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6:1-23 웃시야의 형통과 몰락
교만은 죄와 패망으로 직결된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형통한 삶을 살았다. 군사 활동과 방비 사업을 비롯하여 건축, 농업, 목축업 등 여러 방면에서 그의 명성과 영향력을 떨쳤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자 마음이 높아져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성전과 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그는 나병이 걸려, 왕의 직위를 잃고 격리된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1. 웃시야의 통치(1~5절)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아사랴, 왕하 14:21)의 통치 전반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선한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16세부터 5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며(주전 792~740), 이 중 첫 25년은(주전 792~767) 아버지 아마샤와 공동으로 통치했고, 후반 10년(주전 750~740)은 아들 요담과 공위했다. 1절은 유다 백성이 웃시야를 왕으로 세웠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온 백성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아마샤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웃시야는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귀속시켰다(2절). 엘롯의 아카바만의 항구로서 에돔 지역이었으나 아마샤가 에돔을 정복하였고(25:11~12) 웃시야가 재건하여 유다 땅으로 귀속시킬 수 있었다. 항구도시를 얻음으로써 상업적으로도 흥왕할 가능성이 생겼다. 이런 물리적 업적 외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찾은 선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라는 설명은 아마샤의 교만과 불순종(25:14~22)과 상반되는 내용이다. 이는 아마샤의 통치 전반에 대한 평가(25:2)를 적용한 것으로 이해되며, 웃시야가 아버지의 선한 길을 따랐음을 알린다. 웃시야는 특히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찾았다. 왕들이 선지자들을 영적 모사로 삼는 행동(20:20; 24:2)은 율법을 읽고 행하는 이상적인 왕의 삶(신 17:18~20)과 직결된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동안 하나님을,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2. 웃시야의 명성(6~15절)
웃시야의 형통함이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음으로 형통하였다는 점(1~5절)을 앞 단락에서 부각했다면 본 단락은 웃시야의 형통함이 먼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었음을 강조한다. 구조적으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앞부분(7절)과 뒷부분(15절)에 기술하여 이 점을 부각한다. 특히 15절에서 “기이한 도우심”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신적 개입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웃시야에 베푸신 형통함은 다방면에 퍼진 그의 명성으로 증명되었다(8, 15절). 다른 왕들과 견주어 업적이 두드러지게 묘사되고 있는데 열왕기에는 이 언급이 안 나온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블레셋과 싸워 이겨 가드, 아브네, 아스돗 성벽을 헐었다. 아스돗 땅과 블레셋 주민들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했다. 여호람 때는 블레셋이 아라비아인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아들들을 죽이는 등 큰 피해를 주었는데(21:16~17), 이번에 웃시야가 블레셋을 치고 성읍을 건축하여 확실히 앙갚음을 해주었다. 이로써 유다는 남서쪽의 방비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었다. 남부와 남동쪽의 유목민들인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대항하였다. 동부의 암몬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결과적으로 유다는 동부, 서부, 남부의 영역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 막고 있어서 북쪽으로의 진입은 어려웠다. 이러한 활약으로 웃시야의 이름은 애굽 변방까지 퍼졌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국내에서는 방비 사업과 농업에 힘을 기울였다. 예루살렘에 문들과 망대를 세워 이전 전쟁에서 파손된 부분(25:23)을 복구하고 방비를 강화했으며, 유대 광야에도 망대를 세웠다. 가축이 많아서 물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서 가축을 길렀다. 웃시야는 농사를 좋아하여, 토질이 좋은 곳에 포도원 농사를 확장했다. 그에게는 용감한 군사들도 있었다. 군대 조직은 가문에 따라 나뉘었는데,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수하에 가문의 수장들 2,600명, 군인 307,500명이 있었다. 아버지 아마샤 때(25:5)보다 7,500명이 늘어난 규모다. 이들은 모두 싸움에 능하여 왕과 전쟁에 나가는 자들이었다. 웃시야는 그의 온 군대를 위해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맷돌을 준비하여 전투 준비에 온 힘을 다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인재를 뽑아 신무기를 만들게 했다. 망대와 성곽 위에 장착하여 화살을 쏘고, 큰 돌을 던지게 하는 신무기였다. 이와 같이 군사, 경제, 산업 등에서 위세를 떨치므로 그의 이름이 멀리 퍼졌다. 이 모든 데에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었다.
