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낮에 속한 삶을…. [살전 4:13-5:11]
 – 2025년 09월 05일
– 2025년 09월 05일 –
살전 4:13-5:11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낮에 속한 삶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죽은 성도들이 주님 재림 시에 받을 축복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슬퍼했다. 하지만 바울은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더 먼저 영생의 복에 참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영원한 구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 가르친다. 또한 성도들에게 재림의 날을 예측하려 하지 말고, 낮의 아름답게 늘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여 주님 주실 구원을 기대하며 살라고 권면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만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과 함께하는 복을 누리고 이미 죽은 자들은 그런 복을 누릴 수 없다고 오해했던 것 같다.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낙원에는 거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갖고 있던 ‘죽은 자의 결국’과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 관계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시킴으로 그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이 내용을 썼다.
    
    
    
1. 죽은 자의 미래와 그리스도의 재림(13~18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소망 없는 다른 이들(불신자들)”과 똑같이 죽은 이들과의 이별에 대해 과도하게 슬퍼했고, 무기력과 절망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13절). 유대인들에게는 부활 사상이 있고, 특히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생각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빈약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애도는 정도를 넘어섰던 것 같다.
    
이렇게 과도한 애도의 원인은 그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있었다. 그들은 또한 이미 죽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재림의 혜택을 살아 있는 자만큼 누리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산 자보다 더 우선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확언한다. 산 자나 죽은 자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7절).
    
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교리를 이루었다. 고린도전서 15:20, 23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어서 성도들의 장래 부활을 보증한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에 “예수 안에 자는 자들”도 반드시 그와 함께 일으켜지며 그와 동행하게 된다(14절). 바울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15절). 바울은 죽은 성도들이 이미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고후 5:1~10) 예수님의 재림 때 예수님이 그들을 무덤에서 이끌어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끌어 오신다고 가르친다.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강림한다”는 개념은 다니엘 7:13에서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옆 보좌에 등극하는 장면에 나타난다. 인자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받는다. 바울은 다니엘 7장에 나타나는 인자를 “주(퀴리오스)”로 바꾸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인자가 시편 110:1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대권 행사자인 “주”라고 가르친다.
    
주님은 죽은 자의 영혼을 재림 때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죽은 자의 영혼은 하늘에 거하다가 주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오실 때(14절) 그들은 ‘잠'(죽음의 상태) 에서 깨어나 주님과 함께 재림에 참여할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들은 재림에 있어서 손해 볼 일이 없으며,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만나러 오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특권을 가질 것이다(17절). 16절을 통해 “주님의 내려오심-죽은 자들이 일어남-살아남은 자들이 끌어올려짐” 순서로 재림이 진행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16절)”은 분명하게 재림 때와 그 이후에도 “그리스도와 함께(17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먼저”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15절).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일어난다(16절).” 즉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부활을 경험한다.
    
재림 때에는 예수께서 군대 장관처럼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호령”하실 것이다(16절). 천사장과 천사들의 군대들도 동원되는 크고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질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가장 먼저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의 육체가 일어나 “공중에서” 영혼과 연합되고, 살아 있는 성도들도 끌어올려져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17절).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죽은 성도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바울을 통해 오해를 바로잡은 성도들은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르침(이러한 말)을 통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함이 마땅하다(18절).
    
    
    
2. 주의 날에 갑자기 임할 재림(멸망)과 빛과 어둠의 대조(5:1~8)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는 본문에서 서로 구별된 개념이기보다는, 둘이 합쳐서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고 영원을 시작하는 사건들의 시간표를 가리킨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바울은 “주의 날”이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고 가르친다(1절). “주의 날”은 구약에서 종말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사 13:6, 9; 겔 30:3; 욜 1:15; 슥 1:7, 14; 말 4:5). 그날에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을 소멸하시며 그의 백성을 신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도둑같이 예기치 못한 때에 신속하게 임할 것이다(2절). 주의 날은 해산의 고통이 임산부에게 임하듯(갑자기) 올 것이다. “평안과 안전”을 외칠 때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다(3절).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무관한 평안과 안전은 진정한 평안과 안전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가짜 평안과 안전에 기대어 살던 자들에게 멸망이 임할 것이다(3절). 그리스도 없는 평안과 안전에 거하는 불신자들에게 임하는 “주의 날”은 곧 “멸망”이다.
    
4~8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진정한 평안과 안전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성도들은 빛과 낮의 아들들이며, 밤과 어둠의 아들들이 아니다(5절).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주의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다(4절). 이는 주의 날에 임하는 심판과 멸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불신자들과 다르다는 의미다. 빛의 아들답게 신실함을 지키는 성도에게 주의 날은 놀람, 멸망의 날이 아니라 위로, 승리, 보상의 날이다.
    
낮의 아들의 특징은 자지 않고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6절).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든 있을 수 있으니,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늘 깨어 준비한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린다”라는 것은 영적으로 술 취한 것처럼 방종하지 않고 종말을 기다리는 자답게 적절히 행동한다는 뜻이다. 영적인 잠이나 술 취함은 밤에 속한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7절). 성도는 낮의 아들들이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갑옷을 갖춰 입어”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살전 1:3). 하나님에 대한 믿음(1:9; 3:2, 5, 6, 7, 10)과 성도를 향한 사랑(3:6, 12; 4:9)을 보이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를 쓰고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한다.
    
