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리라 [시편 128-129편]
 – 2025년 08월 27일
– 2025년 08월 27일 –
시편 128-129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리라
 
시편 128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에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순례자의 노래다. 하나님을 경와하는 자에게 복을 달라는 제사장의 선언이 이스라엘의 가정과 공동체에 임하기를 기도한다. 시편 129편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들을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제도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악인은 복을 받지 못하고 이내 풀처럼 말라 버릴 것을 담대하게 선포한다.
 
 
 
1. 시편 128편_아쉬레(복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1~6절)
1~4절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과 수고의 열매를 노래한다. 첫 시작을 “아쉬레(복있다, 행복하다)”로 시작한다. 시편 1편과 동일한 시작이다.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걷는 모든 자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그의 길”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삶의 양식,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삶의 행복이다. 
 
시인은 손이 수고하여 열매를 먹는 것이 ‘행복(아쉬레)’이고, 기쁨(토브)이라고 노래한다(2절). 시인이 노래하는 행복과 기쁨은 굶주림, 불임, 갑작스러운 죽음 등의 위협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일하는 자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형통(토브, 기쁨, 좋은)”은 가장 적합하고 알맞게 어울리는 것, 좋은 것, 그래서 기쁘고 즐거운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모습을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 같고, 식탁에 둘러앉은 자녀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은 것이라고 축복하며 표현한다(3절). 아내를 포도나무로, 아이들을 감람나무로 비유하는 것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이 나무들은 번영과 평화의 상징(신 8:8)으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다. 마치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처럼(민 6:23~27) 순례자들을 향해 축복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4절은 “보라(힌네)”를 외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이처럼 ‘복을 받을 것이라’ 선언한다. 성실한 노동으로 먹고 즐거워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지혜로운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5~6절은 앞 단락이 행복과 복에 대해 노래했다면, 그 복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평강을 기원하는 공동체적인 축복으로 마무리한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기를 빌며, 그대는 평생토록 예루살렘의 “번영(투브)”을 보라고 기원한다(5절). “투브”는 최상의 상태를 뜻한다. 이를테면 완전한 복지가 이루어진 상태다.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샬롬(6절)”과 같은 의미다. 농경사회였던 고대시대에 땅의 소산물이 풍성하고 행복과 아름다움이 넘실대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하는 말이다.
 
