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기다리라(두고 보자!)” [습 3:1-8]
 – 2025년 09월 13일
– 2025년 09월 13일 –
습 3:1-8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기다리라(두고 보자!)”
    
열방 신탁에 이어 유다를 향한 심판 신탁이 주어진다. 포악한 예루살렘 안을 가득 채운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불의한 모습이 같은 장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대비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한 행위가 불러온 타락의 결과였다. 유다의 거주지가 끊어지는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요시야왕 당시 예루살렘은 사실상 앗수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지도자들은 외세를 힘입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고,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호와는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남은 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선포한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며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1.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 선포(1~4절)
본문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다. 심판의 이유는 “패역하고, 더럽고, 억압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그 도시”라는 단어가 나오므로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그 안에 사는 지도자들을 겨냥한다. 1절은 이사야 1:21(‘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을 상기시킨다. 예루살렘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택되었지만, 이제는 패역하고, 더럽고, 억압하는 도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목소리, 즉 토라를 듣지 않았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2절). ‘교훈(무사르)’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람을 훈련하기 위해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전하는 문학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용어는 예언서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하는 방법으로 자주 나온다(사 26:16; 렘 2:30; 5:3; 겔 5:15). 또한 예루살렘은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았다.”에서 “의뢰하다(바타흐)”로 번역된 단어는 “신뢰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하지 않았다”에서 “가까이 가다(카라브)”는 제의적인 목적을 위해 성전에 나아갈 때 사용하는 용어다. 예루살렘은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아, 여호와께 가까이 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3절은 고관들과 재판장들의 범죄를 지적한다. “방백(사르)”은 관직에 있는 책임 있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부르짖는 사자에 비유된다. 사자는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혹은 싸울 때 부르짖는다. 그들의 탐욕은 잔인하다. 그런데 사회의 공의를 지켜야 할 재판장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이리에 비유된다. 이리 역시 배가 고프면 저녁에 잡은 먹잇감의 뼈까지 갉아 먹고 다음 날을 위해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
    
4절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범죄를 지적한다. 선지자는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경솔하다(파하즈)’는 ‘제멋대로인, 변덕스러운’을 의미한다. ‘간사한(보그도트)’은 ‘불충한, 배반의’ 의미가 있다. 스바냐 당시 많은 예언자는 듣기 좋은 말로 지도자들에게 아첨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질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일에 몰두했음을 짐작하게 한다(렘 23:32; 28:1~17).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오용했다. 제사장의 첫 번째 임무는 ‘거룩(성소)’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자가 거룩함을 오염 시켰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토라(율법)”에 나와 있다. 특히 레위기는 제사장을 위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율법을 보란 듯이 어겼다.
    
    
    
2. 여호와의 권고(5~8절)
본문은 여호와에 대한 묘사다. 5절은 삼인칭 시점으로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노래한다. 1~4절의 지도자들과 대비된다. 여호와는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공의를 비추신다. 불의가 온 땅에 펼쳐져도 여호와는 매일 공의를 실행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5절은 6~8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선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는 여전히 의를 행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공의를 비추어 불의한 자의 죄를 드러내시지만 불의한 자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질타하신다.
    
6~12절은 여호와께서 일인칭으로 직접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6절은 2:4~15에 선포했던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지적한다. 여러 나라를 멸절시켰으며, 그들의 망대를 파괴했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자가 없도록 했다. 그들의 모든 도시가 황폐해져 거주자가 없게 했다. “망대(6절, 1:16)”의 파괴는 여러 나라의 자체 방어 체계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의미한다.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의 완성은 유다 백성들에게 대한 경고의 표시다. 유다와 예루살렘 역시 여러 나라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희생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본격적인 심판을 하실 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7~8절에서 알려 준다. 7절에서 여호와는 과거에 이미 유다 백성들에게 지시했던 사항을 지적하신다. 유다에 대한 심판이라는 큰 뜻이 이미 정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악의 형벌을 피하는 방안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권고하시는데, 그것은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아라.”는 것이다.
    
“여호와 경외”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가장 중요한 것이다(신 10:12~13). ‘두려움과 존경심과 놀라움’을 동시에 지닌 이 마음은 여호와 앞에 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지혜자는 말한다(잠 1:7). ‘교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한때 여호와의 사랑받는 도시였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여호와의 마음과 멀어졌다. 그들은 오히려 행위를 더럽히는 데 열심을 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든 것을 더럽혔다. 즉, 악을 행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지시와 반대 방향으로 갔다.
    
8절에서 여호와는 이방 국가에 대한 철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유다 백성에게 지시하신다. 여호와께서 일어나 심판할 때까지 “기다리라”라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심판하려는 여호와의 분노를 다시 선포하고, 그 분노는 “질투의 불”로 표현되며 이방 국가에 대한 최후의 대 심판을 예고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소멸하려는 여호와의 계획임과 동시에 유다가 그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신다. 그것은 “기다리라(하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뿐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맥락으로 말씀하셨다. 바벨론이 유다를 삼키려는 여호와의 계획을 전하자, 하박국은 여호와께 항거한다. 그러자 여호와는 하박국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합 2:3). 세상이 혼란하고 여호와의 공의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의로운 자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여호와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 믿음이 없다면 기다릴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국가들의 죄악을 처벌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여호와께서 직접 이방 국가들의 죄악에 대한 증인이 되어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실 것이다(미 1:2). 나라들과 왕국들을 불러 모아 여호와의 질투 불로 태울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여호와의 진노”는 결국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는 복음이지만 죄인들에게는 형벌이 된다. 심판은 저주인 동시에 희망인 것이다.
    
