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6-127편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이 되시고 참된 안전이시다. 126편은 하나님이 포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일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곤경에서도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한다. 127편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무익한 수고를 고백하는 지혜시다.
두 시편 모두 역시 “올라가는 노래”인 순례의 노래다. 그러나 초점이 다르다. 126편은 공동체의 감사와 탄식이 함께 어울려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더 나은 삶을 기대하고 돌아온 현실의 혹독함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127편은 솔로몬에게 속한 시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의 길에서 솔로몬 성전을 헌당하던 때를 되돌아보며 부른 노래로 추측된다. 이 노래는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재건이 필요한 시점에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집을 짓고 성을 지키며 일상의 모든 노고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숨겨진 수고를 찬미한다.
1. 시편 126편(1~6절)_”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1~3절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거주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고, 예언자들이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했지만(사 14:1~2; 렘 29:14; 암 9:14), 이를 잊고 지낸 삶이 배경이다. 이제 그들이 돌아온다. 시인은 여호와가 시온의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실 때 우리가 꿈꾸는 사람들 같았다고 노래한다(1절). “포로”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 전체에서 본문에만 등장하는데, “체류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포로들은 고향을 떠나 타국에 잠지 머무는 체류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았다.
정착민이 아닌 체류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 고달픈 삶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꿈 같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 정복을 기념하며 바벨론이 붙잡아 온 포로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대하 36:22~23; 스 1:1~4). 이 일에 대해 이사야는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행하신 일이라고 말했다(사 45장). 시인 역시 여호와가 돌려보낸 일이라는 해석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 일을 회상하듯 그때에 우리 입에 웃음이 가득했고, 우리 혀에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했고, 그때 다른 나라 백성도 여호와가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고 말했다고 밝힌다(2절).
이웃 나라들이 너희 신은 어디 있느냐 조롱했었지만, 이제는 모두 놀라며 기뻐한다. 시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우리로 하나 되어 여호와가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셔서 우리가 얼마나 기뻤던가(3절)라고 외쳤다. 포로에서 돌아와 나라를 자시 얻은 기쁨과 흥분의 외침이 아니겠는가!
4~6절에서는 큰 기쁨과 흥분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그 기쁨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현재는 눈물이 잠식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어떤 이유인지 밝히지 않지만,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포로들을 “남방의 시내들처럼 되돌려 보내시라”고 청한다(3절). ‘남방’은 네겝 지역을 가리키고 이 지역은 일년 내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지역의 시내들은 내내 말라 있다가 겨울철 우기에 순식간에 불어나 물이 범람한다. 원문의 3절 첫 마디는 “되돌려 보내십시오 여호와여”이다. 이 표현은 “운명을 회복하다”는 의미다. 사로잡힘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혹독한 심판의 상황에서 회복을 향한 분기점을 전제한다. 이런 의미가 남방 지역의 지리적 특징이 함의하는 것과 결합되면, 남방(네겝)의 시내들처럼 이스라엘의 미래를 회복시켜 달라고 도움을 구하는 노래임을 알 수 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들이 감수하고 있는 재정착의 고달픈 현실속에서 범람하는 홍수처럼 갑작스럽고 넘쳐나는 희망이 덮쳐오길를 꿈꾸는 노래라는 의미다. 여호와께서 말라 버린 강바닥을 바꾸고, 바짝 타버린 땅을 비옥하게 해 주고, 작물을 심고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는 간구이기도 하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실 때를 상상하며 고백한다. 노력없이 일확천금을 얻는 것 같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5절)”는 노래로 시인의 성실하고 인내하는 삶을 드러낸다. “울며 씨를 부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6절)”는 지혜 경구를 들어 노래한다.
