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교만의 비참한 끝 [대하 25:14-28]
 – 2025년 10월 15일
– 2025년 10월 15일 –
대하 25:14~28 교만의 비참한 끝
    
아마샤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막상 승리하자 이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는 에돔에서 가져온 우상을 섬겼고, 이를 경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교만에 찬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을 도발하고 전쟁을 거두라는 북이스라엘 요아스 왕의 충고 또한 듣지 않는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자신과 나라에 큰 피해를 준다. 하나님을 떠난 후로 반역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에게 암살당하여 생을 마감한다.
    
    
    
1. 아마샤의 배역(14~16절)
에돔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아마샤는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그는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가 승리한 에돔의 우상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신의 “신”으로 삼아 경배하며 분향하고 만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리품을 바치고 백성들과 함께 언약을 갱신하던 선왕들(14:13~15; 15:8~18; 20:27~28)과 달리 참으로 어리석고 악하기 짝이 없는 행보였다.
    
하나님은 이런 아마샤의 행보에 분노하셨지만, 먼저 선지자를 보내 권고하신다. 아마샤의 행동은 다윗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7:17~18)을 어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 두 가지를 확실하게 지적하신다. 첫째, 왕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렸다. ‘왜 그 신들을 찾느냐(‘구하나이까’, 15절)는 반문은 우상숭배와 그 신들에게 기도하는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다. 우상을 찾는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뢰가 아마샤 속에 없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버린 자를 하나님 또한 만나주지 않고 버리신다는 점(15:2)을 아마샤는 경시했다. 둘째, 왕이 숭배하는 에돔의 신들은 무능한 신들이다. 그 신들을 자기 백성조차 구원하지 못했다. 그런 신을 섬기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아마샤 자신이 형체가 없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권능이 있음을 직접 전쟁에서 체험했음에도 눈에 보이는 껍데기 형상들에 능력을 구한다는 점이다.
    
선지자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아마샤는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라며 말을 그치라고 명령한다. 아마샤는 하나님이 그 선지자를 모사로 세워 자기에게 보냈음을 깨닫지 못한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의 끈질긴 권고와 권유를 가까스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7~9절). 그런데 이번에는 권고조차 받지 않으려 한다. 이로써 하나님을 신뢰할 기회조차 완전히 잃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에돔과의 전쟁에 이기게 된 것이 자기 능력인 양 착각했기 때문이다. 교만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 되려 선지자에게 당장 말을 그치지 않으면 폭력으로 다스릴 것이라 협박하여 죄만 가중했다(16절). 하나님은 긍휼을 보여주셨지만, 아마샤는 선지자에게 악으로만 돌려주었다. 이런 아마샤의 행동은 그의 부친 요아스가 제사장 스가랴의 경고를 무시하고 죽인 것을 상기시킨다(24:21). 결국 선지자는 아마샤가 경고를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멸하기로 작정하셨음을 선포한다(16절).
    
    
    