    
    
나는?
-본문은 예루살렘 심판의 원인(1~4절), 하나님의 회개 촉구와 유다의 완악함(5~7절), 그리고 열국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8절)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영적 간음인 우상숭배로 인해 더럽혀졌다(1~2절). 율법과 예배의 중심지였음에도 의식만 철저히 지켰을 뿐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은 듣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이방의 군사력을 더 의지했다.
    
-예루살렘의 부패는 정치, 사회, 종교 지도층에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에는 먹이를 찾아 우는 사자와 같은 방백들과, 재판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재판장과 백성들의 불의에 눈감는 선지자와, 솔선해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는 제사장이 있었다.
    
-스바냐는 예루살렘을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악한 성읍’이라고 선언한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율법과 제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지도자들이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하게 통치하였다. 선지자와 제사장조차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고 성소를 더럽혔다. 외형적으로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모습이었다.
    
-종교적 생활이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당시 예루살렘처럼 외형적 신앙에 만족하며 참된 경건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늘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향해 돌이키기를 요청하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완고한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지만, 많은 이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오히려 이를 합리화하려 한다. 죄를 고백하고 죄를 버리는 일에 무딜 뿐 아니라 세상의 방식과 같이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난다. 이럴 때일수록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님의 긍휼을 붙들고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과 행동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소망의 문을 열어 두신다.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라”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악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여 온전히 회복시킨다. 그렇기에 “기다림”은 수동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에 대한 깊은 신뢰다. 또한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며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를 뜻한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분은 반드시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자기 백성을 새롭게 빚으셔서 구속과 회복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유다에게 돌아올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명령과 교훈을 저버렸다. 더욱 부지런히 자기 행위를 더럽게 하였다. 열국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고 의지할 열강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여겼다. 자연스레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교제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하나님 없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패역과 포학과 더러움이었다.
    
-돌아올 기회를 주실 때 붙잡고, 주어진 경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이 유지되기를 소망한다.
    
-총체적인 지도자들의 타락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이 그들을 통해 전달되었을 리 만무하다. 말과 삶이 다른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백성들이 거부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들이 깨닫고 전하는 메시지에 어울리게 살도록 기도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의 빛 비추시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신다. 하지만 유다는 냉담한 양심으로 불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백성으로 스스로 심판을 자취하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수 없이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을 비추는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 과연 공평과 정의가 하수같이 넘쳐흐른다고 말씀하실 것 같은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의 경고를 보고서도 코웃음만 날리며, 무관심하고 멀리하는 도성이 되고 말았다. 지도자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포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죄의 술에 흠뻑 취해 회개하기는커녕 부끄러움도 몰랐다. 총체적인 난관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 이땅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손모 목사의 구속을 두고 교회 탄압이라고 외치는 소리는 정의롭지 못하고 패역과 더러움과 포악을 드러내는 자충수다. 전 모씨도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거짓을 마치 하나님 말씀으로 호도하며 포악하고 패역한 모습으로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자처럼 따르는 무리들에게 호도하는 역겨움을 바라보는 것은 역겹기만하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을 증거하는 자리에서 왜 그랬는지 도무지 공감도 이해도 되지 않는 특정 정치 지도자들, 정치 상황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를 일삼았다. 하나님보다 특정 국가를 더 신뢰하는 듯한 언행들은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가장 올바르게 보여주어 본이 되어야 할 사명을 받은 그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런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한 둘이 아닌 것이 목사로 부름받은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혹시 나도 강단에서 비슷하게라도 그리하지 않을지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 있고 회개해야 할 패역과 더러움과 포악을 드러내어 주시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수치스럽지만, 희망이 생긴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여전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수치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도록 도우실 것이다. 세상이 교회들에게 던치는 무참함과 조롱이 주님께서 던지시는 확정된 판결보다 오히려 돌이킬 수 있는 기회요, 통로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그런 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하지 않고 그저 동조하고 지지하는 행동 자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 스바냐의 진단은 분명한 원인을 제시한다. “말씀을 따르지도,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고 활보하는 것”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어찌할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리고 포악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니… 어찌하란 말인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침마다 공의를 비춰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수치를 알지 못하는 비천한 자리에서 따사로운 공의의 햇빛(은혜)로 인해 겸손하게 하나님 백성다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알릴까! 과연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한 나의 삶을 통해 이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가 고스란히 보여지기나 할까!
 
*수치가 선명하게 드러나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함에 직면케 하여서라도 그 저주의 자리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오늘도 나의 부족하기만한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에,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목사로 부름을 받은 무게감을 견디며 살아내리라. 주여 도와주소서…
    
 
    
    
    
*주님, 경외하고 교훈을 받지 않고 고집하여 하나님을 분노케 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오늘, 여기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신실하게 신앙을 지키는 “남은 자들”에게 이처럼 패역하고 더럽고 포악한 지도자들과 백성, 그리고 열국을 심판할 때를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것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민낯들을 까발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것 거룩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어 깨단지 못했던 패역과 더러움과 포악을 까발리셔서 회개와 회복의 기회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고,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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