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3:1-9 목자를 치는 시험과 불의 연단을 통해 이루시는 구원
12장에 이어 여호와의 날과 관련한 몇몇 모습들을 다룬다. 1~6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로 묘사된다. 궁극적으로는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이 제거되는 날이 될 것이다. 7~9절에서 여호와의 날은 목자를 치므로 양이 흩어지지만, 그 흩어진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을 모으는 날이 될 것이다.
1. 깨끗케 하는 샘 : 죄 씻음의 날(1~6절)
직전 12:10~14은 여호와의 날을 애통하는 날로 소개했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에 자기 죄를 돌아보며 애통하게 될 것이다. 이 단락은 이런 애통에 이어, 여호와의 주도 아래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이 돌아올 길이 제시된다. 곧 죄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샘이 열리게 되어 이스라엘이 정결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애통함과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도 회복될 것이다.
1절의 ‘죄와 더러움’이라는 표현은 포괄적 의미의 죄를 가리킨다. ‘죄’는 흔히 사용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는 것을 가리키고, ‘더러움’은 정결 의식과 관련된 제의적 개념이다. 이 두 단어는 한 쌍을 이루어 온갖 죄를 포괄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샘”은 생명의 근원을 가리킨다. 죄와 더러움의 씻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생명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샘은 적절한 비유다.
죄와 더러움을 씻음은 곧 깨어진 관계 회복의 시작이다. 궁극적으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죄 씻음은 매우 중요하다. 1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범했던 포괄적인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해결하시겠다는 광범위한 은혜를 강조한다.
2절에서 언급된 “이름”은 구약에서 종종 존재, 성격, 명성을 포함하는 용어다. 우상의 이름을 끊어지게 하겠다는 것은 단지 이름만이 아닌 그 존재나 명성 자체를 근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 선지자의 근절 또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과 관련된다. 선지자는 신명기 18:15~20에서 밝히듯 여호와께 선지자를 세우시는 주권이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말씀이 아니라 청중이 듣고 싶은 말씀만 가려서 전하려고 한다(렘 14:14; 23:16; 겔 13:6~8). 여호와의 날에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더 이상 거짓 선지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 본다.
3절은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의 근절을 강조하기 위해 가정의 예를 든다. 어떤 사람이 예언할 때 그를 낳은 부모가 칼로 찌르는 상황은 거짓 예언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고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거짓 예언의 근절을 알리는 말씀인 것이다. 부모의 사랑만큼 강한 관계도 거짓 예언을 근절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 거짓 예언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4절의 “털옷”은 선지자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 혹은 도구를 뜻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속이기 위해 겉으로 흉내내는 행위까지도 근절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3절이 가정의 예를 들어 진술하듯, 5~6절도 가정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6절의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거짓 선지자들이 신의 뜻을 구하기 위해 자해한 상처를 가리킨다. 상처를 물어보는 것은 네가 거짓 선지자가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물어볼 때 친구의 집에서 난 상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고 거짓으로 핑계대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거짓 선지자들이 공공연하게 배척될 것을 보여주는 예언이다.
2. 양을 흩으심 : 하나님의 사람이 구별되는 날(7~9절)
7~9절은 갑작스럽게 목자에 대한 심판 내용이 나오는듯 하다. 하지만 12장에서부터 이어져온 맥락을 고려하면,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 앞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되는 날임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12:1~9)이기도 하지만, 애통(12:10~14)과 죄 씻음의 날(1~6절)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여호와의 날을 ‘양을 흩어서 그 가운데 남은 자를 세우는 날’이라고 말씀하신다.
7절의 “칼”은 심판이 매우 강렬할 것임을 시사한다. 칼이 목자를 치고 그로 인해 양들이 흩어지는데 매우 급박하게 묘사한다. ‘목자’는 지도자들을 의미하고 목자를 치는 행위는 양을 흩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내 짝 된 자’와 ‘내 짝’은 건장하고 젊고 강한 사람을 가리킨다. 역시 칼의 심판이 강력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8절에서 선지자는 온 땅의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남을 것이라고 한다. “삼분의 일”이라는 표현은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게 된 “남은 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8~9절의 묘사도 역사적인 사건이라기 보다, 종말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성취될 묘사로 이해할 수 있다.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연단을 통해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9절에서는 남는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여 시험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한다. “내 이름을 부르리니”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과 소통을 의미한다(욜 2:32; 습 3:9). 온전한 여호와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됨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구원의 표지다. 또한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하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형식적인 관계와 깨어진 언약이 다시금 온전하게 회복됨을 표현한다.
나는?
-예루살렘이 회개하고 애통하며 주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는 성령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겸하여 섬겼던 우상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우상숭배를 묵인하거나 조장하고 우상숭배가 얼마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지를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은 선지자부터 심판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직접 “내가 … 끊으리라” 말씀하신다. 후대에 그 우상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끊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말씀을 알아듣게 해석해주시고 말씀을 분별케 하시는 그날에는 거짓 선지자들 역시 그들이 감싸고 들던 더러운 귀신과 함께 사라질것이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가 심판받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더는 진리를 곡해하는 자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더는 그렇게 인간의 헛된 욕망을 자극하여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 드는 짓이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거짓 선지자와 우상숭배의 잔재들을 일소하실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신분을 감추게 되고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가 자해를 하며 생긴 상처는 친구 집에서 생긴 상처라고 둘러댈 정도로 거짓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진리의 도성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은 연단을 통해 구원받는다. 이런 시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그들이 자신들이 찌른 메시아를 인해 그토록 통곡할 수 있었다. 연단과 시험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간구의 마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때 나의 힘과 나의 능으로 세우는 나의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의 감동으로만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된다.
