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9:1-8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상황을 직면한 에스라
에스라의 회고록의 종결 부분이다. 공동체 내의 범죄(이방인들과의 통혼)를 다룬다. 에스라가 경험한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다. 새롭게 시작한 귀환 공동체는 구별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9~10장은 에스라를 통한 공동체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다. 개혁이 내용은 정체성 확립과 율법 중심의 삶이다. 전체 단락은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의 시작(9:1~2)으로 시작해서 문제의 해결(10:7~44)로 끝난다.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다. 에스라는 이들의 행동을 “마알”의 범죄로 규정하는데, “마알”이라는 용어는 9~10장 전체 단락에서 다섯 번이나 등장한다(9:2, 4; 10:2, 6, 10). ‘마알’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혹은 언약적인 범죄로, 이것은 에스라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1. 잡혼 문제에 관한 방백들의 보고(1~2절)
‘이 일 후에”라는 부사구는 에스라서에서 새로운 단락을 알리는 표지 기능을 한다. 예루살렘 귀환 후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추측된다. 에스라는 방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그 땅의 백성들’ 사이의 통혼에 관한 보고를 듣는다(1a절). 에스라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이 일에 지도자들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 햇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 여부스 사람들, 암몬 사람들, 모압 사람들, 애굽 사람들, 아모리 사람들’이다(1b절).
그런데 문제는 이 족속들 가운데 상당수가 에스라 시대에 더 이상 그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이 가나안 족속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신명기 율법과 연관시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율법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족속)과의 혼인을 금하는 것이 강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신 7:1~5; 23:3~7).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에스라가 귀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을 모세 시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둔 상황과 유사하게 해석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과거 역사의 아픔, 즉 이방인들과의 결혼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관련된다. 특히 1절에서 애굽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솔로몬의 잘못된 결혼 정책을 염두에 둔 것 같다(왕상 11:1). 한편,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귀환민들의 정체성(“거룩한 자손”)과 관련된다(2절). 이것은 에스라와 방백들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참고, 출 19:6; 신 14:2, 19). 거룩한 백성인 귀환 공동체가 부정한 이방 족속과의 통혼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에스라의 반응과 기도(3~8절)
이 보고를 들은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뜯는 반응을 보인다(3절). 옷을 찢는 행동은 애통함의 표시이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는 것은 극도의 진노를 표현하는 행동이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동안 기가 막혀 앉아 있게 된다(3b절). 에스라가 이런 반을 보인 이유는 과거 선조들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여 배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게 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7절). 에스라는 지금 귀환 공동체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징계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들”이다(4a절). 이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을 지칭한다(참고, 10:3; 사 66:2, 5). 에스라는 저녁 제사 지낼 때(오후 3시)까지 옷을 찢은 상태로 앉아 있다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한다(5절).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과 간절함의 자세이고, 손을 드는 것은 탄원과 중보의 몸짓이었다.
6~7절은 에스라의 기도 내용이다. 공동체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기도의 전형으로, 그의 기도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성경의 다른 기도와 비교할 때, 에스라의 기도는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의 기도는 네러티브(narrative) 양식을 취하고 있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만 향하지 않고, 백성들이 듣고 회개하도록 하는 설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흔히 “설교-기도”라고 불린다.
에스라는 이 설교 기도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 에스라는 먼저 백성들의 죄를 고백한다(6~7절), 반복적으로 ‘우리’ 혹은 ‘우리의 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지도자 에스라의 마음이 보인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실제로도 이들의 죄와 무관하다. 그러나 에스라는 자신을 공동체와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한다. 이 모습은 광야 시대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에스라는 기도 가운데 백성들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나열한다(7절:’왕들의 손에 넘기며’,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8절은 죄의 고백에 이어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아본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펠레타)”를 남겨두어 생존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귀환민들에게 성전의 회복을 허락하시고 인정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하셨다(‘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눈을 밝게 하시고, 생기를 회복해 주셨다. “눈을 밝게 하셨다”는 것은 암흑과 같은 포로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가리킨다.
고레스 칙령으로 큰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 공동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주위 문화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스라는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조처를 한다. 주의할 것은 이방인과의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격한 반응은 당시 공동체가 처했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넉 달 만에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듣는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여인들과 혼합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가증한 일을 꾸짖고 경계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도 참여하고 있었으며, 특히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성전 지을 일념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자원하여 귀환한 자들이고, 성전을 지어 올린 사람들인데…. 그때의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잠시 평안하다고 그새 하나님을 저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동화되어 세속화되고 말았다.
-건물 성전은 여전했지만, 사람 성전이 벌써 무너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직면하게 할 언약적 범죄였지만, 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지도자들의 무딤이 더욱 상황을 악화시켰다. 말씀이 없는 지도자들의 안일과 무지와 방종은 악을 허용하고, 죄의 심각성을 무디게 만든다. 신앙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타협과 합리화라는 아주 작은 틈이다. 그 틈이 ‘사달’을 불러온다.
-에스라는 그다지도 쉽게 은혜를 저버리고 패역의 길로 돌아간 백성들 소식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성전 없이 이방 땅에서 서러운 시절을 보내던 때가 얼마 전인데, 그새 치욕도, 회복의 은총도 잊어버린 백성들의 행동에 기가 막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아픔으로 여긴 이가 에스라 혼자만은 아니었다. 타민족 간의 결혼을 금하는 하나님의 말씀(출 34:11~16; 신 7:3)을 기억하고 두려워 떠는 자들이 있었다. 여전히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개혁을 도모하고자 찾아왔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떠날 때 기억도 떠나고, 은혜도 떠나며, 분별력도 떠나간다. 영적으로 부끄러움을 잃을 때, 하나님도 잃을 수 있다. 주님의 사람이 절망 가운데서도 힘을 얻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역자를 만날 때다. 디모데와 같은 신앙 동지를 구하고 얻을 때가 지금, 이 시대가 아닐까?
-헌데 정작 가증한 일을 하는 이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자신이 한 일도 아님에도 에스라는 얼굴을 못 들 만큼 부끄러웠다. 운명 공동체인 이 백성이 조상들이 부끄러움을 당했던 때와 똑같이 그 악행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가 손상되는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길 줄 아는 민감한 영혼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할 때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은혜를 저버리고 베푼 덕을 잊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방 결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또다시 받은 은혜에 대해 배역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에스라의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뜯는 참담함이 주님의 은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반하는 세태 앞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내 믿음의 삶이 그런 배은망덕을 따라가지 않아야 하리라.
*주님, 어느새 스며든 세상 가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도록 세상 방법을 따르는 모습을 분별하여 경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