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13:1-14 느헤미야의 개혁 1
본 장은 느헤미야의 추가적인 개혁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 건설에 헌신했다. 잠시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 두 번째 개혁을 추진하는데, 첫 번째 개혁(느 5장)이 주로 경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두 번째 개혁은 공동체 내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1. 공동체 정체성 확립(1~9절)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재위 20년에서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다. 12년이 지나자,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약속한 대로(2:6)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이후 왕의 허락을 받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6절).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머문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약 2~3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신의 부재 기간 중 공동체 안에 우려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건이었다(참조, 스 9:2).
이에 느헤미야는 곧바로 자신의 두 번째 임기의 개혁을 추진한다. 첫 번째로는 귀환 공동체로부터 섞인 무리를 분리하는 일이었다(1~3절). 1절의 ‘그날’은 13:4~7에 나와 있는 대로, 느헤미야가 다시 유다 총독으로 귀환한 후,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는 백성을 불러 모아 모세의 율법을 듣게 한다(1a절). 낭독한 본문은 이방 민족과의 관계를 다루는 신명기 23:3~5로, 이 규정에 따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총회’는 제의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모임에 암몬, 모압 사람을 배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행진을 막았기 때문이다(민 22~25장).
낭독한 율법의 말씀을 듣자 그 자리에 참석한 백성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섞인 무리’를 회중으로부터 분리한다(3절). ‘섞인 무리’는 당시 유다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주변 국가 사람들이거나 이방인과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스 9:2). ‘섞인 무리를 분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추측하기로는 이방인들을 ‘거룩한 성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모습은 느헤미야의 관심이 귀환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느헤미야는 본격적으로 공동체 개혁 작업에 착수한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또 하나의 문제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잘못으로 인한 성전의 오염이다(4~7절). 당시 제사장 엘리아십이 친밀한 관계를 맺은 도비야를 위해 성전 안에 큰 방(곳간)을 마련해 둔 것이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도비야는 당시 몇몇 유다 지도자들과 결혼 관계를 통해서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맺고 있었다(6:17~18).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사이 그는 성전의 한 방에 살면서 성전 곳간을 사적 용도로 사용했다(5절). 이 방은 백성들이 바친 제물, 십일조, 거제물들을 저장해두는 장소, 즉 성전 곳간이었다(4~5절). 추측하기로 도비야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 방을 쓰고 있었고, 엘리아십은 그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시점이 자신이 페르시아에 잠시 머물러 있었던 때임을 밝힌다(아닥사스다 왕 32년/주전 433년). 느헤미야는 12년(주전 445~433)의 예루살렘 사역을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청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다. 엘리아십과 도비야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거나, 그의 귀국 시점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해 한 일을 들은 느헤미야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8a절). 도비야의 행태는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사장은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에 엘리아십의 이런 행동은 큰 분노를 자아낼 만했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도비야의 가구들을 모두 밖으로 내던지고, 그 방들을 정화한다(8~9a절). 그리고 원래 있었던 성전의 기물들과 제물들을 다시 그곳으로 들여놓는다(9b절).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자 거룩한 처소인 성전을 다시 정결하게 한다.
2. 레위인에 대한 배려(십일조_10~14절).
느헤미야의 두 번째 개혁은 제의 종사자의 처우 개선에 대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도비야가 어떻게 성전 곳간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한다(10a절). 그 결과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십일조와 거제물들을 내지 않아 성전 곳간이 비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문제는 당연히 성전에 거주해야 할 성전 종사자들이 성전에 머물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레위인들과 성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10b절).
이에 느헤미야는 관리들(민장들)을 불러 그들이 해야 할 책임(성전 운영)을 다하지 못한 것을 꾸짖는다(11a절). 이후 백성들이 가져온 곡식, 포도주, 기름의 십일조가 다시 곳간에 채워지게 된다(12절). 느헤미야는 십일조에 관한 규정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제의가 올바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레위인을 비롯한 제의 종사자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했던 메시지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말 3:8~10).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백성들을 올바로 지도하지 못한 관리들의 책임을 묻는다. 그들은 얼마 전에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참조, 느 9:38; 10:14~29, 35, 37, 39)’고 약속했던 사람들이었다.
지도자들의 임무 태만을 책망한 후에 이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구체적인 조처를 한다. 먼저 레위인들을 불러 모아 자신들의 위치(성전의 일)로 돌아가도록 한다(11b절). 그다음으로 ‘충직한 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중 네 사람을 지명하여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감독하도록 한다(13절). 이들의 직무는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인 곡식과 십일조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다(13c절).
끝으로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14a절). 느헤미야가 잊지 말아달라(‘도말하지 마옵소서’)고 한 ‘선한 일’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충성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낸다. 결국 느헤미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성전에 관한 관심으로, 성전에 관한 관심은 하나님의 종들(제의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로 표현된 것이다.
나는?
-모압과 암몬인과 섞여 살며 그들 삶의 방식을 용인하던 백성이 율법책(신 23:3~6)이 낭독되자 잘못을 깨닫고, 신속히 그들을 성회에서 배제했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문제를 언제든지 분별하여 바로잡을 수 있지만, 말씀과 상관없는 삶은 언제든지 이방인과 다름없게 되어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내 영혼이 살고 죽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며, 결코 신앙의 장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엘리아십은 핵심적인 대적자 도비야와 내통한다. 그와의 혼사를 통해 권력의 자리를 노리는 유대 사람들이 생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위보다 개인의 입신을 추구한 자였다. 사사로운 관계와 이익을 위한 타협이 가져올 공동체의 어려움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안타깝게도 느헤미야가 떠나자, 이스라엘은 성벽을 건축하는 것을 보고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하던 도비야에게 하나님의 전 안에 있던 십일조와 헌물의 저장고를 내줄 정도로, 영적으로 둔감해졌다. 그 사이에 곳간은 비고, 거룩한 제의 기물들은 밖으로 쫓겨나고, 성전 기능마저 위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예배가 들어서야 할 마음이나 공동체의 골방에 도비야가 앉아 있다면 어서 비우고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이다.
