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8:16-27 실패에서 실패로, 실패 다음이 문제다.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사람을 의지할 것인가?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에 이어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목을 곧게 한 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 즉 앗수르 왕에 도움을 청한다. 앗수르 왕은 오히려 그를 더 억압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하스는 우상숭배에 적극적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낮추심과 진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 앗수르를 의지한 아하스(16~21절)
아하스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의 침입은 아하스의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이 아하스를 이 두 나라의 손에 넘기셨다(5절). 연합군의 침략 결과로 유다는 큰 타격을 입었다(5~8절). 같은 사건을 기록하는 열왕기하 16:5~6과 이사야 7장은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특히 이사야는 아하스를 안심시키며, 북부의 두 왕국이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을 알린다(사 7:8) 또한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실 것을 징조로 알리고, 두 왕국이 앗수르의 세력에 무너질 것을 상세하게 예고한다(사 7:10:8:22).
그런데 이사야의 선포는 본문을 포함한 내용(5~8, 22절)과 상충한다. 같은 사건인데, 모순된 결말을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강조점(혹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열왕기와 이사야가 선언하는 연합군의 패배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거나 함락하지 못했음을 뜻한다(사 7:1; 왕하 16:5). 연합군의 침입 목적은 자신들과 동맹을 거절하고 앗수르와 손잡은 유다를 멸망시킴으로 보복하는 것이었으나 이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전쟁에 패한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유다에 끼친 피해는 엄청났다. 아람은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북이스라엘도 12만 명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또 열왕기에 따르면 아람이 아하스의 조부 웃시야가 유다에 귀속시켰던 에돔의 영토 엘롯(26:2)을 빼앗고, 그곳 유다 사람들을 쫓아냈다(왕하 16:6). 이처럼 열왕기와 이사야는 전쟁으로 연합군의 패배를 부각했고, 역대기는 그들에게 받은 피해가 막심했음을 언급한다.
두 왕국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벨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원조를 청한다. 두 나라에서 극심한 피해를 당한 아하스가 하나님이 아닌 이방 왕을 의지하여 더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가중될 것을 짐작게 한다. 북부의 두 왕을 보내 유다를 공격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남부의 이방인들을 보내 유다를 치게 하신다. 에돔이 다시 유다를 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이다. 이들은 아마샤의 침략 때 얻은 큰 손실을 복구하려 했을 것이다(25:11~12). 블레셋 사람들 또한 유다의 ‘평지(18절)’와 남방 성읍을 약탈한다. 이들은 웃시야가 블레셋의 주요 성읍의 성벽을 헐고 자신들의 성읍에 전초기지를 만들어 입힌 손해(26:6~7)를 만회하려고 했다. 블레셋은 평지(쉐팔라) 주요 골짜기와 성읍인 벧세메스, 아얄론, 그데롯, 소고, 딤나, 김소와 주변 마을들을 점령하고 거기에 거주한다. 웃시야가 애써 확장하고 방비한 남쪽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유다의 북부와 남부 지역 나라들의 공격은 하나님이 아하스로 인해 유다를 낮추신 결과였다. 그가 유다에서 망령되게 행하고 하나님께 크게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범죄하다(마알)”는 “불충실하다”, “임무에 어긋나게 행동하다”라는 뜻으로, 웃시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분향하려 했던 행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26:16, 18). 웃시야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나 아하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며, 다윗 왕조의 근간이 다시 흔들리게 하는 행위였다(7:17~18). 저자는 아하스의 죄악을 설명하면서 그를 의도적으로 ‘유다의 왕’이 아닌 ‘이스라엘의 왕(19절)’으로 칭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한” 아하스를 비꼬는 표현이다. 또, 이스라엘 왕이 ‘유다’에서 망령되게 행했다고 지적하여, 유다의 왕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죄악을 아하스가 자행한 것을 조롱한다.
한편, 아하스가 의지하려 했던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은 그를 “돕지 아니하고” “공격한다”(20절). 물론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이는 아하스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 유다까지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하나님은 이전에도 다메섹의 벤하닷을 의지한 아사(16:7)나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손을 잡은 여호사밧(19:2)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 외의 것을 의지하면 대가를 혹독히 치를 날이 오기 마련이다.
