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9:9-15 에스라의 통렬한 기도
계속되는 에스라의 기도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 즉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에 의지하여 진행된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한다. 기도 가운데 등장하는 출애굽 모티브는 포로지에서의 귀환을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방 사람과의 결혼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성경 안에는 족장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이 이방 사람과 결혼한 예들이 많다(창 16:3; 41:45; 출 2:21; 민 12:1; 삼하 3:3 등등). 또 이방 여인 가운데 신앙의 영웅들도 상당수 등장한다. 예컨대, 가나안의 기생 라합(수 2장), 모압 여인 룻(룻 1장), 그리스 사람 악사(삿 1:12) 등이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과의 결혼 관계는 종교적 타락이나 혼합주의에 빠지게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율법이 이방 민족과의 결혼을 금하는 것(출 34:11~16; 신 7:1~4)은 결혼 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이방 문화와 종교의 영향 때문이다. 즉 이방 민족과의 통혼 금지는 신앙의 순수성과 이스라엘의 정체성 보존 차원에서 에스라 시대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한다.
본문은 에스라 회고록의 종결 부분으로 에스라가 드린 기도(6~15절)다. 에스라의 기도는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첫째, 공동체와의 연합이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한다. 둘째, 죄에 대한 고백이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귀환 공동체의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셋째, 변화를 추구하는 결단이다.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한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주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에스라의 기도는 공동체 지도자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이다.
1.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9절)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본다. 문맥상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귀환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시다)의 지원으로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고, 대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인데, 백성들이 그러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2.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백성들의 죄(10~14절)
에스라는 현재 귀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한 후에 곧바로 현세대의 신실하지 못함을 언급한다. 에스라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백성들의 배은망덕을 드러내고자 한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한다(10절).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율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 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11절). 이 내용은 오경과 선지서 말씀의 광범위한 인용이다(신 7:1; 레 20:21; 겔 7:19~20; 왕하 16:3; 21:2 등).
구약은 이방 민족들이 거주하는 땅은 ‘더러운(부정한)’ 땅이며, 그들의 행실은 가증한 행실이라고 말한다. ‘더러운(니다)’은 주로 제의적 불결과 그로 인한 오염을 가리킨다(레 20:21; 겔 7:19~20). ‘가증하다(토에바)’는 이방 백성의 우상숭배나 성적으로 타락한 문화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된다(레 18:22~30; 20:23; 신 13:14; 22:5).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귀환민들이 철저하게 부정한 것과 행실을 멀리해야 함을(2절) 강조한 것이다.
에스라는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한다(12a절, ‘그런즉’).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촉구하는 결단은 두 가지다. 이방 민족들과 통혼을 금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 평화와 행복을 구하지 않는 것(12a절)이다. ‘그들을 위해 평화와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신명기의 저주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신 23:6). 이어서 율법 규정(통혼 금지)을 지킴으로써 주어지게 될 축복을 약속한다(12b절). 12절은 11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들이다(레 18:24~26; 20:22; 신 7:3; 11:8~9; 왕하 16:3; 21:2; 겔 37:25; 말 2:10~16). 에스라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 귀환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한다.
13~14절에서 에스라는 먼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 주셨다고 고백한다(13절). 여기서 “남겨주셨다”는 표현은 8절의 “남은 자”를 염두에 둔 말이다. 에스라는 회복된 이스라엘(남은 자들)은 유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구별할 책임이 있고,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14절). 이어 에스라는 ‘남은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들은 가증한 민족이기에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다.
3.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15절).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혹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임을 드러낸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때로 그의 백성을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15절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이다.
나는?
-은혜에 합당한 소명으로 살지 않고 이방에 동화되어 죄를 범하다가 이방 땅에 끌려온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참한 종살이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소생케 하셨다. 그 은혜를 “우리 하나님이 … 버리지 않으시고 … 소생시켜 …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 수리하게 하시며 … 울타리를 주셨다”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아픈 기억도, 넘치는 은혜도 잊었다. 잠시의 안락과 평안이 불순종으로 이끌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은혜를 헤아리지 않는 어리석은 망각에서 비롯된다.
-지금 내게 있는 것 중에 당연하고 마땅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가져간 것 서운하게 여기고 더 가지려고 안달하기보다,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 잘 나누고 누리는 인생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받은 형벌은 우리가 범한 죄악보다 더 가볍다. 우리가 의로워서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 따라서 죄지은 대로 멸하셨더라도 그 심판은 의로우셨을 것이다.
-에스라는 자신이 이 범죄 사실을 알 때까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여태 심판하지 않으신 것은 한 번 더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라고 믿고 기도한 것이다. 영적 갱신은 언제 시작해도 빠르지 않다.
-다 멸하지 않고 남겨 주신 큰 은혜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아듣게 분명히 알려주셨는데도 못 들은 척, 못 알아듣는 척 태연하게 가증한 짓을 자행했다. 그것도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앞장설 만큼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에스라는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떳떳이 설 자가 하나도 없다. 우리 과거를 감춰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리고 말씀도 기리며 살게 된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지기 자랑에 열중하는 시대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의식하며 사는 성도가 살아있는 성도다.
*주님, 어떤 환경에 직면하고, 죄악에 덮여도 하나님의 긍휼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