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1:1-10 감사할 수밖에 없는 교회, 본이 된 교회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대해 감사한다. 또한 그들이 교회의 선생들과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 것에 감사한다.
1. 인사(1절)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이 편지의 공동 저자로 언급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가르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구성된 선교팀이 교회에 대한 관심과 기도를 지속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세 명의 공동 작업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편지 곳곳에서 1인칭 단수(나)를 사용(2:18; 3:5; 5:27)하여 자신이 실질적인 바울의 단독 저술임을 암시한다. 자신이 쓴 편지에 두 동역자의 이름을 포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이들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실루아노(실라)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안디옥에 전달하기 위해 선택 받았었다(행 15:22, 27).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선 후에 실라에게 선교팀 합류를 요청했다(행 15:39~40). 당시 실라는 바울과 함께 선교팀의 공동 리더였기에 디모데보다 이름이 앞서 언급된다. 실라는 2차 전도여행 후에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고린도에 머물렀고. 후에 베드로의 서신을 구술로 받아 필사하기도 했다(벧전 5:12).
데살로니가전서 기록 당시에 디모데는 고향 루스드라에서 선교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행 16:1~3). 부친은 불신자 헬라인이었고,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양육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딤후 1:5).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여 아들같이 여겼고 여러 교회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수차례 대표로 파견했다(행 19:22; 고전 4:17; 빌 2:19; 살전 3:2~6). 후에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를 장기간 목회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클레시아)에 편지하였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의 ‘민회’에서 비롯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인 ‘카할’을 대체한 칠십인역(LXX)의 용어다. 추측하기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늘날처럼 큰 건물에서 대규모 집회로 모이는 공동체였다기보다는 가정에서 모이는 여러 교회의 집합체들이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연결된 공동체였을 것이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표현은 로마서 1:7에도 등장하는 표현인 “은혜”로 당시 그리스도인의 인사로 알려져 있다. 또, “평강”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인사였다. 이러한 서신 초두의 인사말 속에서도 유대인 조상들의 히브리적 문화와 당시 유대인들의 그리스적 문화가 융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2. 데살로니가 성도를 향한 감사(2절)와 그 이유들(3~10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었고,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바울이 서신 초반 수신자 교회의 성도들로 인해 감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나타난 성도들에 대한 칭찬은 다른 서신들의 표현보다 훨씬 더 길고, 구체적이다.
3~10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감사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나열한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의 내용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3절은 믿음, 소망, 사랑의 삼중 은혜를 통해 제시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믿음, 소망, 사랑 주제가 잘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거기에서만 아니라 그의 서신서들 곳곳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한다(살전 5:8; 갈 5:5~6; 롬 5:1~5; 골 1:4~5).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 때문에 감사한다. 이 믿음의 역사는 바른(정통한) 교리를 배우고 믿으며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배운 대로 살아냈다는 ‘믿음’에 대한 소문(8절)은 부족한 면이 있어서 보완과 강화가 필요했다(3:10). 이런 모습은 궁핍과 환난 중에 있는 바울의 선교팀에게 위로를 주었고(3:7) 큰 감사의 이유가 되었다. ‘소망의 인내(3절)’는 미래에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환난과 핍박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참아내었고(3:3), 주님의 재림 때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소망(4:13)을 가졌다. ‘사랑의 수고(3절)’는 하나님과 바울과 동역자들이 그들에게 베푼 사랑(1:4; 3:12)이 동력이 되어 그들도 사랑을 나눈 것을 뜻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대로 서로 사랑하고 있기에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4:9).
4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살후 2:13; 신 33:12)임을 상기시킨다. 이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바울을 감격시켰지만 이러한 삶은 처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는 의도다. 5절에서 바울은 이 성도들이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것이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역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를 “우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한다.
이 복음 전파는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데살로니가인들이 복음을 수용한 것은 말의 논리로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일어난 역사로 복음을 전하는 이의 말과 듣는 자의 마음 안에 “큰 확신(파토스)”을 불러일으킴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 복음을 전하는 이(메신저)의 인격적인 감화(에토스)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5절). 바울과 전도자들은 데살로니가인들 안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위한” 섬김의 모습으로 인격적인 신뢰를 주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복음 전도는 복음의 메시지만큼이나 복음을 전하는 이의 신뢰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잘 표현한 것이 4장 1절에서 밝힌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배운 바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며, “우리에게 배웠으니”라고 강조할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외적으로 많은 환난을 만났다(6절). 하지만 내적으로는 성령이 주는 기쁨이 넘치니 말씀을 잘 흡수하였고, 그 결과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다. 즉 환난을 만나도 믿음으로 승리한 바울처럼, 더 나아가 환난을 이기고 넘어지지 않고 승리자가 되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렇게 ‘바울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된 결과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7절). 타 성도에게 모범이 되려면 복음을 전해준 자와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가능하다.
지리적으로 마게도냐에서 데살로니가가 가지는 중요한 항구 도시로서의 지위와 “비아 에그나티아”라는 도로의 역할이 복음의 확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나온 “주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끼친 선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 목격한 바울과 선교팀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하고 감사했음을 고백한다.