시인은 이 축복이 그대의 아들 딸의 아들 딸까지 볼 정도로 장수하라는 축복과 함께 이스라엘에 평강(샬롬)이 있기를 기원한다(6절). 장수의 복이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신앙의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의 번영이 유지 되어야 하기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되라라는 축복은 신앙 공동체의 전영과 평강을 비는 전형적인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2. 시편 129편_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악인은 심판받는다(1~8절)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동안 이방인들로 인해 핍박을 받아왔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압박을 끝내시고 이스라엘을 건지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공의가 나타난다. 1~2절은 이스라엘이 받은 핍박을 고백한다. 원문의 첫 마디는 “여러 번(많이)”으로 시작하며 이스라엘이 괴롭힘 당한 이야기를 강조한다. 누가 괴롭혔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이 “어릴 때부터”임을 부각한다. “어릴 때”로 번역된 단어는 127:4에서 등장하는 “젊은 자의 자식”에서 “젊은 자(네우림)”로 번역된 단어다. 아동이나 청소년 시절보다는 결혼 전 청년의 때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청년의때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이며, 꽤 긴 시간동안 어려움 가운데 있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2절의 “그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였노라”라는 문장을 통해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핍박했지만, 결국 이스라엘보다 우세하거나 이길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힘이 강했거나, 전쟁과 정치에 뛰어난 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전쟁의 승패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삼상 17:47)의 간섭과 은혜 덕분이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이미 역사적 사실과 교훈을 통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3~4절은 핍박을 받아온 이스라엘이 감내한 고통을 가늠하고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노래한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받아온 핍박은 이스라엘의 등이 밭처럼 갈려 고랑이 생길만큼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핍박자들이 이스라엘의 등을 밭으로 삼아 갈고, 거기에 고랑을 길게 지었다고 표현한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채찍과 몽둥이에 등에 상처가 나고 여기저기움푹 패여 줄이 만들어져, 마치 일궈진 밭에 생긴 고랑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의미다. “고랑을 길게 지었다”는 것은 고랑의 길이가 충분했지만, 억지로 길이를 늘려 더 길게 만들어나갔다는 의미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이 혹독했음을 암시해준다. 4절에서는 여호와를 주어로 하나님께서 이런 상태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명백하게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원수를 향한 심판을 직접적으로 밝히시며 구원을 선포하신다. 악인들의 핍박은 하나님의 정의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5~8절은 4절에서 선포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원하는 간구를 통해 확대 묘사된다.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자들은 1~3절에서는 모호했지만, 4절에서 “악인들”로 나타났고, 5절을 통해 “시온을 미워하는 모든 원수”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 전체에서 2, 4, 5~8절에서 설명되는데, 5~8절에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심판이 시에서 가장 길게 언급된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하여 ‘그들은 다 수치를 당하고 물러날 것이다(5절) 라고 선언한다. 이 표현은 대적들의 완전한 패배와 멸망을 의미한다. 역사상 이스라엘을 괴롭힌 열방과 민족은 애굽을 비롯하여 아모리, 아말렉, 바산,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두로, 시돈, 아람, 앗수르, 바벨론 등 수없이 많았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등을 통해 예고(사 13~23장; 렘 46~51장; 겔 25~32장) 되었고, 역사의 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증명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풀처럼 말라 사라질 것이다(6~7절). 이스라엘을 학대당하는 소에 비유했다면,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소 같은 가축에 비교될 수 없고, 지붕에 난 풀에나 빗댈 수 있다. 풀이 밭에 나면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무성하게 된다. 그러나 지붕 위에 풀이 나면 잘 자라듯 보이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므로 잘 자랄 수 없고 햇볕에 이내 말라버린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 풀처럼 쓸모없게 되고 자라기도 전에 말라 죽기를 기원한 것이다. 7절의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라는 표현은 6절의 지붕에 난 풀들이 추수하는 자들의 손에 몇 뿌리 잡히지도 않고, 단을 묶어 품에 안아 나르는 자에게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의미다. 이것은 이스라엘 원수들이 추수할 밭의 곡식이 지붕에 듬성 듬성 자란 풀들처럼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져 베어 단으로 묶어 나르지도 못할 만큼 되었다는 의미다.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대적들은 지나가는 자들에게서조차 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8절). 이 역시 그들이 거두게 될 추수의 초라함을 빗댄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2절에서 이미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음을 밝혔고, 4절에서 하나님이 이들의 줄을 이미 끊으셨다고 말했으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선포했음을 놓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남겨진 족속들로 인해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과 다름없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탄의 준동에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것과 같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의 조건이 바로 율법의 말씀(도)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안전과 풍요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뿐이다. 
 
-땀 흘려 노동하여 대가를 얻는 삶이 복이다. “복”은 결코 운이나 횡재가 아니라 성실한 수고의 결실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다복한 가정을 선물로 주신다. 풍성한 포도 열매 같은 현숙한 아내, 무성한 감람나무 햇순 같은 자녀가 복이다. 평범하고 당연하게 여기기 쉬운 것들이 사실은 대체할 수 없는 큰 선물이고 복인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나라의 복과 평강을 노래한다. 자신의 가정만을 관심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와 자식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확장한 것이다. 나오 ㅏ내 가정, 내자식과 가문의 성공만을 비는 세속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는 올바른 신앙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악인의 시험은 좀처럼 끝이 없다. 다양한 때에 여러 방식으로 반복되며 나타난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이 잠시 물러났으나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괴롭혔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죽는 날까지 이 시험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한다. 매순간 깨어 근신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으면 누구든지 실족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한 나라로 세워지는 순간부터(소시부터) 줄곧 가나안과 주변 강대국에게 시달려 왔다. 이스라엘이 악에 넘어져 포로로 끌려갈 때는 완전히 멸망한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되돌리심으로 완전히 멸절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셨다.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넘어뜨리려 한다. 등에 밭고랑을 내는 것 같은 혹독한 고난을 이용하기도 하고, 우리의 약한 부분으로 회유하기도 한다. 잠시 넘어질 수 있지만,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하나님은 영원히 망하게 하지는 않으신다(고후 4:8~10).
 
