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처음과 끝이 달랐던 아사의 통치 말기 [대하 16:1-14]
 – 2025년 10월 03일
– 2025년 10월 03일 –
대하 16:1-14 처음과 끝이 달랐던 아사의 통치 말기
    
하나님을 평생토록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아사 왕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일을 저버리자, 하나님도 그를 버리신다. 아사는 북 왕국의 바아사가 쳐들어오자, 하나님이 아닌 다메섹의 벤하닷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 꾸짖으셨으나, 아사는 도리어 노하여 그를 가두고 백성을 학대했다. 또한 그가 병들어 위중했을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먼저 찾는다. 그 결과 2년 후에 죽고 만다. 말년의 교만에도 불구하고 아사는 많은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 평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1. 바아사와 대립(1~6절)
하나님께서 주신 평온함과 쉼은 북 왕국 바아사의 도발과 함께 끝난다(1절). 본문은 바아사가 아사 왕 제36년에 라마를 건축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열왕기에서는 바아사가 아사의 통치 제26년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이에 따라 실제 연대는 제36년이 아니라 제16년이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36이라는 숫자와 16이라는 숫자가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어 필사하는 중에 생긴 오류라 본다.
    
아사가 15년 통치하는 동안 북 왕국의 백성들, 특히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남 왕국으로 많이 이주해 왔다(15: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남 왕국에서 거국적으로 거행한 언약 갱신 의식(15:12~14)은 북 왕국 바아사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바아사는 이듬해(아사 제16년) 그들의 국경선에 있는 라마를 요새로 건축한다. 이것은 일단 북 왕국 사람들이 남 왕국으로 내려가는 것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었다(1절). 동시에 남 왕국이 북 왕국을 점차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아사는 이미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남 왕국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북쪽 국경을 안정시켜 두었다(3절). 한편 아사는 바아사의 직접적인 공격보다도 북 왕국과 아람 사이의 조약이 유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다메섹의 왕 벤하닷을 자기편으로 만들기고 결심한다. 사신을 보내 벤하닷에게 북 왕국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자신을 도와주기를 부탁하면서 그 대가로 많은 은과 금을 보냈다(2~3절). 아사는 이미 그의 부친 아비야 시대에 아람과 체결된 조약이 있었다고 말한다. 벤하닷은 아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북 왕국의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납달리 지파의 국고성들을 포함하여 여러 성읍을 공격한다(4절).
    
바아사는 벤하닷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라마 건축을 중단하고 북쪽으로 이동한다(5절). 벤하닷은 바아사 군대의 북진에 맞춰 자신의 군대를 퇴각시킨다. 이에 아람은 벤하닷과 유다가 조약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이 아사는 라마에 올라가 바아사가 남겨두고 간 건축용 돌과 나무들을 취하여, 조금 더 북쪽의 미스바와 그 동편의 게바를 요새로 만들어 북쪽 경계선으로 삼는다(6절).
    
    
    
2. 선견자 하나니의 책망(7~10절)
선견자(로에) 하나니는 역시 선견자(호제)인 예후의 아버지다(대하 19:2). “선견자”는 직역하면 “보는 사람”이다. 이는 선지자가 갖는 특별한 통찰력을 암시하는 명칭이다. 그가 아사를 책망하면서, 왕이 아람에게 기대어 의지하였으므로 아람이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였다(7절). 아사는 당면한 문제인 바아사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아사와 조약을 맺고 있는 아람까지도 생각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아사를 신뢰하셨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아사를 통해 아람까지 남 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할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그러나 아사가 아람과 조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소용없게 되었다. 하나니는 이를 아사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아사는 눈앞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장기적으로 유다 왕국이 아름으로부터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게 했다. 하나니의 말에 의하면 구스인 세라가 공격해 올 때, 리비아 군대도 같이 왔음을 알 수 있다(14:9). 그때는 아사가 하나님을 기대어 의지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8절).
    