-흩어진 곳에서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상을 숭배했던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와 직면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심령을 비추고 하나님께로 통곡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갈한 자에게 시원함을 주고 더러운 자에게 정결함을 주는 은혜의 샘을 열어주신다(1~2절). 하나님이 흐르게 하신 이 샘물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죄와 더러움이 씻겨 깨끗함을 입게 될 것이다. 용서와 정결의 샘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열렸다(요 7:37~38).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 샘의 원천을 소유하게 되었고, 날마다 성령을 통해 우리 곁에 흘려 보내시는 이 기쁨의 강에서 물을 길어 마시며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는 우상이나 거짓 선지자를 붙잡는 더러운 영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 사람 전체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의 헛된 말에 속아 넘어가던 자들이 분별력이 생겼고, 악을 행하는 자를 제거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거짓을 행하던 옛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주께서 베푸신 구원의 능력이 나와 우리 가정과 교회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상과 거짓을 미워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
*여호와의 종이시며 가장 가까운 사이인(“짝 된”) 사람이 칼과 매를 맞아 죽게 하신다(7절). 그 결과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양 떼”)이 흩어지게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막 14:27). 범죄한 우리가 맞아야 할 매와 칼에 자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길을 묵상하며 찬양하리라.
*자기 백성에게 불 같은 시험을 겪게 하시고 이기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8~9절). 목자를 잃고 흩어지는 연단의 시험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하나님 백성됨의 계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자신의 목자를 치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남은 자들을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뜻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떤 시험이 있든,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복이 있다(마 5:11~12).
*세상은 갈수록 우상이 날뛰고 거짓 예언자가 출몰할 것이다. 더러운 귀신의 역사도 늘어날 것이다. 아주 못된 목자가 등장하는 것도 빈번해질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는 분명하게 전한다. 하나님께서 정화하실 날이 꼭 온다. 그런데 동시에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화하실 그 시기에 연단이 찾아온다. 마치 금을 제련하듯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을 실행하신다. 이 때 거룩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연단을 통과할 수 없다. 연단을 통과하게 하는 힘은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하나님”이라는 절대 믿음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연단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전의 연단은 육체를 단련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마음과 영혼의 정결함을 위한 연단이 주를 이룬다. 육체적인 핍박은 줄어들었다지만, 분별하지 못하고 긴장하지 않으면 쉽사리 타협하게 되는 교묘한 유혹이 끊이질 않는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꿋꿋이 분별하며 거룩하게 살아내야 할 것이다.
*정결하게 하는 연단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격려하며 용기를 준다. 나의 더러움을 씻겨주는 샘물도 하나님 백성이기에 누릴 수 있는 은혜다. 온갖 죄와 더러움을 씻겨내는 시원함을 누리게 한다. 은혜의 샘으로 나아가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은혜 안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죄에 취한 인생은 샘 곁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다.
*거짓 선지자를 가려 내시는 철저함도 지금 우리 공동체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진리를 외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부터 경계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어주려는 것도 돌아볼 일이다. 참된 사랑은 아프더라도 진리를 말해주고 회개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 않겠는가!
*가끔 직장이나 사회속에서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라고 압박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진실 편에 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 백성은 진리 편에 서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개인의 삶의 영역도 동일하다. 나의 죄와 실수가 드러날 때 정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변명과 거짓을 벗으로 삼으면 곤란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거짓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진실함으로 주님 앞에 서는 훈련을 날마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모습은 자기를 포장하는 것에도 해당된다. 정직은 모든 신뢰관계의 기초다.
*살다보면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지고, 불 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다. 그 시간은 나를 파괴하는 시간이 아니라 정금같이 연단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련되고 단련되어 입혀지는 시간임을 믿는다면 인내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흩어졌다가, 부활하심으로 다시 모인 공동체다. 교회가 겪는 시련은 무너지는 과정이 아니라 세워지는 과정이다. 이를 믿고 서로 격려하며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리라.
*전체 교역자들과 함께 서로 신뢰해 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하루 종일 함께 보내며 친근함이 올라가고 이해와 공감의 폭도 넓어짐을 깨닫는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각각의 삶을 알게되어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가 이해되고 마음의 연대가 견고하게 연결되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공동체를 섬기는 자리로 불러 주신 특권에는 막중한 영적 책임이 함께 따라 오기에 홀로 감당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지혜로움을 다지는 시간들이 되어 가고 있다. 기대가 된다.
*주님, 용서와 정결의 샘물 되시는 주님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기쁨의 강에서 물을 길어 마시며 죄를 이길 힘을 누리겠습니다.
*주님,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베푸시는 복을 사모합니다. 늘 주님을 의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