2. 아마샤와 이스라엘의 전쟁(17~24절) 
아마샤의 몰락의 시작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마샤가 전쟁 전 돌려보낸 북이스라엘의 용병들이 유다의 성읍들을 약탈하고 백성을 죽인 일을 구실삼아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한 선전포고다(17절). 이때 아마샤는 참모들과의 상의를 통해 이 일을 결정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막강한 북이스라엘의 군사력을 고려할 때 아마샤의 선전포고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인다.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아마샤의 선전포고에 대해 우화로 대응한다. 요아스의 우화는 가시나무와 백향목과 들짐승이 등장한다(18절).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백향목에 사돈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하자 레바논의 들짐승이 가시나무를 짓밟는다는 내용이다. 이 우화에서 요아스는 자신을 백향목으로, 아마샤를 가시나무로 비유한다. 이는 아마샤의 운명이 우화의 가시나무처럼 될 것을 의미한다. 가시나무는 사사기 9장의 요담 우화에 등장하는 가시나무처럼 자신의 본분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을 일컫는다(19절,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요아스의 우화를 통해 저자는 아마샤의 일차적인 잘못이 “교만”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교만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기인했다.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20절은 요아스 왕의 경고에도 아마셔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기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결정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아마샤를 징계하기로 확정하셨다는 의미다. 또, 저자는 아마샤의 교만함(19절)과 더불어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가 에돔의 신들을 찾았던 사건을 지목한다. 한때 이스라엘의 용병을 돌려보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큰 승리를 경험한 아마샤가 이제 다른 신들을 구함으로 패망을 경험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21~24절은 아마샤의 패배와 사로잡힘을 서술한다. 아마샤가 전쟁을 강행하자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유다의 벧세메스로 와서 전투를 벌인다(21절). 결국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아마샤는 크게 패배하게 되고, 자신은 포로로 사로잡히게 된다(23절).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예루살렘까지 이르러 북쪽 성벽 400 규빗(약 180m)을 무너뜨림으로, 성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만든다. 요아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성전 보물 책임자인 오벧에돔을 비롯한 유다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간다(24절). 결국 아마샤가 일으킨 무모한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침공당하고 성전과 궁전에 있는 보물과 중요한 인적자원들이 큰 손실을 보았다. 요아스의 공격은 바벨론에 의해 초래될 파괴와 포로 사건의 전조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아마샤 한 사람뿐 아니라 유다 백성 전체에게 임하게 된다. 저자는 실패의 책임을 아마샤 왕뿐 아니라 유다 백성 전체에게 돌린다. 왜냐하면 아마샤의 결정에 지지를 보낸 유다 백성(지도자)들의 잘못도 있기 때문이다(17절). 성벽이 헐리고 왕궁의 재물이 빼앗긴 사건은 유다의 국력이 아마샤 왕 때에 심각하게 약화하였음을 의미하고, 유다의 잃어버렸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아마샤의 꿈은 결국 수포가 된다.
    
    
    
3. 아마샤 통치 요약(25~28절)
25~26절은 아마샤에 대한 평가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은 후 15년 동안 생존한다(25절). 본문에는 아마샤가 얼마 동안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붙들려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25절의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아마샤가 생존했다”라는 표현은 아마샤가 요아스의 사망 시까지 포로 위치에서 풀려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북 왕국 요아스의 사망 이후 남 유다로 돌아와 15년간을 더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다로 귀환하여 15년간을 더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아마샤 왕에게 베푸신 은혜이자, 또 한 번의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샤의 회개에 대하여 본문은 침묵한다.
    
27절에서 신하들의 반역으로 아마샤가 최후를 맞이한다. 저자는 열왕기(왕하 14:19)와 달리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후부터” 무리가 그를 반역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신하들의 반역을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린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버린 것”은 아마샤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에돔의 신들을 섬긴 것을 가리킨다(14, 20절). 아마샤는 반역자들을 피해 당시 군사 방어기지인 유다의 주요 성읍이었던 ‘라기스’로 도망간다(27절). 아마샤 입장에서 라기스 거민들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추격해 온 신하들에게 죽인을 당한다. 자기 부친을 암살한 자들을 처형함으로 통치를 시작한 아마샤가 부하들의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28절은 아마샤의 장례 기록이다. 아마샤의 시체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져서 유다 성읍에 장사 된다. 이는 예루살렘에 묻히기는 했지만, 유다 왕들의 무덤에는 묻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역대기의 통치요약 형식에 따르면 왕의 매장지는 그 왕에 대한 평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저자는 왕의 시신이 유다 왕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한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 신을 쫓은 아마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마샤에 대한 기록은 통치 전반부와 후반부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통치 초반 모세 율법과 선지자의 조언을 좇아 나라를 잘 다스렸던 아마샤가 통치 후반부에는 교만함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나는?
-교만이 불러온 오판이었다. 이렇게도 빨리 망각할 수 있나 싶다. 아마샤는 에돔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에돔의 신들도 가져왔다. 그리고 자기 신으로 세우고 경배한다. 그럼, 여호와는 어떻게 했을까? 물론 여호와도 섬겼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는 그의 전부가 아니라 우상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자기 능력으로 에돔을 이긴 줄 착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셨지만,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진멸을 자초했다. 이방 나라와 다들 바 없고 심지어 더 악하게 된 그는 이제 진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교만이 결국 수치를 불러온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요아스 왕에게 교만하다고 조롱을 받는다. 아마샤는 에돔을 친 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 대신에 자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교만은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마샤의 오판을 수정하지 않으신다. 더 나아가 에돔의 신들을 숭배한 아마샤의 죄를 심판하시려고 그의 교만을 사용하신 것이다.
    
