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2:1-9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본문은 학개가 전달한 네 개의 예언 중 두 번째 예언이다. 과거의 솔로몬 성전과 현재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위용을 비교하는 백성들을 향해 이 성전의 영광이 더욱 클 것임을 설명함으로써 성전 재건 역사를 힘차게 해나가도록 권면한다. 핵심 메시지는 4절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이며, 열방의 보배가 이 성전에 이르게 한다는 7절의 예언을 주목해야 한다.
1. 두 번째 예언의 배경과 상황 설명(1~3절)
본문은 학개가 전했던 네 개의 예언들 가운데 두 번째 예언이다. 첫 번째 예언은 다리오 왕 여섯째 달 초하루에 선포되었고,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은 백성들은 1:15에 밝힌 것처럼 여섯째 달 이십사 일에 성전 재건 건축을 재개했다. 두 번째 예언은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후인 일곱째 달 이십일일에 주어졌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한 직후 주어진 예언인 것이다. 아마 첫 한 달 동안 포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은 16년 동안 중단했던 성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며 살펴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 내용이 2~3절에 나타나게 된다.
2~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에게 스룹바벨,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자 공동체인 포로귀환자들에게 예언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남은 자들 중에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자가 있느냐”고 물으신 후, “너희가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하신다. “어떻게 보느냐”로 번역된 원문을 직역하면 “이것을 너희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된다. 귀환 공동체가 제건하고 있는 성전을 그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는지를 매우 직설적인 방법으로 물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그들의 생각하는 바는 “너희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냐”였다. 솔로몬이 건축했던 화려한 성전과 비교했을 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남은 자 공동체가 짓는 성전은 사실상 너무 초라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함축되었을 것이다. 먼저 솔로몬 때의 부강한 재력으로 솔로몬 성전이 화려하게 지어진 데 비해 포로귀환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식민지 백성이었기에 성전이 초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았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열왕기상 8:10~11을 통해 솔로몬의 성전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구름이 꽉 찬 성전을 보며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함을 알 수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3절에서 사용되는 것은 백성들이 성전 재건이 시작되었으나 최종 완공까지 가능할 것인지 염려하는 마음이 가득한 상태의 표현으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4~5절)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또 한 가지 약속을 허락해 주신다. 4절에서 하나님은 먼저 “강하게 하라”는 말씀을 세 번 선포하신다. 먼저 스룹바벨에게, 그 후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백성들에게 차례로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모두에게 자신의 산앙을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각각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굳건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맥을 따라 정리해보면, 먼저 3절의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4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학개 1:3에서 이미 선포된 말씀이지만 한 번 더 말씀하신 것이다. 첫 번 째 예언 때 ‘내가 너희와 함께한다’는 것은 성전이 완공될 수 있음을 약속해 주신 의미가 있다면, 두 번째 예언 때 동일한 메시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되었을 때 그 약속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5절에서 언급한 “출애굽 사건”이 힌트다.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및 하나님의 영이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동일하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5절의 “말(다바르)”은 “말씀”이라는 뜻이다. 열 개의 다바르는 곧 열 개의 계명들 즉, 십계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백성들과 언약하신 “말”이란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주신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타당하다.
출애굽기에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했던 과정을 살펴보면,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맺자고 제의하시고, 20~23장에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설명해 주신 후에 24장에서 그 율법을 따를 것을 백성이 동의하여 언약을 체결한다. 이런 흐름으로 보면 율법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리였기에, “구원받은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특히 울애굽기 19:5~6에 보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알려주신 바 있다. “모든 나라의 보배가 성전을 향해 나온다(7절)”는 언급은 이러한 시내산 언약의 성취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란 출애굽기 31:3에서 성막을 지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셔서 지혜를 주심으로 성막을 짓게 하신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즉 출애굽 때의 언약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지금 포로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들을 언약 백성으로 여기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지혜를 주셔서, 출애굽 당시 성막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설하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성전을 완공하게 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포로귀환 공동체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이 분명하다.
3. 나중 영광에 대한 약속(6~9절)
6절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흔드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현 현상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뜻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구름이 임하게 된다. 이런 “흔드심”은 7절에서 “모든 나라를 흔드심”으로 발전한다. 모든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행하셔서 그 모든 나라의 보배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즉 지금 포로귀환 공동체가 건설하려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초라한 성전에 도달하여 그 성전을 충만하게 채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나라의 보배”는 무엇일까? 문맥상으로 열방이 소유한 귀중한 보물로 해석할 수 있겠고, 열방이 원하며 사모하는 어떤 대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배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게 됨으로 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하다. 8절에서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보배와 영광은 매우 존귀하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9절은 두 번째 예언의 결론이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다”는 것이다. 이전 영광이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말하고, 나중 영광이란 지금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기초적인 의미는 성전 건물의 외적인 화려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것이므로 솔로몬 성전을 가득 채웠던 하나님 임재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난 어떤 하나님의 임재가 이 성전에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모든 나라의 보배와 더 뛰어난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되심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나라의 보배란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 사건으로 드러났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성전에 임재하신 수준이 아니라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9절의 “나중 영광”은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마음을 이러한 미래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을 통해 위로하셨고 권면하셨다. 백성들은 이 말씀에 힘입어 눈에 보이는 연약한 현실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계속해서 수행해나갈 수 있었다.
나는?
-겉모습의 초라함만으로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다. 장엄한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잊지 못한 이들은 평범하게 재건되는 성전에 실망했다. 그들의 한숨은 겨우 시작된 재건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보잘것없는 현실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공동체’의 재건이란느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떠한가? 우리 공동체는 어떨까?
-집이 아니라 여호와를 바라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아야 하는 것이 그들이 짓고 있는 보잘것없는 ‘집’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라고 하신다. 그들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완성된 전이 아니라, 출애굽 할 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며 지금도 그들 가운데 상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라한 전을 완성한 후에 맞을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미래를 상상하느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굳세게 하라고 격려하신다. 내가 가진 조건만 보고 내 미래를 제한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미미한 우리를 통해 여실 미래를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있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
-초라한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가실 미래를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조금 후에” 천지와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고, 하나님은 은금의 주인이시니, 모든 나라의 보배가 나무로 지어진 초라한 성전에 집결되며, 이 성전이 영광으로 가득 차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 평범한 전에서 맞이할 나중 영광을 솔로몬의 화려한 전이 누린 이전 영광보다 크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친히 장막ㅇ르 치신 그리스도(요 1:14)와 그분의 구속을 통해 열방의 백성을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는 역사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나아가 만국의 영광과 존귀가 어린 양께 모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계 21:22~27) 완성될 것이다.
-누구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궁극적인 의미와 결국을 다 알 수는 없다. 순종의 신앙은 ‘조금 후(7절)”의 일도 모르는 내 한계를 인정할 뿐 아니라 “조금 후”에 내 상상을 뛰어넘는 변혁을 창조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이다. 이것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성전을 은과 금으로 장식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참 보배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을 충만케 하셨다. 성전된 나는 무엇으로 지금 여기를 빛내고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빛 밖에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없다.
*주님, 나의 참 보배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나의 유일한 영광되신 그리스도 안에 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