이제 앗수르는 다메섹을 공격하여 백성을 포로로 잡아 오고, 르신 왕을 죽임으로(왕하 16:9) 멸망시킨다(주전 734). 또한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욘, 하솔, 갈릴리, 납달리 등 온 땅을 취했고,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고 감으로써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앞당긴다(왕하 15:29). 아하스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성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털어 그에게 바쳤지만, 도움은 안 됐다. 16~21절 단락은 앗수르에 대한 아하스의 “도움” 요청으로 시작하여(16절), 앗수르가 아하스에게 “도움(유익)”이 되지 않았으므로 결론을 맺는다(21절).
2. 아하스의 배역(22~25절)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불충실했다. 이방인들의 공격으로 그가 곤고할 때조차, 하나님께 더욱 불충실했다(범죄하여, 22절). 더 기가 찬 것은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기까지 이른다. 그의 논리는 이 신들이 아람 왕을 도와 자신을 쳤으므로, 이제 자기도 그 신들에게 제사하여 자기를 돕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앗수르를 의지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경험했지만(21절), 이번에는 이방 신들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신들은 도움은커녕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23절).
23절은 아하스만 ‘이스라엘 왕(19절)’이 아니라 유다 백성도 ‘이스라엘’이 되었다(23절). 아하스는 성전의 기구들을 모으고 부순다. 요아스 때는 참으로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 즐거이 세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성전의 그릇들을 만들었지만(24:1~4), 아하스는 이방 왕과 거짓 신을 섬기느라 참 신을 버리고 만다. 그는 성전 문들을 닫고, 우상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만든다(왕하 16:14~16).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았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이방 신에게 분향했다. 이는 온 나라를 우상숭배의 터전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배역을 장려한 악한 행위였다.
아하스의 추가적인 악행은 열왕기하 16:10~18에 기록되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외면했고, 곤고함이 찾아올 때도 하나님을 찾거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악행은 여호와의 진노만 부추겼다.
3. 아하스의 통치 종결부(26~27절)
아하스의 통치 종결부 또한 그를 악한 왕으로 규정한다. 그의 남은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이 아닌 예루살렘 성에 안치되었다. 악한 여호람 왕을 열왕의 묘실이 아닌 다윗성에 안치한 것과 같은 조치다(21:20).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다윗 후손을 버리지 않고 이번에도 등불을 주신 것이다(21:7).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도, 징벌로도 깨닫지 못한 아하스 왕이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20만 백성이 무사 귀환했는데도 아하스는 정신 차리지 못한다. 앗수르에게 손을 내밀어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에 대응한다. 그는 당연히 받은 은혜를 헤아려야 했다. 자기 나라에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성찰해야 했다.
-은혜를 베풀어도 못 깨닫고, 시련을 겪어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 낮아지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계시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의미다.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되려 믿은 아하스 왕이었다. 앗수르를 선택한 것은 외교적으로(보통의 평범한 이치로) 잘한 일이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패착이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가 더 믿을만하게 보였겠지만 착각이었다. 당시 국제 정세 기준에서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믿음은 불필요했고, 계산만 필요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왜 앗수르는 믿었을까? 결국 앗수르는 유다를 배신하여 돕지 않았고, 많은 재물을 갖다 바쳤지만, 유다에게는 무익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누구에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그것이 정작 인생의 위기 순간에 되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무너뜨린다.
-아하스는 곤고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더욱 하나님께 범죄한다. 앗수르가 도움이 안 되니 이번에는 아람을 의지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놔두고 아람을 강하게 해준 아람 신을 더욱더 의지한 것이다. 아하스는 한술 더 떠 성전 기구를 부수고, 성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구석 우상 제단을 쌓아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 그는 심지어 주어서 왕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할 만큼 완악했다.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다. 아하스가 위기의 순간에 앗수르에게 바짝 붙어서 위기를 해결하고 성전, 왕국,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취해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보낸다. 그러나 결국 앗수르는 오히려 아하스를 공격했다. 우리가 오늘 의지하는 것들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 우리를 더욱 괴로움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수록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아하스가 성전을 훼파하고 예루살렘 곳곳에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 만약 아하스가 수많은 어려움을 통해 자신들 가운데 있는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했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것이다. 거듭되는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겸손히 자기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 되레 하나님과 남을 원망하고 있다면 속히 돌이켜야 한다. 지속되는 어려움은 나를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아닐까?
*죄를 돌이키도록 이끌어야지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고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멈추라.
*아하스는 결국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죽음과 무덤은 그가 살았던 인생을 평가한다. 또한 죽음 이후의 영원이 어떠할지를 암시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 위기를 만날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며, 잘못을 깨닫는 즉시 돌이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