랴 선지자는 이행한다.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먹이를 먹이는 선지자의 심정이 이런 상징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강력하게 메시지로 전달된다.
7~9절은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목자를 제거하는 일과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 둘을 취하는 것은 상징적인 행동에 포함된다. 8절의 ‘한 달 동안’이라는 기간과 ‘세 목자’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목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목자는 제거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9절에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상징적 행동이 절정에 이른다. 선지자는 양 떼를 먹이던 것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내버려둔다고 한다. 이는 목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생길 양 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준다. 목자 자신의 비참한 최후는 물론 언급할 필요도 없다.
3. 은총과 연합에 대한 상징적 행동(10~14절)
“은총”과 “연합”으로 불리는 막대기는 이미 7~9절에서 등장했었다. 본문에서는 이 막대기를 꺾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언약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매우 심각하게 전한다. ‘은총’의 막대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은총의 막대기가 잘렸다는 것은 곧 언약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행동을 통해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반응하기를 촉구하는 통렬한 경고의 메시지다.
12~13절은 선지자가 목자로 일하면서 그 대가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선지자는 지금 양 떼, 곧 불쌍한 백성과 불의한 목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목자들은 양떼를 선지자에게 넘겨주면서도 품삯을 제대로 주려 하지 않았다. 선지자가 품삯으로 받은 은 삼십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대체로 선지자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것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14절은 선지자가 ‘연합’이라는 두 번째 막대기를 꺾었다고 보고한다. 언약 백성으로서 연합을 이뤄야 하지만, 그들은 끝내 이루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4. 목자에 대한 심판(15~17절)
목자와 막대기, 은 삼십에 관한 상징에 이어 또 다른 상징적 행동이 소개된다. 15절은 어리석은 목자의 행위들을 묵과하지 않고 회복시킬 것을 암시하고 있다. 16절은 또 다른 목자를 세우겠다고 하시는데, 이 “한 목자”는 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을 한다. 17절에서 이런 목자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고(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어리석은 목자(15절), 못된 목자(17절)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서 ‘칼’은 여호와의 심판하시는 칼을 가리킨다(겔 30:24; 암 4:10). ‘팔’은 힘의 근원을 상징하고(렘 17:5), ‘눈’은 영적 정신적 판단력을 의미한다(사 44:18). ‘마르다(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는 심판 메시지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용어다.
하나님께서 물을 마르게 하심으로 땅이 황폐해진다(렘 50:38; 사 15:6; 19:5~7; 슥 10:11). 또한 열왕기상 13:4에서는 사람에 대한 심판으로 손이 마르게 되는 경우가 소개되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목자들의 최후가 분명하다. 인간은 참 어리석어서 잠시만 번성하고 한 줌의 권력만 잠시 움겨쥐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을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지난 날 쓰라린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건지지 못한 채 다시 하나님 주신 면류관의 보석 같은 축복을 저버리고 영광의 옷을 벗어버리고 오만의 면류관을 자신에게 씌운다.
-목자나 사자의 어리석음은 자신들이 초장과 울창한 밀림을 의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다. 초장 없는 목자가 소용없고, 울창한 숲이 없는 사자가 초라하듯이, 하나님께서 내가 의지하고 자랑으로 여기는 그것을 거둬 가신다면, 영화로운 빛을 쇠하게 하신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육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총을 꺾고 연합을 꺾다. 은총의 막대기를 꺾는 것은 언약이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반응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연합의 막대기를 꺾음으로써 반목과 전쟁을 일삼게 될 것을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참 목자의 부재 때문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대가를 받고 일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당시 목자들이 양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으며, 전지자를 향해서는 겨우 은 삼십을 주어 홀대했음을 보여준다. 그 돈을 ‘그 날난 품삯(공동번역)’이라고 조롱하면서 성전의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신다.
-목자의 타락과 선지자에 대한 냉대, 이것이 타락과 분열의 근본 원인이다.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들아! 하나님은 못된 목자를 가만 두지 않으신다. 쓸모없고 무능한 목자가 사용하는 기구를 빼앗으라고 하신다. 그들은 잃은 양을 돌보지 않았다. 양들이 흩어져도 찾지 않았다. 상한 자는 고치지 않고 강건한 자는 먹이지 않았다.
-참 목자 스가랴를 거절한 양들은 거짓 목자들에 의해서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으며 살도록 두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여호와의 칼이 못된 목자의 팔과 눈에 임할 것이다. 목자는 그 팔로 양들을 보살피고 치유하고 먹이고 지켜야 했다. 눈으로는 열심히 양들을 살피고 찾아야 했다. 그러지 않았으니 팔과 눈을 제거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헛된 위로와 거짓 꿈을 주는 지도자들을 좇는 악한 백성들에게, 악한 지도자를 세워 파멸에 이르게 하신다는 내용이 오늘 묵상의 전체 맥락이다. 현 한국교회의 난맥상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말씀이 아닌가! 이미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유명한 종교인, 그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를 성경처럼 추앙하는 모습에서 이 말씀이 안타깝게도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거부하며 소홀히 하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이용하여 영혼을 향하여 사기를 치는 악한 지도자들의 활개침을 고스란히 허용하시고 계신다. 결국 그들로 인해 교회가 병들고 쇠락하게 된다.
*악한 지도자들의 행태는 교회안에서 공동체를 소홀히 하게 하고, 맹목적인 형식과 순서에 함몰하게 하여 “은총과 연합”을 성도들 스스로 상실하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보다, 자기에게 집중하여 이기적인 소욕만 추구하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웃과의 관계를 막아버린다.
*그러나 메시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과 연합(연락)”으로 안전하게 보살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던 내게 오셔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여 주셨다.
*선한 목자를 거절한 이들에게는 악한(어리석은) 목자를 주신다.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배만 채우는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을 세우시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거짓 지도자들, 목자들이 일어난다.
*날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악하고 어리석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다. 선하심 말씀으로 선한 다스림을 원하시는 선하신 목자의 음성을 따라 가야 하겠다. 양 떼를 돌보지 않는 악한 목자를 심판하시는 하늘의 음성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하리라.
*나는 참 목자인가? 거짓(악한) 목자인가? 나는 먼저 선하신 목자 되신 예수의 뒤를 따르는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악한 목자를 추앙하는가!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은총과 연합이라는 두 막대기를 손에 꼭 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위해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리라 다짐해본다. 나에게 들려진 막대기가 나를 위한 몽둥이가 아니라 성도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기 위한 막대기로 사용되도록 기꺼이 내가 감수해야 할 불편함을 감당하리라.
*주님,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라갑니다.
*주님, 은혜와 연합의 막대기를 부러뜨리는 악한 목자의 행태를 분별하여 은혜와 연합(공동체)를 이루어 주시는 선하신 주님의 이끄심만 붙잡고 따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