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32:1-23 함께 싸우시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히스기야가 거국적인 유월절 행사를 치르고 성전 개혁을 단행할 시기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치러 올라와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는다. 이에 히스기야는 수로를 막고 성벽을 보수하여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그의 능력으로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산헤립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1. 앗수르의 침공, 히스기야의 대응(1~8절)
본문의 배경은 앗수르 산헤립(주전 705~681)의 유다 침공이다. 이 사건 속에서 히스기야의 하나님 신뢰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술한다(왕하 18:13~19:37; 사 36~37장). 이 일은 히스기야 통치 제14년(주전 701년), 모든 ‘충성된 일(29~31장)’ 후에 발생한다(1절).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지속되는 때에도 시련은 찾아온다. 이때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내면 ‘충성된 일’의 연장이 된다. 1절에서 산헤립이 유다의 요새 성읍들을 점령할 계획이라고 설명하지만, 열왕기의 기록은 그가 이미 다른 성읍들을 손에 넣었다고 나온다(왕하 18:13; 사 36:1). 실제, 앗수르의 기록에서는 산헤립이 이때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유다의 46개 성읍을 함락했음을 밝힌다. 산헤립은 블레셋 국경 부근인 라기스에 기지를 두고 예루살렘을 넘보고 있었다. 열왕기는 이때 히스기야가 산헤립에 항복하고 성전과 왕국 곳간의 은금을 바쳤다고 기록한다(왕하 18:14~16). 역대기는 이사야와 동일하게 이 내용은 생략하고 히스기야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하나님은 또 어떻게 예루살렘을 구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하여 방백들과 용사들과 의논하여 대응책을 마련한다. 첫째, 예루살렘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차단하여 앗수르 군대로 물을 얻지 못하게 했다(3~4절). 물 근원은 샘, 우물, 수로 등을 뜻한다. 이 일에 많은 백성이 동참했다. 그들은 모든 샘의 물과 땅으로 흘러가는 수로 등을 다 막았고,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지하 수로도 만들었다(30절). 이제 앗수르가 쳐들어와도 물을 얻을 수 없다.
둘째, 방비를 위한 건축 작업을 단행했다. 예루살렘 성벽은 아마샤 때 많이 헐렸고(25:23), 웃시야(26:9)와 요담(27:3)이 대부분 보수한다. 이번에는 그때 보수하지 못했거나 재보수가 필요한 곳을 보강했다. 또한 망대를 높이 쌓고 성벽에 벽을 한 겹 더 쌓았다(외성). 다윗이 쌓고 솔로몬이 중수한 말로 성(대상 11:4~8; 왕상 11:27)도 보강했다.
셋째,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군대 지휘관을 세워 실전에 대비했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히스기야는 군대 지휘관과 온 백성을 성문 광장에 모아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키며 위로했다.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는 권면(7절)은 여호수아를 위로하며 권하신 말씀이다(수 1:9).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앗수르와 함께하는 신보다 크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앗수르의 신은 인간의 팔처럼 나약하고 제한된 힘을 가졌으나,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시다. 전능한 왕이시므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도우시며 심지어 직접 싸워주실 것이다. 백성은 히스기야의 말에 안심한다. 백성의 이런 반응은 왕에 대한 깊은 신뢰와 단합을 나타낸다. 여기에 신뢰의 마음을 불어넣은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30:12).
2. 앗수르 왕의 연설과 신하들의 비방(9~19절)
마침내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그의 신하가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연설을 늘어놓는다. 산헤립은 유다를 완전히 항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라기스를 쳤다. 그러고는 그의 신하들(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과 대군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자기 말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달하게 시켰다(왕하 18:17). 랍사게의 연설과 산헤립의 편지는 열왕기에 세 차례 수록됐지만(왕하 18:19~25, 27~35; 19:9~13), 역대기는 연설과 편지 하나씩 간략하게 기록한다(10~15, 17절). 앗수르의 연설과 편지는 아비야의 연설처럼 심리적 교란 전술의 하나다(13:4~12). 히스기야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백성들로 하여금 앗수르에 항복하게 만들려는 계략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신하들은 당시 통용된 아람어가 아닌 유다 방언(히브리어)으로 말했다(18절).