바울은 9~10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바울의 선교팀에 대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의 증언을 소개한다. 증언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이다. 먼저 바울의 선교팀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둘째,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는지, 그래서 셋째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넷째,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게 됐는지를 증언한다.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지신다는 개념이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 일행의 복음 전파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 과정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회심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우상을 섬기던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하나님만을 살아계시고 아들을 심판에서 구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변화의 열매가 있었던 회심이었다.
나는?
-데살로니가전서를 감사의 서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갓 시작된 교회를 두고 떠난 사도의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 때문에 감사로 변한다. 그들이 고난 중에도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역사와 수고와 인내라는 구체적인 열매로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이처럼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이가 있을까? 부디 더온누리공동체 성도들이 이런 감사의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신앙을 채워가는 성도들이 풍성하면 좋겠다.
-한편 누군가가 나를 떠올릴 때, 특히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목회를 바라보실 때, 이처럼 열매 있는 삶으로 인한 감사가 잔잔히 마음을 덮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부디 부족한 나를 통해 온전한 하나님 나라 은혜의 복음이 증거되도록 사용하셨으면 좋겠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는 살아있고 균형있는 목회와 삶을 살아내리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온전한 복음 선포를 인해 감사한다.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들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지 않고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과 함께 전해졌기 떄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 없다. 여기서 깨닫게 된다. 사람이 듣기에 좋은(?) 소식이 복음이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확신과 십자가의 삶이 동반된 말씀이 참 복음임을…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되 성령의 능력과 확신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통로로 살아가기를 다짐한다. 나에게 맡기신 공동체에게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기를 끝까지 감당하는 사역자이기를 결심한다.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온전한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더 담대하게 전하는 삶이기를 다짐해본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감사한다. 죽음의 고난을 피해 복음을 전해준 사도가 교회를 떠나야 했지만,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복음을 기쁘게 받았다. 각처에 소문이 날 정도로 그들은 사도와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이런 모습 얼마나 감동인지 모른다. 사도들은 주님을, 성도들은 사도들을,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고 있다. 우리 더온누리교회가 이런 소문이 났으면 좋겠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교회, 그렇게 하기 위해 목회자를 본 받고, 목자들을 본 받는 교회이어야 하리라. 그런데 이런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참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생동해야 하고, 성령의 역사로 마음과 삶이 이 복음을 따라 살아내려는 식지 않는 열렬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더온누리교회가 어떻게 소문이 나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나야 할 소문은 “더예수님처럼” 살아내려는 올바른 교회, 말씀의 권위 앞에 순종하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균형있게 드러내고 감당하는 교회, 무엇보다 “본 받는 교회”이기를 소망한다. 성도들이 주님을 본 받으려 하고, 목회자를 본 받으려 하고, 목자를 본 받아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어 가는 역사와 수고와 소망이 있으면 좋겠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은 진실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 우상을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소망은 그의 아들 예수께서 강림하여 영원히 구원하시는 날을 보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이 핵심적으로 정리된다. “돌아서고, 섬기며, 기다리는 삶”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돌보심도 간과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성도들을 사랑과 능력으로 돌보신다. 바울 일행이 유대인들에 의해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환난과 유혹 속에서도 남겨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다. 그 덕분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안에 굳게 선다. 또한 모든 교회의 본이 될 수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알았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다.
*더온누리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드린다. 맡기셔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보다 늘 하나님의 너른 품과 은혜의 역사는 우리 공동체에게 풍성하게 나타났다.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의 감사 고백은 곧 나의 감사 고백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택하신 교회와 성도를 붙들어 주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그 하나님께 감사하리라.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뿐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도 역사하심을 보게 된다.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선포되며, 양육이 일어나는 곳마다 확신과 기쁨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말씀 선포 가운데, 양육의 과정 속에 이런 은혜가 넘칠 것을 믿는다.
*성도의 삶의 특징을 들라면 단연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다. 이는 기본적인 성품이기도 하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역사(행동)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수고로, 주님에 대한 소망은 현재의 고난을 견디는 인내로 나타났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구호가 아니라 성도의 삶을 움직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원동력이다. 나의 삶에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나타나야 할까?
*본 받는 삶을 살아야 본이 될 수 있다. 주님을 본 받아 다른 이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개척하여 얼마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게 본이 되었다. 이는 환난 중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과 바울 일행이 보여준 본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영향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두말할 나위 없이 더 예수님처럼 따라 살아내는 삶에서 나온다. 먼저 된 자가 주님을 본받고 살아내면 따라오는 이가 이를 본받는다. 우리 더온누리교회는 어떤 교회를 본받아야 할까? 과연 우리는 다른 교회들에게 본 받을만한 교회일까?
*묵직한 질문이 아침을 채운다.
*주님, 더온누리 공동체와 저의 삶을 돌보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아내겠습니다. 어떤 상황과 유혹 속에서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이렇게 살아내도록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 먼저 주님을 잘 본받겠습니다. 그리고 본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