    
    
3. 서로 격려하고 세우라(5:9~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예정하신) 목적은 진노를 위함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소유하게 하시려는 목적이다(9절). 예수는 우리가 그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진노에서 구속하시려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산 성도와 죽은 성도를 함께 모으시고, 하나님과 연합하며 사는 놀라운 축복의 삶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날에 대해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날에 영원한 구원을 기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먼저 죽은 이들에게 대한 근심은 특별했다. 주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로 인해 근심하는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가 무엇일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을 데리고 오시되 살아남은 자들보다 먼저 오실 것이다. 죽은 자들이 다 그날에는 살아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주와 함께 항상 있을 것이다. 주님 안에서는 죽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참된 위로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주 예수의 재림과 몸의 부활에 있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들도 살리셔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함께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한다. 비록 이 땅에는 많은 고난이 있고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도 있지만, 산 자나 죽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믿는 자는 함께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영원한 약속과 소망을 붙들며 오늘도 견디며 살아내야 하리라.
    
-성도에게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지만, 부활의 믿음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소망과 기쁨을 약속한다. 그렇기에 성도의 장례식에는 잠시 헤어지는 슬픔도 있지만, 부활하여 다시 만날 거라는 기쁨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거라는 기대가 뒤따른다. 이것이 소망이 되지 않겠는가?
    
-창조를 통해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으로 그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시작인 창조도 부인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도 부인할 것이다(벧후 3:4~7). 노아 시대와 룻 시대의 심판이 그랬듯이 주님은 갑자기 심판하신다. 임신한 여인이 출산을 피할 수 없듯이 반드시 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원동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향한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날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날을 대비하는 삶이다. 그날이 어둠에 있던 자들에게는 도적같이 오겠지만, 영적인 어둠과 밤에 속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는 예기치 않은 도적의 습격과 같은 불행한 날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을 준비하는 자세는 “깨어 있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날을 준비하는 공동체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 악을 부추기거나 유혹하기보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권면해야 한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며 취한 자들을 깨워서 근신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하겠다. 그래야 그날 우리가 주의 노하심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든지 죽어 잠을 자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같이 사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낮에 속한 빛의 자녀들이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마 25:1~13) 늘 또렷한 정신으로 깨어 있기에 주님이 언제 오셔도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신랑을 만나는 기쁨을 맞이할 것이다. 늘 깨어 있는 삶은 성령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이며, 이는 곧 믿음, 사랑, 소망의 삶이다.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내가 사랑받은 만큼 이웃을 사랑하며,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삶이다. 우리 공동체는 영적으로 깨어 사탄의 공격에 맞서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서로 권면하여 덕을 세우고 있을까?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성도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나태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되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무장해야 한다(엡 6:11~13). 순간순간 몰려오는 세상의 유혹과 영혼의 졸음을 이기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빛의 자녀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깨어 있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그것은 전해 받은 복음을 굳건하게 지키고, 가르침을 받은 말씀대로 세상 방식과 다른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이 방식의 핵심이 “말씀”이다. 말씀을 읽는 것, 듣는 것과 묵상하여 삶의 방식으로 동기화 시키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스스로 말씀을 먹을 수 있는 삶이 건강한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이루어 가는 길이다.
 
*지속적으로 묵상하며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유익은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고, 그 은혜들을 정리하고 준비하여 설교로 선포하는 시간속에서 성령께서 베푸시는 말씀의 넓이와 깊이를 민감하게 가늠하는 경험이 겹겹히 쌓인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삶에서 헛된 가르침에 속지않고, 기록된 말씀으로 건강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 살아내게 한다.
 
*재림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 성도들 안에 누적된 오해들과 왜곡된 삶의 방식들이 스스로를 위축하게 하는 모습을 누누이 보아왔다. 또 일상의 치열한 삶 속에서 믿음과 사랑을 자연스레 망각하게 하는 무수한 일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말씀과 함께 살아내는 빛의 자녀는 이 길을 걸을 때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소망을 붙들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하고,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우는 걸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모습들이다. 이것이 말씀이 주는 힘이다.
 
*그렇기에 말씀을 묵상하는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세상이 어색해하고 곤란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함께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목장모임의 깊은 교제와 기도, 찬양과 격려 속에서, 향기로운 금요일의 함께 모여 부르짖는 영적 공동체성에서, 공동체를 위해 땀과 눈물과 마음을 함께 쏟는 현장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고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굳건하게 살아내야 한다.
 
*홀로 빛의 자녀로 깨어 있는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와 함께 가야 한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 확실한 약속 앞에서 거룩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것의 출발은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으로 삶을 채워 살아내는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재림의 소망이 있기에 사망의 슬픔을 인내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도둑같이 오시마고 알려주심을 기억하고 늘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주님, 깨어 있어 빛의 자녀로 살아내겠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영혼의 졸음을 분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빛의 자녀는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함께 살아내야 함을 더욱 더 굳건하게 붙잡겠습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일상이 되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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