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2:1-16 하나님을 힘입어 헛되지 않을 수고, 고난을 견디게 하는 말씀의 힘
바울은 자신과 일행의 선교 태도가 얼마나 진실하고 헌신적이었는지에 대해서 강조한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사역한 적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진실한 사역의 동기를 가지고 온갖 고난과 능욕을 이겨내어 복음을 전파하였고 상당한 열매를 거두었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열매를 볼 때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파하기로 한 것이 결코 후회스럽거나 헛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13~16절은 이러한 바울의 선교활동에 대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반응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교회를 설립할 당시의 상황은 사도행전 17:1~10에 묘사되어 있다. 바울과 실라의 사역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데리고 와서 끌어내려 하자, 바울과 실라는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베뢰아로 급히 이동해야만 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도와주었던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끌고 가서 데살로니가 관리들에게 바울 일행을 고소한다. 이런 배경 속에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난 바울에 대해 데살로니가 사람 중 일부는 바울이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엉터리 교사라고 비난했다. 바울은 이런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행한 사역의 진정성을 변론한 것이다.
1. 바울의 사역 태도(1~2절)
바울과 일행들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 전에 빌립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능욕을 당했었다(행 16:19~40). 폭력적인 체포를 당하고 시장에서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음울한 감옥에 던져졌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일부 유대인들이 시기심이 폭발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시내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했다(행 17:5~9). 이 일은 바울 일행이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어 결국 베뢰아로 급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능욕을 경험했으나 그들의 데살로니가 방문이 “헛된 결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한” 것에 대해 감사한다. 이런 결과는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고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가능케 된 일이었다고 선언한다(참고. 고후 4:7; 12:9). 복음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며, 바울 일행은 그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음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바울은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2. 바울의 사역 동기와 사역 특징(3~8절)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의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3~4절은 이에 대하여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옳게 여기셔서 복음을 위탁하셨다(참고. 갈 2:7; 고전 9:17) 는 확신이 있었다. 둘째, 그들 안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결단이 있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보면 오류, 부정함, 교활함에 지배당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이 그를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의도를 감찰하심을 알고 있기에 진실한 의도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5~8절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사역 특징을 “진실성”임을 강조한다. 데살로니가를 방문했던 순회 설교자들과 상반된 세 가지의 모습을 강변한다. 첫째, 바울은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5a절). 둘째,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5b절). 셋째, 바울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6절). “아첨의 말”은 누군가를 이용하기 위해서나, 속여서 돈을 타 내기 위해서나,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 그에 대한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결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통제하려 한 적이 없고 이득을 취하려고 한 적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 높이려고 했다. “탐심”은 순회 설교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이었다. 성경에서 탐심을 우상이라고 부른 것은(골 3:5; 엡 5:5)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가지려는 선을 넘어선 욕구를 책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피하고자 사역에 대한 대가 받기를 거부하면서 가죽 가공업을 통해 자급하는 길을 택했다(2:9; 행 18:3).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이나 명성 얻기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당시 문화에서 순회 강연자는 오늘날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렸고 순회 설교자도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유사한 위치를 갖기 쉬웠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가진 특징을 두 가지 덧붙인다. 첫째, “유순함(7절, 에피오스, 친절함)”이고 둘째는 “희생적 돌봄(8절)”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과 일행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권리는 이미 고전 9:14에서 밝힌 대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시면서 주신 권리였다(마 10:5~15; 막 6:7~13; 눅 9:1~6; 10:1~12).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재정 지원을 받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단했다(살후 3:7~9; 고전 9:3~18; 고후 11:7~11). 바울은 ‘자기 자녀들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가 그들을 아끼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유순한(친절한)” 자가 되었다.
또한 8절을 통해 일행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명들”을 주기까지 즐겨 했다고 밝힌다. “준다(메타디도미)”는 소식이나 물질을 “공유하다, 나눠주다”라는 뜻이다. 바울과 일행들은 복음과 생명을 나누고 공유하길 즐겼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너희(데살로니가 성도들)를 너무나 사모했기 때문”이고, 둘째, “너희가 사랑하는 자 됨”이라고 밝힌다. 바울과 일행들은 어머니(8절)이자 아버지(11절)의 마음으로 주 안에서 자녀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며 좋은 것을 나눠 준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지식 나눔을 넘어 사랑과 돌봄과 희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3. 바울과 일행들이 보여준 돌봄(9~12절)
7~8절에서 바울과 일행들의 목회적 돌봄을 모성애 이미지로 설명했는데, 본문에서는 부성애 이미지를 사용하여 기술한다. 9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선교팀의 수고와 애쓴 것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이들의 수고와 애씀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과 병행한 것이 있는데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흔히 알려진 “텐트 메이커(자비량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한 것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이렇게 한 목적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즉,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던 것이고, 동시에 게으름으로 인해 공동체 지체들에 피해를 주고 있는 자들을 각성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살전 4:11; 살후 3:10).