선지자 스가랴처럼 하나니도 역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라고 말한다(9절; 슥 4:10). 그러므로 여호와는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가장 적절한 때 도울 수 있다. 아사는 과거 그의 마음이 “온전하였다(샬렘)”라는 평을 받았었다(15:17). 하지만 이제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지(샬렘) 못하였다는 책망을 받는다. 사람은 늘 변한다. 그러므로 늘 교만해지지 않기를 조심해야 한다. 동시에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비록 아사가 벤하닷과의 동맹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을지 몰라도, 선지자가 볼 때 아사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보다 벤하닷을 더 의지한 꼴이다. 아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잠 1:7) 행동임을 잊은 것이다. 아사는 이후 전쟁을 겪어야 했는데, 이는 그의 어리석은 행동에 따른 대가였다.
    
한편,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칭찬을 듣기에 익숙했던 아사는 선지자의 책망에 크게 분노하여 하나니를 차꼬에 채워 감옥에 가두고, 이 일을 비난하는 백성들을 함께 학대한다(10절).
    
    
    
3. 아사의 죽음(11~14절)
아사는 한때 자신과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찾았다(다라쉬)”라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14:7). 하지만 말년에 그의 발에 생긴 병에 관해서는 “여호와께 구하지(다라쉬) 않고 의원(아사)을 의지한다(12절).”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저자의 이런 표현은 의원에게 찾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이 잘못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아사가 41년의 통치를 끝내고 죽었을 때, 사람들은 온갖 향료가 가득한 침상에 그의 시체를 두고 매우 많은 향으로 분향하면서 그에게 큰 경의를 표했다(13~14절). 이것은 아사가 행한 몇 가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스인 세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북 왕국 바아사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등 남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었던 공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을 통해 여호와 신앙 안에서 유다 왕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건한 아사를 통해 아람까지 굴복시키려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은 유다 왕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고 있음을 보게 한다.
    
    
    
나는?
-추락의 시작은 늘 ‘이만하면 되었다’는 영적 안일함이 깃들 때 슬며시 시작된다. 아사는 북 왕국 바아사의 도발에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추락의 서막을 여는 실수다. 문제 해결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한 데서 추락은 시작되었다.
    
-아사는 눈엣가시 같은 바아사를 제거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아람 왕 벤하닷을 더 의지한다. 결국 그가 바라던 대로 되었으나, 결과가 불순하고 믿음 없는 동기를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일은 하나님이 바라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승승장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막혔을 때보다 더 위험하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승리라는 결과보다,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감당하는 거룩한 패배다. 인간은 패배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늘 승리하시기 때문이다.
    
-아사가 하나님의 더욱 의지하고 신뢰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착각도 언제나 일어난다. 잠시 분별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도 늘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신다. 선견자 하나니를 보내어 그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브레이크 없는 아사의 불순종 질주에 제동을 거신다. 일전에 아사가 구스와 룹을 이긴 것이 말과 병거의 힘이었느냐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신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사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데, 그걸 의지하지 않았느냐고 직접 책망하신다. 아사가 하나니를 통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는 선견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하고 만다. 하나님이 안중에 없으니 뵈는 게 없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진정 위험한 위기다.
    
-아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아사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얻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호와를 구하지 않고 의사만 찾는다. 이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큼 그의 영혼이 어두워져 있었다. 육신의 질병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영혼의 병이다. 그가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심히 병들어 있다. 그런데 일부 교회는 이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시선과 마음이 빼앗겨 있음을 본다. 이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더 직관적으로 조롱하고 수치심을 안겨준다. 이런 상황은 교회가 이미 중병에 걸렸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갱신과 회복의 기회일지 모른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바라는 것이 살 길이다. 형식적인 부르짖음이 아니라 전심으로 매달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 아사가 그동안 쌓아 왔던 개혁과 평화가 순식간에 역전되었고, 통치 말기에 닥친 위기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여 더욱 꼬이고 말았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당했던 자리에 끝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다 병이 더 깊어만 갔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는 어떠한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일시적으로 잘 풀릴 수 있다. 아사는 벤하닷을 동원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지만,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세상의 수단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끝이 좋아야 한다. 끝까지 신실해야 한다. 아사의 행보가 나의 삶에서 데자뷔 되어서는 안 되겠다. 더욱 민감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하루하루 이어야 하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만 의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형편이 나아져도 오히려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다져 나가리라.
    
    
    
    
*주님, 아사의 행보를 보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완주해야 함을 결심합니다. 모든 순간 하나님을 바라는 걸음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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