10절부터는 산헤립이 보낸 사자들의 연설 내용을 소개한다. 산헤립의 연설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히스기야에게 불만을 품도록 하는 내용이다. 심복들은 히스기야가 백성을 속이고, 백성을 목마르게 하고, 결국 굶주려 죽게 할 것이라고 비난한다. 12절에서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에서만 제사 지내도록 하고 여호와의 산당들을 제거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을 꾀하려는 명백한 의도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정책에 불만과 위협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헤립은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심복들에 의해, 종교적 이단자로, 강제 노역을 통해 권력을 남용하는 자로, 백성들을 속이는 자로, 그리고 자기 신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자로 고발된다.
그러나 역대기는 히스기야의 중앙화 정책과 종교개혁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대하 30:14; 31:1), 산헤립의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입증한다.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10~11절), *제의의 중앙화를 추진한 자(12~13절), *여호와와 다른 신을 동일하게 여기지 아니한 자(13~14절)로 소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산헤립의 연설은 역대하 29~31장에 묘사된 히스기야의 긍정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기능을 한다.
16~19절은 산헤립 신하들이 비방에 동조하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여호와와 히스기야에게 대항하는 것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히스기야를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인물로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산헤립이 편지를 써서 여호와를 비방한다. 여호와도 다른 나라의 신들처럼 유다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17절). 산헤립의 신하들은 이 내용을 유다 방언으로 통역하여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한다(18절). 저자는 19절에서 이런 산헤립의 치명적인 실수를 경멸적으로 언급한다. 그들의 교만이 결국 그들의 패배로 이끌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통해 산헤립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시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보여주실 차례다.
역대기 문맥에서 산헤립의 침공은 히스기야의 신실함과 여호와의 유일성을 확증해 주는 도구로 사용된다.
3. 히스기야의 기도(20~23절)
앗수르의 비방에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으로 응답하신다. 이사야에게 산헤립이 풍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과 거기서 암살당할 것을 예고하신다(왕하 19:6~7). 또한 히스기야에게도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왕하 19:34).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은 한 천사를 보내, 산헤립의 진영에 있는 큰 용사들, 대장들, 지휘관들을 다 멸하신다(21절). 아침에 보니 죽은 자가 18만 5천 명이었다(왕하 19:35). 산헤립은 이 일로 수치스럽게(낯이 뜨거워) 고국으로 돌아간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의 백성을 멸하려고 한 자의 최후였다.
앗수르로 돌아간 산헤립은 니스룩 신전에서 경배할 때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일은 즉각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침공 후 약 2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주전 681년). 저자는 산헤립의 패배와 죽음을 같이 결합하여 이 두 사건이 산헤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부각한다. 하나님은 산헤립의 손에서 백성을 구원하심으로써 히스기야의 말(11절)이 옳고 산헤립의 말(13~17절)이 거짓 유혹이었음을 증명하셨다.
한편, 하나님은 앗수르에게서만 아니라 ‘다른 모두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구하셨다(22절).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백성을 사면으로 보호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백성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평소에도 그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의 전능함으로 앗수르를 물리치신 후 많은 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히스기야에게도 귀한 선물을 바친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과 히스기야의 일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이후로 히스기야는 모든 나라에서 높임을 받았다.
앗수르로부터의 건지심과 보호, 히스기야의 명성은 하나님에 대한 히스기야의 신뢰와 충성을 증명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확증해준다.
나는?