바울은 일행들이 성도들에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는 태도로 사역했다고 말하면서 “너희”와 “하나님”이 그러한 삶에 대한 증인이라고 한다(10절). 사역의 태도를 “부성애”에 비교하면서 사역의 내용은 “각 사람에 대한(11절)”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요약한다. 바울이 이렇게 사역한 목적은 “너희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엡 4:1; 빌 1:27). 이렇게 성도들의 합당하신 삶의 모습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자기 나라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려고 너희를 부르신” 분이시다.
4.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반응과 박해자들의 정체(13~16절)
바울과 일행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바울과 일행들을 보면서, 동일한 능력이 자신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은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와 일행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통해 말씀을 “들려주었음”을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것을 들음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믿음이 자라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유대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 간의 공통점이 생겼는데, 바로 자기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이다.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핍박이 동질감을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유대의 성도나 데살로니가의 성도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음을 설명해 준다.
15~16절은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한 유대인들의 행위를 “죽였고, 쫓아냈고, 기쁘시게 하지 않고, 대적이 되었다”는 네 개의 분사를 통해 설명한다. 첫째,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였다(15a절). 둘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냈다(15b절). 사도행전 8:1~3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냈다. 또한 사도행전 17:10은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인들의 폭동을 동반한 박해로 인해 그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받으신 박해를 바울과 일행들이 당했고,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다. 셋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다(15c절). 이는 유대인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실패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하였고(2:15), 죄를 항상 채움으로(2: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다. 넷째,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었다(15d절).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타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반대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의 반대로 전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므로 유대인들은 죄를 항상 채우게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내 그들에게 임한다. 이처럼 성취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주후 49년) 혹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주후 49년), 혹은 심각한 기근(주후 47년),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68~70년)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어떤 사건이든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는?
-본문에서 바울은 유독 지금 자신이 한 말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살아왔던 삶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 허언이 아니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의 신실함을 담보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고난이 그를 기다렸다. 갇히고 맞고 쫓겨나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런 여정이 복음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여정을 그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했다면 고난이 기다리는 삶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바울은 오직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려고 사역하였다. 그러므로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궤계가 있을 수 없었다. 바울은 또한 아첨이나 탐심 없이 일했다. 하나님도 증인으로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난과 능욕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전도자들의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신다.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받은 고난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주시고 도우신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힘입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사역하다 보면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볼 때가 있다. 공동체 내부적으로 혹은 외부적인 상황들 속에서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오늘 말씀은 그럴 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고난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한다(*2절, 하나님을 힘입어(하나님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역을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을 소망하게 한다.
-바울은 주님을 본받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이용하기는커녕 유모의 마음으로 대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하였다.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기를 즐겨하였다.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직접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헌신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삶은 주님께서 살아가신 삶이었고, 베풀어 주셨던 사랑이다. 바울은 삯꾼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목자 예수님을 닮은 사역자였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로 사역해야 하리라. 고난이 있든 없든 하나님이 도우시면 복음을 전했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애쓴 바울의 걸음을 뒤따라 가리라. 눈에 보이는 환경에 쉽게 좌우되고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치게 예민한 걸음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민감한 사역의 걸음이어야 하리라.
-어떤 본을 보이느냐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바울은 복음을 엉터리, 더러움, 속임수라 한 유대인들의 비방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올바르고 흠 없게 행하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이러한 삶을 본받았기에 갓 개척한 교회임에도 본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갈수록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사그라지는 것에서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버린 교회에 선명한 도전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진리의 말씀을 증명할 수 없다.
-본이 되는 삶의 중심에 “사랑으로 행하는 삶”의 중요성도 함께 깨닫는다. 바울은 유모처럼, 아버지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가르쳤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마땅히 요구할 권리도 행사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수고도 감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교회를 떠난 뒤에도 성도들을 그리워하며 기도했다. 이런 사랑과 수고가 있었기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돌봄과 가르침을 잊지 않은 것이다.
-나는 거쳐온 교회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바울은 권위를 다 내려놓고 아이에게 헌신하는 유모처럼 성도들만 생각했다. 그들을 이용하기는커녕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손수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또 아비처럼 경계할 때는 엄하게 말했다. 그들의 기분과 감정을 맞추려고 하지 않고 진리에 맞추려고 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민하기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만 바랐다.
-이런 참 목자의 모습이 나에게는?
-말씀은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한다(13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고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말씀 때문에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말씀이 역사한다. 역사하는 말씀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 견디도록 힘을 공급하신다.
-성도의 삶에서 고난은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 때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울도 고난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장차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성도의 고난은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다. 고난만큼 위로도 넘치는 것이 신앙의 비밀 아닌가! (고후 1:5).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 중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주님, 바울의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역사하심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제게 맡겨주신 목회도 바울의 걸음을 본받아 걷겠습니다.
*주님, 고난이 믿음을 증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믿음으로 걷는 걸음에 고난의 길이 펼쳐진다 해도 두려워하기보다, 동행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결국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서 역사함을 봅니다. 말씀 때문에 고난을 견딜 수 있음을 봅니다. 제 안에 말씀을 가득 채워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든 말씀으로 견디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