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혹시”라는 은혜안에서 주님을 구하고, 올바르고 겸손하게 [습 1:14-2:3]
 – 2025년 09월 11일
– 2025년 09월 11일 –
습 1:14-2:3 “혹시”라는 은혜안에서 주님을 구하고, 올바르고 겸손하게
    
본문은 7절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소개한다. 스바냐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처럼 여호와의 날이 기쁨과 환희의 날이 아니라 어둠과 심판의 날로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날로 의인에게는 축복의 날이면서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본문은 여호와를 복수하는 용사로 묘사하며 여호와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1. 여호와의 날(14절)
7절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날에 대해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먼저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음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을 구체적 묘사로 강조한다. 첫째,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표현한다. 요엘 선지자의 묘사(욜 2:31)와 말라기 선지자의 언급(말 4:5)과 함께 이날은 큰 변화를 동반하는 두려운 날임을 보여준다. 스바냐는 이날이 “가깝고 가깝다”라는 반복으로 매우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고, “빠르다”라고 표현하며 속도감을 체감시킨다. 또한 “소리”를 표현하며 그날에는 가장 강한 용사도 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할 공격과 상처로 사방에 비명이 뒤덮일 것을 암시한다. 이 소리는 고뇌와 공포와 절망의 소리다. 강한 용사의 비명은 가장 강한 자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여호와의 날의 성격(15~16절)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그날에 일어날 현상을 소개한다. “날”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 반복되며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 설명한다. 본문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 5:18~20과 유사한 심판의 날이다.
    
첫째, 분노의 날이다. 원문의 문장은 “분노의 날이 그날이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둘째,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환난과 고통”이 짝을 이루어 나오고 “짜인”이라는 히브리어 자음으로 언어유희를 통해 공격으로 인한 파괴를 표현한다. 셋째, 황폐와 패망의 날이다. 넷째,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다. 다섯째,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여섯째, 여호와의 현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나팔’이 등장한다. 나팔은 백성이 성회로 모이게 하거나,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알릴 때 사용한다. 본문은 전쟁을 위해 출정하는 이미지를 다룬다.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를 세워 보호하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을 공격하는 분은 대적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욕망과 싸우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교만과 불신앙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며 안심하지만, 여호와의 분노 앞에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며 여호와를 찾아야 한다(2:3).
    
    
    
3. 사람들에게 임한 심판(17~18절) 
여호와께서 “내가”라는 일인칭으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처럼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고난을 내려’라는 표현은 ‘괴롭게 하다, 고통스럽게 하다’를 의미한다. 17a절은 15~16절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요약이며,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기에 그 분노로 인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여호와의 분노로 그들의 피가 쏟아져 티끌같이 될 것이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18절은 여호와의 분노 날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이라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묘사된다. 그날에는 은과 금도 그들의 구원 수단이 되지 못한다(겔 7:19). 온 땅이 삼켜지고, 모든 주민은 멸절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질투”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위한 강력한 마음의 상태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 심판하는 여호와 진노의 날로 묘사한다. 그 심판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4. 여호와의 분노 날에 할 일(2:1~3)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백성들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을 명령법으로 제시한다. 첫째, ‘모여라.’이다. ‘모여라’는 두 번 반복하여서 모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모여야 할 이들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다. ‘수치를 모른다’는 히브리어 표현으로 ‘열정이 없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지만, 백성들은 그날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스바냐는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모이라’고 권고한 것이다. 구약에서 백성들이 모이는 경우는 종교적인 행사를 하기 위해서다. ‘겨같이 지나가기 전(심판의 때에 쭉정이가 날아가는 것처럼)’ 버려지기 전에 모이라고 명령한다.
    
둘째, ‘구하라, 찾으라’이다. 1절은 백성이 대상이지만, 3절은 ‘여호와의 규례를 행하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다. “겸손한(아나우)”으로 번역된 단어는 “가난한 고통 받는, 온유한”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들에게 ‘찾으라’는 동사를 이용하여 세 가지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른 설명이 이어진다. 세 가지 명령은 “여호와를 찾으라, 공의를 찾으라, 겸손을 찾으라”이다. 개역 개정은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번역했다. 여호와를 구하는 것과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이 동일한 개념으로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와를 구하면서 불의와 교만을 일삼는 것은 모순이다. ‘공의와 겸손’은 여호와의 분노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중요한 것은 스바냐가 이와 같은 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제시하지 않고, “혹시”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 날에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여호와의 주권에 있음을 분명하게 일깨운다.
    
    
    
나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속히 임할 패망의 날이다. 이날이 아주 가까이 왔고 또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1:12) 홀연히 그날이 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자본과 힘에 기대어 하나님 노릇을 하는 이들은 반드시 멸망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는 날이 오면, 악인들에게는 환난과 고통과 황폐와 패망과 짙은 어둠의 날이 될 것이다. 견고한 성읍도 높은 망대도 소용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간구하는 진심 어린 회개 외에는 이 심판을 모면할 길을 인간에게 주지 않으셨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준비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오늘도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루어가야 하리라.
    
-여호와의 날은 출구가 없는 심판의 날이다. 일단 심판의 날이 임하면 평소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고난을 받으며 눈먼 자처럼 헤매지만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많은 소유라도 질투의 하나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불살라질 것이다. 물질이 하나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데, 왜 그렇게 소유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물질에 마음이 빼앗긴 그의 백성을 향해 질투하신다고 하신다. 이 호소를 무시하고 스스로 멸절의 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
    
-여호와의 날의 선언은 아직은 돌아올 기회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선언은 최종 선고가 아닌 경고다. 여호와를 찾고, 겸손과 정의를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끓는 호소다. 이를 통해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통회 자복하는 자리로 모이라고 부르신다. 자기 수치와 하나님을 향한 무례를 겸허히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분노에서 숨을 곳을 마련해주고 싶으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내 마음을 일깨우면 돌아오기에 너무 먼 곳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모이라.” 속히 회개의 자리로 “모이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다(새번역_1:18)”.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 대표적으로 물질도 그들을 심판에서 건지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어떤 것도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생들은 자기 힘으로 쌓아올린 이런 바벨탑들을 맹신하고 이런 것들이 자기를 지켜줄것이라고 헛된 믿음을 가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강조하신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사람들아,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올바로 살도록 힘쓰고, 겸손하게 살도록 애써라.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행여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새번역_2:3).”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 방식과 논리에 삶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나님 백성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을 찾는 것, 겸손함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이 겸손함을 구하는 태도의 언어가 바로 “혹시(행여)”다. 구원과 보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절실하게 겸손한 태도로 주님을 찾고 또 찾는 영혼은 하나님이 굳건하게 지켜 주신다.
 
*스뱌냐는 심판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선명하게 선포한다. 동시에 인생들이 절대 신뢰하는 은금의 무력함을 까발린다. 은과 금은 구원과 보호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고 공의(올바름)와 겸손을 구하는(찾는) 삶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무엇보다 “혹시(행여)”라는 은혜를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는 한량없는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심판의 때, 진노를 피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한량없는 은혜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명쾌하다. 헛된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올바른 삶의 방식을 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시”의 한량 없는 은혜속에 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늘 찾는(구하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이미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선포되었고 그날을 대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준비하고 대비하는 삶이기를 다시 결심합니다.
*주님, 그날은 출구 없는 심판의 날임을 알기에 그날이 오기 전에 더욱 마음을 부여잡고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결심합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되도록 집중하겠습니다.
*주님, “혹시”라는 한량없는 은혜 안에 있기에 더욱 주님을 찾고, 올바름과 겸손함으로 삶을 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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