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35:20-27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
하나님은 때로 악인과 대적을 통해서도 그의 뜻을 밝히신다. 종교개혁과 유월절 행사를 마친 후 요시야는 애굽의 바로 느고가 갈그미스로 출정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므깃도로 출정한다. 느고는 요시야가 자신의 전투 목표가 아님을 밝히며 물러서라고 종용한다. 하나님께서 느고를 통해 요시야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 전투를 강행하고, 결국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유다의 멸망을 보지 않고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저자는 요시야가 죽은 이유를 느고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요시야가 어겼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요시야왕은 예루살렘에 있는 왕들의 묘실에 장사 되고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1. 요시야의 죽음(20~25절)
요시야 통치 기록의 마지막으로, 20~25절 단락은 그의 마지막 해인 제31년(주전 609년)에 일어난 므깃도 전투와 그의 죽음을 서술한다. 그전에 일어났던 요시야 재위 제12년과 제18년의 여러 신앙 개혁 운동(34:3~35:19)은 20절에서 “이 모든 일”과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한 일”로 요약될 뿐, 그때로부터 13년이 지나는 동안 일어난 일이나 개혁에 대한 중간보고는 없다. 이 상황에서 애굽의 느고 2세(주전 610~595년)의 출정 기록은 요시야의 통치 기록에서 갑작스러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이런 전환, 특히 선한 업적에서 군사적 충돌로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기록 방식은 앞서 아사나 여호사밧, 히스기야의 기록에서도 나타났다.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며 영적 개혁의 선봉자였으나, 위기 상황에 맞닥뜨려 그들의 신앙과 생명이 위태해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특히 히스기야 때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라는 소개와 함께 영적 개혁에서 산헤립의 침공으로 전개되는 유사한 형식이 나타났다(32:1). 본문에서 느고가 갈그미스에 올라가는 목적은 갈그미스를 “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와 함께 바벨론에 맞서 싸우기 위함이었다. 이 시점에서 3년 전(주전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었다. 니느웨의 함락은 선지자 나훔을 통해 이미 예고 되었으며(나 2:6), 실제 갈대아인 나보폴라살(주전 626~605년)과 메대의 연합군이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애굽과 바벨론은 아람과 가나안 지역을 제패하려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당시 앗수르인들은 니느웨가 함락되자 하란에서 다시 세력을 모았다. 이때 애굽의 느고가 하란에 남은 앗수르 군대와 동맹을 맺고 갈그미스로 올라가 바벨론 군대와 싸울 계획을 세웠다. 본문의 배경이 바로 이때다.
갈그미스는 이스라엘의 북서쪽, 유브라데 강 상류에 위치하여 애굽, 아람, 메소포타미아를 왕래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데 느고가 갈그미스로 올라가고 있을 때, 그 길목 므깃도에서 요시야가 애굽에 대항하여 나갔다(20절, ‘나가서 방비하였더라’로 번역됨). 느고는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 이 전투의상대는 요시야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21절), 즉 바벨론임을 밝혔다. 그는 요시야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 일을 서두르라고 명했으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고 주장한다. 이방 왕이 상대방 신을 운운하며 대적을 위협하는 일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왕하 18:25).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이방 사람이나 특수한 환경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알리시기도 한다(9:8; 창 20:3; 민 22:28~33; 단 4:10~17). 하나님을 거슬러 이 일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요시야를 멸할 수 있다는 느고의 말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이었다(22절).