-우리가 자기 힘을 믿으며 의지할 때 세상을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인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얽어매는 악인의 줄을 끊으실 것이기에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다(요일 2:13, 14).
 
-강력하게 보이고 영원할 것 같은 세상의 권력은 사실 한 순간의 허무한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그 무상함을 이내 싱싱함을 잃어버리는 지붕을 엮는 데 쓰는 풀과, 자라다 말아서 추수꾼이 수확하지도 않을 풀에 비유한다. 그 풀 앞에 서 있는 추수꾼에게 아무도 풍성한 추수를 기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한다.   
 
-하나님 백성들의 의로운 삶을 비웃고 방해한 이들은 그 “마름(야베쉬)”으로 인해 “수치(에보슈)”를 당할 것이다. 시인은 과거의 쓰라린 고난 중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함으로써 또다시 찾아온 아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의 영화를 좇다 주의 영광을 놓치지 말고 악인의 조롱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시편 128편을 통해 복 있는 자에게 땀의 대가를 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셨다. “복”은 결코 운이나 횡재가 아닌 성실한 수고의결실을 보는 것이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 형통이 아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늘 감사하고 자족할 수 있는 것이 형통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왜곡되어있는 “복”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재테크로 미화된 불로소득이나, 복권등에 기대는 태도에 경종을 주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묵묵히 땀을 흘리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손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오늘날의 사회는 특히나 불로소득과 성실하게 땀을 흘리는 성실함의 거룩한 구별이 필요하다. 주식투자를 예를 들면, 무작정 투기성 투자는 불로소득일 수 있지만,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하여 주식을 투자하는 것은 성실함으로 얻는 땀의 열매일 것이다. 복권을 구입하여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대박친 인생을 꿈꾸는 것이 잠시의 위로를 줄 수 있지만, 성실의 가치를 무너뜨려 몰아치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진득하게 땀을 흘리는 성실함은 삶의 걸음을 견고하게 붙잡아 준다.
 
*하나님 백성은 자기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늘 공동체를 추구한다. 교회 공동체, 모든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라며, 복을 나누는 통로로서의 삶을 사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나는 이런 복된 통로의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편 129편을 통해 악인의 시험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을 본다. 매 순간 근신하고 깨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함을 깨닫게 한다. 누구든지 실족할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강력하게 보이는 세상의 권력에 현혹되면 안 된다. 그들은 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허무하게 사그라들 악인의 영화를 좇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거룩하게 좇아가는 믿음의 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 성실한 삶이 맺혀주는 복의 열매들을 사모합니다. 오늘도 성실하게 행하겠습니다.
*주님, 공동체를 추구하며 살겠습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세상이기에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악인의 조롱과 시험은 늘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습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겠습니다. 

댓글 남기기

매일성경 묵상

바벨론 강가에서 [시편 137:1-9]

시편 137:1-8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멸망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한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느헤미야의 개혁 2 [느 13:15-31]

느 13:15-31 느헤미야의 개혁 2    세 번째 개혁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대인들이 성내로 들어와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발견하고 안식일에는 모든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느헤미야의 개혁 1 [느 13:1-14]

느 13:1-14 느헤미야의 개혁 1    본 장은 느헤미야의 추가적인 개혁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 건설에 헌신했다. 잠시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 성 봉헌식 [느 12:27-47]

느 12:27-47 예루살렘 성 봉헌식    느헤미야가 에스라와 함께 성벽을 봉헌한다. 본문은 성벽 봉헌을 성전 봉헌 버금가는 의식으로 소개한다. 이 일은 고레스 칙령이 명령한 일(하나님의 집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서약과 다짐 [느 10:1-39]

느 10:1-39 서약과 다짐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레위인들의 기도에 감화를 받은 귀환자들은 언약에 인봉을 한다. 10장은 언약에 인친 자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명단은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