-도비야는 성전 안에 거처를 두어 잘 보살피면서도 기업도 없고 땅도 없어 오직 십일조와 헌물에 기대어 사는 레위인들을 외면했다. 결국 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성전에서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성전에서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리 없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민장들을 꾸짖고 레위인들을 다시 부른다. 그러자 다시 백성들은 헌물을 내기 시작했다. 백성이 가져온 것을 곳간에 들이고 충직한 자들을 세워 분배하게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 사이에 섞여 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이방인을 철저히 가려 모두 내보냈다.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서, 다시 내 내 삶에 들어온 죄는 없는가? 어떤 모양이든 죄는 우리의 삶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백성들은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들었다. 나의 삶 속에도 늘 말씀을 듣는 삶을 유지해야겠다. 매일 묵상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지 말씀에서 발견했는가? 말씀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탄은 결코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탄의 공격을 몇 번 물리쳤다고 경계심을 풀면 안 된다. 혹시 하나님의 일을 비웃는 자와 가까운가? 쉽게 그들을 용납한다면, 사탄은 그들을 통해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줄을 알면서도 타협하고 포기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가장 좋은 시간을 알고 있다. 느헤미야가 봉헌식을 끝낸 후 잠시 바사로 돌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비웃던 도비야가 성전의 큰 방을 차지했다. 이처럼 마음에 항상 진리의 말씀을 두어 사탄이 틈을 얻지 못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느헤미야는 망설이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곧바로 죄악을 제거한다. 나의 삶 속에서도 죄가 있다면 타협하지 말고 곧바로 처리하라. 잘못을 깨달았다면 미루지 말고 과감히 끊어버리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또한 자신의 개혁 조치들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돌보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비야 사건은 개인적인 친분이 성전 질서를 무너뜨린 예다. 그 결과 레위인들의 몫은 사라졌고, 레위인들은 다시 생계를 위해 성전을 떠나야 했다.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작된 개혁은 중단되었고, 다시 영적 타락은 시작되었다. 늘 깨닫는다. 개혁은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지속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가치가 희석되어 있다. 아쉽게도 그 중심에 이런 학연, 혈연, 지연 등 친분관계가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느헤미야는 다시 돌아와 다시 개혁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있었다. 느헤미야의 시작도 기도였고, 성벽 공사나 개혁의 과정에서도 기도가 빠지지 않았다. 다시 개혁에 직면하고 있어도 그는 기도를 통해 감당한다. 기도가 이끈 개혁이었다. 기도하는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신실함의 열매가 아닐까?
*나는 지금 교회가 심히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는 정점의 시대에 하필(?) 목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아… 이것이 참 괴롭다.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그렇지만, 무너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 보다, 몇몇 친분관계 안에 있는 굵직 굵직한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말씀과 상관없고, 말씀을 빙자하여 호도하는 역겨운 행태들을 지켜보는 것이 더 괴롭다. 이에 동조하는 이들의 아우성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시대, 목사의 사명을 지고 있다니…
*그래서 결심해 본다. 제딴에 시대를 개혁한다든가, 거창하게 교회를 개혁한다든가 라고 외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게 맡겨주신 공동체만이라도 오롯이 말씀으로 목양하고 말씀으로 살아내는 본이 되어 아합의 시대 곳곳에 남겨두신 칠천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우리 더온누리공동체가 말씀 안에 남아있도록 최선을 다하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리를 늘 지키고,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과 소통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뜻을 분명히 알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공동체를 인도하는 소명에 충실하리라. 하나님 나라 진실한 공동체를 우리 공동체가 성실함으로 이루어 가는 것에 천착하리라.
*대형교회라고 하지만, 성도 개개인이 조직과 관리로 유지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목장에서 말씀을 통해 깊이있는 삶을 나누며,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에 반응하여 기꺼이 복음을 전하고, 이제 주님을 영접한 이들을 이끌며 함께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그런 살아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방향을 잃지 않겠다. 말씀에 반응하고, 기도를 통해 담대하게 순종하여 일상이 말씀을 누리는 삶으로 서 나가도록 돕겠다. 말씀에 반응하여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사역의 자리에 자원하여 기쁘고 즐겁게 감당하는 성도의 삶을 돕겠다. 무엇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 나라 복음을 누구라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전하는 성도들로 세워나가고 싶다. 예배의 감격이 있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게 하는 예배로 다듬고 싶다.
*이런 사명 감당하라고 이 시대에 목사로 부르신 것을 확신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리라. 말씀과 기도를 통한 개혁의 열매는 주님이 맺어주실 것이기에, 오늘 그저 물을 주고, 김을 매며, 내게 허락하신 목양의 텃밭을 말씀으로, 기도로 일구어 가리라. 주여 도우소서.
*주님, 나의 다짐이 꾸준히 지속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 아무리 급하더라도 세상, 가장 악한 존재와 손을 잡다니요. 죄송합니다. 분별하며 마음을 지키겠습니다.
*주님, 느헤미야의 영성(말씀과 기도)을 본 받아 저도 맡겨주신 목회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