-결국 아마샤는 자기 전력을 오판하여 북이스라엘과 맞서 싸워 크게 패한다. 자신은 포로로 붙잡힌다. 백성들은 볼모로 끌려가고, 왕궁의 재물도 빼앗기고, 심지어 성전의 금은과 그릇까지 약탈당한다. 지도자의 오만이 공동체 전체를 재난으로 몰고 갔다.
    
-교만 때문에 끊지 못한 오욕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아마샤의 인생은 부친 요아스를 쏙 빼닮았다. 여호야다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랐을 때 유다는 평화로웠고 강대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반역하자 왕도 반역을 당했다. 아들 아마샤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로부터 돌아서자, 신하들이 그를 반역하여 라기스에서 죽였다.
    
-그의 시작은 좋았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하였다. 처음을 자랑하지 말고 옛 추억을 반추하며 살지 말고, 오늘 만난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나로부터 오욕의 역사가 끝나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중요한 사안을 경솔하게 처리할 수 있다. 아마샤가 선지자의 경고를 흘려들으면서 북이스라엘 공격 문제를 놓고 신하들과 심도 있게 상의하는 것은(17절) 모순이다. 나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을 누구와 먼저 상의하고 있을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상의하는 신앙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교만하면 잘못 판단한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유다를 약탈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18~19절).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왕이 지적한 대로 무모하고 교만한 일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도 아니었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올바르게 상황을 인식하는 통찰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잠시 흥한 것으로 인해 교만하면 이내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이방신을 의지하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신다. 겉보기에는 아마샤가 교만에 빠져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유기(遺棄)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교정의 매를 드실 때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크신 은혜가 임하는 때다.
    
*철저한 전략과 계획도 없이 말만 앞세우다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중심부를 공격하기 위해 기습 작전을 펼치는 동안 아마샤는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유다 군대는 뿔뿔히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21~24절). 말만 앞세우고 교만하게 행동하지는 않는가? 그 교만의 어리석음이 가장 기본적인 방비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섬기는 배역의 대가는 참으로 크다. 아마샤는 여호와를 떠난 후부터 죽을 때까지 줄곧 반대파에게 쫓겨 다녀야만 했다. 결국 반대파에게 비참한 암살을 당한다. 그의 마지막 15년은 여호와를 버린 혹독한 대가의 시간이었다.
    
*오만은 오판을 불러오고, 수치가 덮게 한다. 선대의 오만한 인생이 후대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아마샤에게서 오만의 굴레, 그 가혹하고 처절한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본문에서 가장 인상깊게 묵상이 되는 것은 곁 길로 간 아마샤에게 선지자를 먼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제 지은 죄를 오늘 뉘우치고, 내일 다시 죄 짓기를 반복하는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이를 깨우치도록 “선지자”와 같은 “선생”을 주위에 붙여 주셨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그 선생의 말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진멸이 아니라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 선생이 나에게 있는가?
 
*나의 선생되신 성령께서 말씀을 펼치시고 선명하게 깨우쳐주실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점검하며 지금 주신 회복과 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또한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나게 하는 본문이다. 아마샤의 교만은 전쟁을 불러왔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징벌이 이어졌다. 그는 교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는다. 삶의 터전, 재물, 명예, 결국 생명까지… 교만이 이렇게 무섭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나에게 맡겨주신 목회가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이기에, 은혜안에 늘 거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의 교만을 들춰내고, 듣게하고, 내버리도록 기회를 주실 때 기필코 떨쳐내리라.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으면 비참해진다. 에돔과의 전쟁 전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말을 따라 결국 승리를 맛보았지만, 그 이후 하나님을 배신하고 에돔의 우상들을 하나님 삼았을 때, 패배가 찾아왔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보내는 분명한 경고아닌가? 주님의 은혜 안에 승리했던 어제가, 세상을 더 사랑하므로 실패하는 오늘이 될 수 있다. 원인은 하나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지만, 나는 승리에 도취되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연약하기만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기쁨이 교만을 낳지 않도록 늘 주님의 말씀 앞에 결연히 서야 하리라. 
 
 
    
    
*주님, 제게 선생되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있어 감사한 아침입니다. 늘 민감하게 성령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주님, 교만하거나 성급하게 굴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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