-히스기야는 온 백성과 함께 협력하여 시련에 맞섰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삼키고, 남 유다까지 종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백성들은 요동하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대비책을 마련하여 실행한다. 근본적으로 히스기야는 담대하게 앗수르의 신은 헛것이고 유다와 함께하는 신 여호와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며, 그분이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왕의 신앙에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화답한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가 떠오르지 않는가?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놀라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시련 앞에서 그의 진짜 믿음이 진가를 발휘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만 하지 않았고, 반대로 외부의 힘이나 내부의 군사력만 믿지도 않았다. 백성과 함께 성 밖의 물 근원을 차단하여 앗수르 군대가 물을 얻지 못하게 하였고 성벽을 쌓고 보수하기도 하였다. 무기를 만들고 지휘관을 세웠다. 이렇게 열심히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도리어 믿음에서 더 적극적인 지혜와 실천적인 준비가 나온다. 불신하였다면 주변 나라들만 의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유다가 아무리 준비해도 앗수르의 전략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대책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고 믿는 참믿음 아니겠는가!
-한편, 산헤립이 백성들에게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 자기들 승리의 역사를 내세우고,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촉구한다. 유다 방언으로 말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한다. 죽은 신들을 믿는 자들이 산 신을 믿는 유다를 향하여 헛소리를 남발한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진실로 들릴 수 있지만, 하늘의 하나님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공갈로 들릴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엄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의 헛소리에 놀라고 두려워하여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함께 의논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히스기야는 백성과 함께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지킬 뿐 아니라, 방백들,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며 대책을 세운다. 그 결과, 물 근원을 막아 적이 마시지 못하게 하자는 묘안이 나온다(1~4절). 히스기야는 일방적으로 계획하고 지시하는 대신 함께 의논했고 백성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누구와 함께, 어떤 모습으로 더온누리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자연스럽고 적극적인 소통과 신뢰를 통해 세상 속에 굳건히 서 있는 더온누리 공동체를 세워 가리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당장 눈앞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도무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토록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던 히스기야에게, 그것도 충성을 다한 후에 들이닥치는 전란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기에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봐야 사람의 팔이고, 사람의 군대에 불과한 것이었다. 히스기야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다(5~8절). 보이는 문제만 주시하면 불안이 가중되지만, 보이지 않아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안심이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문제인가? 하나님인가?
*준비는 믿음의 결여가 아닌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침략에 맞서 백성들을 말로 독려하는 한편, 전투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한다(9~15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내가 지금 더온누리 공동체를 감당하며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더욱 힘써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분이다. 산헤립은 사신을 보내 온갖 교묘한 말로 히스기야와 백성을 이간질하고 두렵게 한다. 모든 신이 앗수르 앞에서 무릎을 꿇었거늘 여호와만이 예외일 수 없다(16~19절)고 망언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하나님은 그가 지금까지 싸웠던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 사람을 만든 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조롱한 산헤립이 조롱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산헤립의 위협에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한 천사로도 수십만 대군을 맞설 수 있음을 믿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를 보내 산헤립의 군대를 멸하신다.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산헤립을 그의 아들들을 통해 심판하신다. 하나님께 겸비하여 부르짖는 심령을 결국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다.
*살다 보면 위기를 만나기 마련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도, 때로 하나님의 부재를 의심할 만큼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본문에서 그러한 때,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헤쳐 나가야 할지를 깨닫게 한다. 먼저 소통하며 지혜를 모아 대책을 세우는 것을 본다. 공동체가 주는 유익이 이것이다. 영적으로 곤고하고 당황스러울 때 목장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영적인 소통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또한 소통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모아 함께 타개해 나가려는 움직임도 함께 일어난다. 하나님과 소통할수록, 믿음의 공동체와 소통할수록 철저한 대비라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는 믿음의 결여가 아닌 힘써 소통하며 구한 합당한 반응이자,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생각나게 하고 깨우쳐 주셔서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신다.
*그런데 세상은 늘 분열을 획책하여 희롱하고 조롱한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거짓을 서슴없이 풀어놓는다. 공동체를 와해하고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악한 행위들이다. 지각과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런 거짓에 속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와 거짓을 냉철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의 어려움이 많아질수록 형제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는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열거나 마음을 쓰면 안 된다. 험담에 호응해서도 안 된다. 위기는 들리는 온갖 잡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공동체를 신뢰하며 극복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하시며 싸우신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주님, 끝까지 진리 되신 주님을 신뢰합니다. 세상의 헛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형제 신뢰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