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 2:4-15 열방을 향한 심판선언, “감히 나의 백성을…”
모이라고 촉구하던 스바냐는 열방을 향한 신탁으로 이어간다. 열방이 심판받는 이유를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괴롭힌 것과 오직 나뿐이라고 우쭐대던 교만으로 밝히신다. 심판의 핵심은 아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땅이 황폐해지는 것인데, 그 땅을 유다 백성들이나 그 땅의 짐승들이 차지하게 된다.
스바냐의 열방 신탁은 이스라엘 가까이에 있던 블레셋(서쪽), 암몬, 모압(동쪽)과 다소 먼 거리에 있던 구스(남쪽)와 앗수르(북쪽)가 언급된다. 비록 주전 7세기에 다소 힘이 약해진 다섯 국가지만 이들이 유다의 동서남북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유다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세계, 즉 온 땅을 가리킨다. 이들의 주된 죄목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괴롭혔다는 점과 지나친 교만과 자만으로 설명된다. 그들의 스스로 아무도 자신들을 넘볼 수 없다고 우쭐대던 모습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
열방 신탁이 가지는 의의는 유다에 대해 신탁에 앞서 심판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즉, 열방의 멸망이 가시화된다면 유다의 파괴도 확실하다는 의미다. 동시에 열방 신탁은 유다 회복으로 끝나는 일부 신탁을 통해 유다가 회복될 것에 대한 기초를 다진다. 그리고 열방 신탁은 모든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열방 신탁의 수신자는 이방 국가들이 아니라 주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를 선포하며 그 가운데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전달한다. 스바냐 당시 고대 근동은 앗수르 제국의 전성기였다. 앗수르가 애굽을 점령한 후 친 앗수르 왕을 세웠고, 그 애굽의 왕이 블레셋과 구스를 점령했다. 그리고 스바냐가 예언한 대로 주전 612년 앗수르마저 멸망한다.
1. 블레셋을 향한 신탁(4~7절)
열방에 대한 심판 중 첫 번째로 나오는 나라는 블레셋(이스라엘의 남서쪽)이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비슷한 주전 13세기 무렵 가나안으로 들어가 지중해 해안가에서 다섯 개의 도시 국가 형태로 살았다. 곡창지대인 해안 평야 지역을 차지하고 이스라엘과 뚜렷한 국경선을 형성하지 않고 살면서 자주 전쟁을 벌였다.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 다섯 도시 중 가드를 생략한 네 개 도시가 4절에 등장한다.
블레셋에 대한 신탁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가 가사와 아스글론을 점령하며 이루어진다. 블레셋 외에 5절은 “그렛 족속”에 대한 신탁도 함께 선포된다. 그렛 족속은 블레셋과 같은 해양 민족으로 다른 구약 성경에서는 “갑돌”로 등장한다(암 9:7; 신 2:13; 렘 47:4). 이들은 유다 서편 네게브 사막 방향에 거주했던 족속으로 후에 다윗의 경호원으로 고용되기도 했다(삼하 8:18).
6~7절은 블레셋 땅에 사는 상인들에게 대한 심판선언이다. 그 땅 사람들을 멸절하여 아무도 살지 못 하게 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블레셋에 대한 심판은 동시에 유다의 회복을 의미한다. 블레셋이 거주하던 해안 지역은 목자를 위한 훌륭한 초지가 될 것이고, 유다의 남은 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남은 자”는 심판 가운데 살아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게 하시는 것으로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다(사 44:17; 렘 25:20).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살피심으로 운명이 바뀌게 될 것이다.
2. 모암과 암몬에 대한 신탁(8~11절)
남서쪽의 블레셋에 대한 심판선언에 이어서, 유다의 동쪽인 모압과 암몬에 대해 심판을 선포한다.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던 두 나라는 유다와 많은 갈등을 빚으며 살았다. 그들은 유다를 무시하고 비방했으며, 국경까지 확장하며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매우 교만해졌다. 모압과 암몬의 위치는 사해 건너편의 소돔과 고모라 옆에 있었다. 이들에 대한 신탁은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폐해지는 것이라고 자신의 삶을 걸고 맹세하고 단호히 선포한다.