하지만 요시야는 느고에게서 돌아서지 않는다.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러 갔다. 요시야가 느고에게서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할 수 없으나, 느고에 대한 적대감이나 바벨론의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시야는 이 상황에서 느고를 대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전투를 강행한 요시야는 궁수가 쏜 화살에 맞아 다쳤다. 그는 신하에게 ‘큰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데리고 나가라(23절)’고 명한다. 부하들에 의해 다른 병거에 옮겨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어 조상들의 묘실에 안치될 수 있었다(24절).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열왕기와 역대기가 서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역대기의 서술에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4:38).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요시야가 위기를 맞아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에 대한 그의 헌신과 선한 업적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요시야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큰 슬픔이 되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슬퍼했다(24절)”라고 기록하며, 그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군주였음을 나타낸다. 당대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그를 위해 애도가를 지었고, 노래하는 남녀들도 비가(悲歌)로 그를 추모했다. 이들의 말들이 애도가에서 기록되고 이스라엘의 규례가 될 만큼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게 여겨졌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푸셨다. 또한 이 일은 요시야가 하나님이 유다에게 내리실 더 참혹한 멸망을 보지 않고 평안히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34:28)을 이루었다.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고, 주권자 하나님께 삶을 맡길 수 있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유다는 신속하게 멸망의 길을 걷는다. 느고에게 패한 유다는 애굽의 속국이 된다. 애굽은 므깃도 전투 4년 후(주전 605년), 앗수르 군대와 함께 갈그미스로 올라가 계획대로 바벨론 왕의 후계자 느부갓네살에 맞섰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느고는, 이 전쟁에서 바벨론에게 패하고 만다(렘 46:2). 앗수르는 실질적으로 패망하고 유다 외의 팔레스타인 지역이 모두 바벨론의 손에 넘어간다. 나보폴라살에 이어 바벨론의 두 번째 왕이 된 느부갓네살(주전 605~562년)은 애굽에 승리를 거둔 후 유다를 압박한다. 4~5년 후 애굽은 다시 바벨론을 공격하여 싸움에서 이긴다. 이때 유다는 바벨론을 배신하고, 이러한 유다의 배신은 결국 바벨론의 침입을 불러와, 결국 멸망하고 만다(주전 586년).
2. 요시야 통치 종결부(26~27절)
요시야의 통치 종결부는 히스기야 때처럼 그의 “선한 일”을 언급한다(26절; 32:32). “선한 일(헤세드)”은 “은혜, 인애, 충성”을 뜻한다. 요시야의 선한 일은 대표적으로 34:3~35:19에 기록된 신앙 개혁을 가리킨다. 저자는 그의 선한 일이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따른 것임을 부가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찾고 그의 말씀에서 좌우로 벗어나지 않았던 요시야의 순종과 헌신(34:2~3)을 부각한다.
요시야의 행적은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었다.
나는?
-하나님은 애굽 왕 느고를 통해서 자기 뜻을 요시야에게 알리신다. 이방 왕의 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물론 그 말이 자기 말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책임이기에 쉽지 않다. 앗수르의 산헤립도 자신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신학적인 정당성을 추구하였으나 그것은 헛된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욕망을 해석하고 읽는 일이 내 바깥의 말을 해석하는 것보다 앞서야 하지 않겠는가!
-신실한 요시야에게도 고난이 다가왔다. 그는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온전하게 지켰다. 정치도 개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후에 평화가 축복이 아닌 전쟁과 죽임이 다가온 것이다(20절). 신실해도 고난을 만날 수 있다. 고난 속에서 여전히 신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원수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21절). 하나님은 나귀(민 22:28)를 통해서도 일깨우시는 분이시다. 본문을 통해서 본다면 의로운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의 말을 듣더라도 그 말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적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요시야의 문제는 애굽의 전력을 얕잡아 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결정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변장하고 아무리 맹렬하게 싸우고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은 없다.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았다(22~25절). 그의 죽음은 악한 왕 아합과 흡사했다. “경고를 무시했고(22절; 18:16), 변장했으며(22절; 18:29), 적의 화살(23절; 18:33~34)에 맞았다. 심지어 상처를 입었을 때의 말도 비슷하다(23절; 18:33). 요시야라도 과거에 쌓은 공적과 상관없이 징계를 받는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오늘의 말씀으로 내일까지 살려고 하지 않는가?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영적 분별력이 무디어지지 않는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왕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온 나라가 애도할 만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의로운 왕도 불순종하면 벌을 받을 수 있음을 그가 39세로 요절한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요절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거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의 이른 죽음과 명예로운 죽음은 유다의 참담한 미래를 생각하면 차라리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인생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말씀”이다. 이 기준으로 본 요시야는 말씀대로 믿었고, 말씀대로 살았다. 이는 성도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나의 생을 마무리할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평가를 받으면 참 좋겠다. 혹 지금처럼 살면 과연 나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스스로 돌아볼 수도 있어야 하리라.
*주님, 한때의 말씀 따라 살아내는 은혜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은혜를 사모하고 덧입어 순종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더라도 불순종하면 심판받을 수 있음을 알고 늘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