씨를 뿌리고 거두는 추수의 이미지는 이스라엘이 메마른 땅처럼 좌절과 어려움의 시간을 견뎌냈지만, 새로운 변화 속에서 도래하는 기쁨을 믿음으로 노래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시온으로 돌아와 회복되는 것이 열방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는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 기쁨으로 삶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2. 127편(1~5절)_”여호와께서 세우지 않으시면”
이 시편은 “올라가는 노래”로 “솔로몬에게 속한 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등 여러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27편은 “만일 여호와가 ~하시지 않으면”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반복된다. 1절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다”고 노래한다. “집”은 성전을 뜻할 수도 있고, 일반적인 집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떤 집이든 시인은 “수고하는 자의 수고의 헛됨”을 경고한다. “헛되다(샤붸)”로 번역된 단어는 “쓸모없음, 무가치함”을 뜻한다. 전도서의 “헤벨(헛되다)”을 연상하게 된다. 시인은 지혜자들처럼 인간의 수고와 성취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영역을 바라본 것이다.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 사람의 수고와 깨어있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고단함을 표현한 은유다.
시인의 노래는 사람의 수고로움이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쓸모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의 배후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제하지 않으면 헛수고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2절에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면서 고생스러운 빵을 먹는 것이 헛되다는 것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노고에 함축되어 있는 고생스럽게 일하는 노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수고하지 않으면 먹거리를 얻을 수 없다. 이 땅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실현되는 장이다. 인간의 수고가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고의 결과 역시 미지의 영역이다.
시인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노래한다. 이 표현은 본 시편의 전체 맥락에서 일찍 잠들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는 수고로움보다는 잠을 더 자는 것이 가치있는 것임을 재치있게 승화한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자칫 헛된 수고를 위해 삶을 던지는 것보다 적절한 쉼을 더 가치 있게 여긴 것을 보여준다.
3~5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이 있다면, 거기서 태어난 자녀들이 있음을 노래한다. 시인은 “보라 여호와의 기업(유산)이 자녀들이고,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3절) 라고 노래한다. “기업(나할라)”은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는 유산을 뜻한다(수 14:9; 15:20). “상급(싸카르)”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받는 임금 같은 것이다. 본 시편에서는 문맥상 ‘선물”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신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선물로 여겼다.
젊은이의 자손은 혈기 왕성한 자, 즉 용사의 손에 있는 화살 같다고 한다(4절). 그러니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는 “행복하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5절). 이와 같은 표현은 어떤 일이든 여호와가 함께하는 삶에 깃드는 행복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신비롭게 또는 가시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시온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게 하신 일을 회고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이미 약속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꿈도 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영역이고, 이스라엘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하신 일을 보고 백성들의 입에는 웃음이, 혀에는 찬양이 끊이질 않았다.
-찬양하는 삶은 결국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삶의 여백이 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실 일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보인다.
-시인은 과거의 기쁨을 기억하고 앞으로의 기쁨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일이 앞으로 해주실 일을 간구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회복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남방의 마른 시내를 넘치도록 흐르게 하여 광야에 생기를 주는 홍수처럼” 이 백성에게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시인은 오늘 내 현실에는 눈물을 흘리지만,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광야에 비를 내려 옥토로 바꾸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오늘 뿌린 씨앗을 추수하여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을 반대하고 조롱하는 상황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의 씨, 화평의 씨, 희망의 씨를 뿌리는 자가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다.
-하나님 없는 성취와 안전은 헛되다.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일의 노예가 되어 살게 하는 시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한 쉼을 앗아가는 시대 속에서 참 지혜는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제 힘으로 쌓고 지키는 거대하고 안전한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아들들이 잘 자라는 가정과 일상임을 바라보는 눈이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 진정한 성취이자 안전, 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도전해준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회복을 이끄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의 백성을 세우시고 지키시며 책임지시는 확실한 증거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늘 백성들은 여전히 땅 위에서 산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여전히 혼재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행복하지만, 또 누군가는 슬프다. 누군가는 형통하지만, 누군가는 가혹하리만치 고달프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고달픈 세상 속에서 “꿈꾸는 것처럼” 살았다. 고달픈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기적 속에서 마치 꿈꾸는 것처럼 놀랍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 오늘 나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늘 무언가를 세우고, 무언가를 지키려고 고분분투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시지 않으면 헛될 뿐이라는 것을 지나온 삶의 흔적이 말해준다. 어리석은 인생은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만, 이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신뢰하고 기댄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세우시고 지켜주심을 알기에 평안하여 회복의 잠을 누릴 수 있다. 오늘도 이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며 찬양하리라.
*주님, 주님만이 참 기쁨, 참 쉼, 참 평안(안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먹고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