그렇게 폐허가 된 모압과 암몬 지역도 역시 블레셋 지역처럼 유다의 남은 백성이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스바냐는 유다의 겸손한 자들에게 강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모압과 암몬이 황폐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만하게 유다를 비방하고 조롱했다.
11절은 모압과 암몬뿐 아니라 블레셋까지 포함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될 것이다. “여호와 경외”라는 용어가 이방인을 향할 때 그 의미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세상의 모든 신들의 힘을 약화할 것이다. 이에 따라 여호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이방의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의 처소에서 여호와를 경배할 것을 선언한다. “해변 사람들”로 번역된 단어는 직역하면 “섬 사람들”이고 “매우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당시 유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끝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들은 각자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는 표현도 여호와의 통치가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3. 구스에 대한 신탁(12절)
“구스”는 구약 성경에서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 수단 지역을 가리킨다(애굽의 남쪽 방향). 스바냐의 아버지가 구스 사람이다(1:1). 스바냐는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 국가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 그런데 애굽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것은 스바냐 시대 당시에 남쪽 끝을 구스로 이해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남쪽 끝에 있는 구스까지 하나님의 심판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구스까지 포함된 심판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유다의 대적이었던 애굽도 당연히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스를 남쪽의 끝이라고 이해한다면 이어지는 3:10에서 유다가 회복될 때, 구스 강 건너편에서 예물을 가지고 올 것을 선포하는 장면을 통해 여호와의 통치 영향력이 세상 끝까지 미친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4. 앗수르에 대한 신탁(13~15절)
여호와의 심판 마지막 방향은 북쪽이다. 여호와께서 손을 펴서 앗수르와 그 수도인 니느웨를 멸망시킬 것을 선포한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여호와의 대표적인 대적 세력으로 마지막에 언급된다. 앗수르 제국은 고대 근동의 많은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그들은 유다의 동족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다. 가장 강력한 대적으로 여호와의 심판 대상이 된 것이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사막처럼 메마를 것이라고 선포된다. 궁극적으로 이 심판선언은 주전 612년에 바벨론의 메대 군대에 의해 성취된다. “여호와의 손을 펴서(13절)”라는 비유는 이방 나라의 군대를 이용해 여호와의 분노를 풀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느웨는 앗수르 산헤립 왕 당시에 건설된 수도로서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했다.
티그리스강 유역에 건설된 니느웨는 강물을 잘 이용해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졌고, 강이 튼튼한 방어막 역할을 해 난공불락의 성으로 불렸다(나 3:8).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니느웨가 사막처럼 메마르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바로 옆에 강줄기가 있었으나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해 메마른 폐허가 될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4절은 “메마른 폐허”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즉, 폐허가 된 니느웨는 동물들의 거주지로 변할 것을 선포한다. 각종 짐승이 떼를 지어 편히 눕고, 기둥의 꼭대기에 깃들고 창문에서 울며, 백향목으로 지은 건물도 무너지고 삭아 문드러질 것이라고 말한다.
15절은 이렇게 폐허가 된 니느웨에 대한 조롱의 글이다. 니느웨는 자연을 잘 이용하여 튼튼하고 멋지게 지은 도시여서 외부로부터 침략을 걱정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방어 체계를 가진 도시였기에 자신들을 최고로 여기며 우쭐해했다.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없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만 있고 다른 이가 없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도시가 황폐하게 되고 들짐승들이 사는 곳이 되어 지나가는 자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묘사는 나훔 3:18~19과 비슷하다. 무너진 니느웨의 소식을 들은 모든 자가 손뼉을 치고 조롱하는 장면이 겹친다.
나는?