3. 웃시야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 종결부(16~23절)
웃시야는 하나님 덕분에 형통했지만, 훗날 교만으로 인해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전환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경우는 요아스와 아마샤에게서도 나타났다. 아마샤처럼 강성해졌을 때(16절), 요아스처럼 선지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을 때(5절), 웃시야의 마음에 교만이 싹텄다. 그의 악행은 특히 하나님에 대한 범죄였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 자신이 직접 분향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범죄하다(16절)’는 ‘불충실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본분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음을 암시한다. 성전은 제사장과 레위인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 본체이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분향단이 있는 ‘성소’를 가리킨다.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도 제사장에게만 부여된 직무다(18절; 출 30:7~9). 웃시야가 무슨 목적으로 분향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사장의 권한에 도전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 사울 왕이 사무엘 대신 번제를 드려 왕의 자리를 잃었다(삼상 13:8~14). 웃시야에도 같은 결말이 기다리게 된다.
한편, 웃시야의 주제넘은 행위에 제사장 아사랴는 용맹한 80인의 제사장을 대동하여 그에게 맞선다. 그는 분향하는 일이 왕의 권한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며, 성소에서 나갈 것을 명한다. 또한 왕이 하나님께 불충실했으므로(범죄하였으니, 18절)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이 없을 것이라고 밝힌다. 웃시야는 즉각 회개하지 않고 화를 내며 향로를 잡고 있었다. 이는 제사장의 지적과 경고를 무시한 행동이며, 성소와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경시한 태도다. 그러므로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내자 하나님은 이마에 나병이 생기는 벌을 내리셨다. 이는 모세를 비방하고 권위에 도전한 미리암에게 하나님이 나병으로 심판하셨던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민 12:10). 제사장들은 이를 보고 왕을 급히 쫓아냈고, 왕 자신도 속히 나갔다. 나병환자는 병이 있는 날 동안 성 밖에서 혼자 격리되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규정(레 13:46)을 따라 조치한 것이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웃시야를 치셨다고 설명하여 나병이 하나님에게서 온 심판임을 분명히 한다.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모욕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명령에 대한 모욕이다. 웃시야는 성전에서 차단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병환자로서 따로 별궁에서 살았다. 제사장 직무와 권한을 넘봤던 그는 결국 그의 왕의 직무와 권한을 잃었다. 아들 요담이 그를 대신하여 왕궁을 관리하고 백성을 다스렸다.
22~23절은 웃시야의 통치 종결부다. 간략하게 언급한다. 웃시야의 남은 행적은 이사야의 글에 기록되었다고 밝힌다.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은 해(사 6:1) 소명을 받은 선지자다. 웃시야는 나병환자였기에 왕들의 묘실이 아닌 그들과 가까운 다른 곳에 안치된다. 요담이 그를 이어 왕이 된다.
나는?
-요아스 왕에게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었다면, 웃시야에게는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있었다. 그가 왕의 곁에서 멘토가 되어 주는 동안 웃시야는 여호와를 찾았고, 하나님의 형통케 하시는 은총을 경험했다. 나의 목회 현장을 함께 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늘 일깨워주는 존재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친구와 지도자를 곁에 두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마음을 다잡아 주는 존재인가? 이 묵직한 질문이 오늘 아침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웃시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을 때 형통의 은혜가 한시적으로 주어졌다.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형통한 삶을 살았지만, 그 후에는 교만으로 자기 한계에 갇혀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기 위해 늘 주의 말씀의 울타리를 확인하고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웃시야를 하나님은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외적들의 공격을 막아주셨고, 북 왕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하여 부흥의 여건을 마련하여 주셨다. 유다의 번성은 웃시야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은혜(도우심)가 함께한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다(시 127:1).
-나라가 강성해지자 웃시야가 교만해졌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분향의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성전으로 들어갔다가 제사장들의 만류를 거절하여 나병에 들고 만다. 남은 평생을 별궁에서 나병환자로 지내야 했다. 은혜를 잊은 데서 교만은 싹트고, 타락은 본격화된다. 나는 어떤가?
-웃시야가 이렇게 변질되어 교만해진 이유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얻게 된 후 종교적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앉고 싶은 교만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교만이 저주를 불러와 나병이 생겨 죽는 날까지 성전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웃시야는 그의 교만으로 역대 어느 왕보다 영광스러운 업적을 이루고도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나병환자가 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특별히 마련된 별궁에 격리 수용된다. 또한 감히 여호와의 전에 출입할 수 없었고 죽어서도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교만은 순식간에 영혼을 잠식하여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역사한다. 웃시야의 삶을 반면교사 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작만큼이나 끝도 중요하다. 인생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울 때 그 삶이 전체적으로 아름다웠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라고 읊으며 마무리할 수 있는 삶이기를 고대한다.
*주님,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주님 앞에 겸손함을 잃지 않는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