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요담의 타산지석, 아하스의 우상숭배 [대하 27:1-28:15]
 – 2025년 10월 17일
– 2025년 10월 17일 –
대하 27:1-28:15 요담의 타산지석, 아하스의 우상숭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을 행하는 삶이 왕과 백성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선왕의 본을 따른 요담에는 나라의 견고함으로,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른 아하스에게는 전쟁으로 응답하신다. 한편,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를 치고 그들의 황제를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선지자의 권고에 순종하여 그들을 다 돌려보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직한 길을 택한다.
    
    
    
1. 요담의 통치(27:1~9)
1~2절은 요담의 통치를 요약한다. 요담은 25세에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렸다(주전 750~735). 요담은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의 눈에 정직하게 행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웃시야의 전철을 밟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해 부패했다. 선대 왕 웃시야가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고(26:26)’, 그의 죄악이 백성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열왕기는 백성의 부패 원인을, 제거되지 않은 산당과 연결 짓는다(왕하 15:35).
    
3~9절은 요담의 업적과 통치 종결부를 소개한다. 요담의 통치는 방비와 군사 활동을 중심으로 강성함이 드러난다. 웃시야가 닦아 놓은 터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유다에 공헌했다. 먼저 웃시야는 예루살렘의 성문들과 망대를 증축했었다(26:9). 요담은 그것을 이어받아 성전의 윗 문과 오벨 성벽을 증축한다. 성전 윗 문은 아마샤와 요아스의 전쟁 잔해였고, 웃시야 때 복구되지 않아 보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벨은 성전과 다윗성 사이의 언덕이며, 여기에 성벽을 쌓아 방비를 강화한다. 또한 웃시야는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블레셋 진영에 성읍들을 건축했는데(29:6, 10), 요담은 유다 산악 지역에 성읍들을 짓고 삼림 지대에 견고한 성채들(진영)과 망대를 수축했다. 이로써 웃시야가 이뤄놓은 방비 구역을 더 확장하고 방비 태세를 강력하게 보강했다. 또, 요담은 암몬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 웃시야 때에도 암몬에서 조공을 받았으나(26:8), 이번에는 은 100달란트(3.4통)와 밀과 보리 1만 고르(220만 리터)의 조공을 3년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요담이 이룬 성공적인 방비와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을 순종한 결과였다. 6절에서 요담이 여호와 앞에서 그의 길을 굳건히 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역대기는 계속해서 왕의 강성함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사이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왕이 하나님의 법규를 지킬 때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7:17~18)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지킬 수 있음을 기대하게 한다(7:18). 참고로 암몬과의 전쟁은 열왕기하 15:37에 기록된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한다.
    
    
    
2. 아하스의 통치(28:1~15)
1~4절에서 아하스는 아달랴 제거 이후 하나님의 눈에 정직하게 행했던 선왕들의 발자취(24:2; 25:2; 26:4; 27:2)를 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 20세에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이 되어 16년을 통치하는 동안(1절, 주전 735~715), 다윗의 길을 좇지 않고 여호람과 아하시야처럼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택했다. 아합 가문과 아달랴의 악몽이 되살아나듯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악을 저지른다. 바알 우상을 만들었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분향하며 자녀들을 불살랐다.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방인의 흉악한 관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시며 이런 풍습을 금하셨다(레 18:21; 20:1~5). 아하스가 자녀를 희생 제사로 바친 사건은 시발점이 되어 이후에도 도벳과 바알 신당을 세우고 자녀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렘 7:31~32). 아하스는 산당이나 경관이 좋은 작은 산 위나 푸른 나무 아래에 세워둔 우상들에게 제사 드리고 분향했다. 백성들도 왕의 우상숭배에 탄력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더 쉽게 돌아서게 된다.
    
5~15절에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유다를 침략한 이야기다. 아하스의 배역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다. 하나님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유다를 공격하게 하셨다(주전 735). 5절에서는 하나님이 아하스를 각각 아람 왕의 손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겼다고 반복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심판임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는 서로 동맹을 맺고, 유다에게도 자기들과 동맹을 맺도록 회유했다. 그들은 유다를 동참시켜 앗수르에 맞설 계획이었다.
    
이 두 나라가 동맹을 서로 맺었음을 알았을 때, 아하스와 백성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들 같았다고 이사야는 표현한다(사 7:2). 당시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나, 아하스는 그 말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람-이스라엘과 동맹을 맺는 대신 앗수르에게 손을 뻗는다. 이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배신한 유다를 공격한 것이다. 아람은 많은 백성을 다메섹에 포로로 끌고 갔고, 북이스라엘은 유다의 용사 12만 명을 죽였다. 이때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 대신과 총리대신도 죽임을 당했다. 유다는 왕궁의 중요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정세가 크게 약화한다. 이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 군대는 유다 백성과 아내와 자녀 2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재물을 노략질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갔다. 유다는 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는다. 이 손실을 5절에서 “큰 포로(많은 무리)”와 “큰 패배(심히 많은 무리)”와 같은 “큰”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사용한 것에서 드러난다. 이는 단지 유다에 임한 큰 손실만 아니라 아하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크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 죄는 “하나님을 버린 죄”로 요약된다. 6절에서는 하나님을 버린 주체를 “그들”이라고 밝힘으로 아하스만 아니라 유다 백성 모두 하나님을 배역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저버린 유다 백성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다시 유다로 회복시켜 긍휼을 베푸신다. 북이스라엘 군대가 20만의 유다 백성을 사로잡아 사마리아로 돌아왔을 때 오뎃 선지자가 맞이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유다 백성을 사로잡아 온 것은 그들의 장성함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임을 밝히며, 이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이 두 가지 죄를 저질렀다고 꾸짖는다(9~10절). 첫째, 유다에게 살육을 강행한 것이다. 더구나 “노기가 충천하여” 죽였으니, 하나님의 진노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냐고 호소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포로 된 유다 백성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족을 노예 삼는 일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레 25:46)을 업신여기는 처사다. 이런 행동들은 하나님께 “허물(10절, 범죄함)”이 된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이 그들의 “형제들”임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11절). 선지자는 이어 유다에게 임했던 진노(9절)가 이제 북이스라엘에게 임박했다고 경고하며, 순종을 촉구한다(11, 13절).
    