-유다 주변 열방들, 블레셋(서쪽), 모암과 암몬(동쪽), 구스(남쪽), 앗수르(북쪽)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이들은 열방을 대표하는 나라들로 예를 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방의 통치자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낸다. 공의로 열방을 심판하시고 각 나라를 멸하시기도, 세우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모든 열방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통치는 거대한 세속사를 주관하실 그뿐만 아니라 사소하게 보이는 나의 일상도 섬세하게 주장하고 인도하신다. 놀랍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지 않는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를 이렇게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4~7절은 자기 백성을 괴롭힌 블레셋은 황폐해지고, 쫓겨나고, 뽑힐 것이다. 그 땅에는 거민이 살지 않을 것이고, 유목민들이 양을 키우는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권고하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후, 그 깡에 거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며 결국엔 뿌리째 뽑힐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남은 자”를 권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8~11절에서 자기 백성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모압과 암몬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무케 만드신다. 교만한 그들을 두렵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의 신들을 쇠잔하게 하심으로 열방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신다(말 1:11).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에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반드시 갚으신다. 그 하나님만 바라라.
-12~15절은 애굽을 지배했던 남쪽의 강대국 구스와 “오직 나만 있고 다른 이는 없다”라고 교만해하던 북방의 앗수르를 심판하신다. 앗수르의 화려한 백향목 궁은 들짐승들의 거처가 되고, 기쁜 음악이 흘러나오던 창문에는 당아와 고슴도치(새번역은 갈까마귀와 올빼미)의 울음소리만 가득하고, 이젠 그 문턱을 넘은 사람 한 명도 없는 폐허가 되게 하셔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다. 세상에서 돈과 학벌과 권력을 믿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내 자녀들이 그것을 목표로 살지 않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력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국가의 번영과 이익을 비는 태도를 멀리 해야 할 이유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열방에 대한 신탁이다. 이런 세상 속에 살지만,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은 “남은 백성을 보살피셨다가 돌아오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참혹한 심판 속에서도 신실하게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유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이 그들의 교만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과신한 나머지 친족이자,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비방하고 조롱하였다. 하지만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여 이방의 헛된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증명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이방의 해변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날을 오게 하실 것이다.
-블레셋과 모압, 암몬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누구에게든지 교만하고 특히 곤경에 처한 자를 조롱하고 이용하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이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강대국들도 능히 심판하신다. 애굽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구스도, 당대 근동의 최강 대국 앗수르의 난공불락의 성 니느웨도 하나님의 칼(바벨론)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나만 있고 다른 이가 없다고 외치던 그들의 오만함은 들짐승의 거주지로 바뀐 니느웨를 향한 사람들의 조롱으로 돌려받을 것이다.
-염려 없다고 자부하던 도시, 권력이 주는 기쁨에 취한 노래가 흥얼거려지던 도시가 동물들의 울음소리만 처연하게 들리고, 고슴도치만 문턱을 지킬 뿐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게 하신다. 이렇게 무너질 하나님과 상관없는 화려한 도시 속에 사는 것이 축복이고 성공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놀라운 연대의식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자기 백성에게 퍼붓는 교만한 행동들을 자기를 향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강력한 연대와 동질감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 열방을 향한 심판이 갖는 특징은 인간이 만든 업적과 공들여 빚어온 문명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쓰러뜨린다는 것이다. 잠시 정복자가 될 수도 패배자가 될 수도 있는 삶임을 안다면 호기로운 교만한 언행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길 텐데, 그렇지 못한 인류가 아쉽기만 하다. 짧은 생을 살다 가는 인생이 왜 그리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함께 하시는 것뿐 아니라 강한 연대와 동질감으로 자기 백성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셨던 것이다. 이 놀라운 비밀을 정작 함께 거했던 이스라엘 백성조차 실감못했다는 것이 씁쓸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 하나님 나라 공동체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담대하게 이야기할 수 없어 더 씁쓸하다.
*주님, 열방을 향한 심판선언 속에 담긴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큰 품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것을 붙잡는 지혜로움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남은 자를 지켜주시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이끄시는 사랑을 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시는 공의도 놓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통치와 섭리를 따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이 형식이 아니라 실제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우리를 변호하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