놀랍게도 에브라임(북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들이 선지자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서 군대에 맞섰다. 그들은 군대가 행한 일이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하는 행위임을 밝힌다. 또한 “허물(10, 13절)”이 너무 커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음을 강조하여 군대를 설득한다.
    
놀랍게도 선지자와 지도자들의 권고에 이스라엘 군대는 온전히 순종한다. 포로와 노획물을 온 회중 앞에 두었다. 그러자 임명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들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마시게 하고 기름을 발라주고 약한 자들은 나귀에 태웠다. 그들을 여리고로 데리고 가 그들의 형제, 유다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순종은 아하스의 배역과 완악함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악한 아하스 아래에서도 유다 왕국이 지탱되도록 긍휼을 베푸셨다.
 
    
    
나는?
-요담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1~2절). 부친 웃시야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웃시야는 나병에 걸려 별궁에 있었으니 깨달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강성하게 된 후에도 교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다(6절). 웃시야는 부친 아마샤의 잘못을 답습했지만, 요담은 부친의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요담의 통치가 처음에는 부친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는 정도였다면, 점차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걷고자 헌신한다. 대부분의 인생사가 좋은 출발과 나쁜 결말로 이어지는데, 요담은 미약한 출발과 창대한 결말의 좋은 본보기이다.
    
-요담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으며(2절),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길을 걸었다(6절). 그의 신앙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다. 그가 시종일관 올바르게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여담은 부친 웃시야의 강력한 국방 정책을 이어받아 큰 규모의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라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망대도 세운다. 요담에는 전쟁이 없을 때 국방을 튼튼히 하는 지혜가 있었다. 더온누리 공동체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내가 준비하고 힘써야 할 것은 단연코 말씀의 방벽을 튼튼하게 세우는 것일 거다. 고난과 환난의 폭풍이 몰려오기 전, 평안하고 잠잠할 때, 더욱 대비하고 채비해야 할 것이다.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는 길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길을 걷는 데 있다. 요담은 암몬 왕과 싸워 이길 정도로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다. 부친 웃시야가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했다면, 요담은 반대로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함으로써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다. 이 모든 걸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른길을 걷는 것에 있었다. 믿음의 정도를 걷는 자를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하신다.
    
    
-그런데 아하스는 요담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간다. 유다는 우상숭배 천지가 된다. 하나님을 버린 유다를 하나님도 버리신다. 자기 백성을 지키지 않으시고, 아람 손에 넘기고 에브라임(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신다. 하루에 용사 12만 명이 죽고, 백성 20만 명이 북이스라엘에 포로로 잡혀간다. 우상숭배를 통해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망뿐이다.
    
-유다 사람 20만 명을 포로로 끌고 오는 북이스라엘 군대를 오뎃 선지자가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 승리가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니라 유다를 심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승리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노기충천하여 살육하는 일은 이 전쟁의 목적에 맞지 않기에 포로들을 어서 돌려보내라고 한다. 특히 오뎃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라고 묻는다. 유다를 향해 분기탱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에 북이스라엘이 순종한다. 포로가 아니라 형제로 대우하여 돌려보낸다. 신앙의 정통성을 상실한 북이스라엘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는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도 있었다. 유다라고 모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듯이, 북이스라엘이 구원의 가능성에서 무조건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역사를 주관하신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은 표면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문제였다. 아하스가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대적들의 손에 넘기신 것이다. 아하스의 대적들을 사용하셔서 유다가 더 악한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지 통찰하는 지혜가 곧 영적으로 살길이다.
    
-아하스 한 사람의 삶이 유다 백성 모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가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기 때문이다. 아하스는 20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었고, 1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유다를 통치했지만, 시종일관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을 일삼았다. 이에 따라 아하스 개인뿐 아니라 유다 공동체 전체가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 나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 영적으로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유다 백성 20만을 포로로 끌고 돌아온다. 이에 오뎃 선지자는 그들을 막아서며 외친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와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패역한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 자신들도 역시 죄인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형제 법을 어기면서까지 교만한 승리감에 도취하지 말고 죄 가운데 여전히 머무는 자기들을 도구 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여 유다 백성을 포로가 아닌 형제로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일갈한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에 순종하여 유다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돌이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상황과 여건에 따라 구하는 해답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며 돌이키는 믿음이 삶을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도록 역사할 것이다.
    
    
    
*주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도 자에게 베푸시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붙잡고 겸손히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바른길을 걷겠습니다.
*주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로 받아들이며 제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문제의 자리에서 문제를 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잠시, 혹은 한두 번의 삶의 성공이나 승리에 취하기보다 제 삶을 돌보시는 긍휼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호함과 말씀에 대하여 최우선의 순종으로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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