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13:15-31 느헤미야의 개혁 2
세 번째 개혁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대인들이 성내로 들어와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발견하고 안식일에는 모든 상거래를 금지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혼합결혼과 관계된다.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 일에 참여한 엘리아십의 손자 ‘하나’를 추방한다.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는 에스라-느헤미야에서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소개된다. 두 책 모두 공히 ‘마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을 정죄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에스라가 느헤미야에 비해 더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마알’은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행동’을 가리키며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마알’은 부지중에 하나님이나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한 범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사용된다. 이 ‘마알’의 죄는 속건제를 드림으로 처리가 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서는 이 용어를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에 사용함으로 통혼을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범죄, 즉 언약적 범죄의 성격으로 규정한다.
1. 느헤미야의 안식일 개혁(15~22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15절). 이는 이전에 자신들이 맹세한 것을 어기는 행동이었다(느 10:31). 백성들은 안식일에 노동하고 상거래를 함으로 안식일을 한 주간의 다른 날과 동일하게 여겼다(15~16절). 백성들은 술 틀을 밟고, 곡식단과 포도주와 여러 가지 과일들을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그것을 판매했다. 심지어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상주하며 유다 백성들과 상거래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알린다(15~17절). 느헤미야는 나라의 멸망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고 있다(18절; 렘 17:19~27). 18b절의 ‘우리와 이 성에 내린 이 모든 재앙’은 예루살렘의 파괴, 나라의 멸망과 포로를 가리킨다.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이어서 안식일 준수를 위한 실제적인 조처를 한다(19~22절).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에 성문을 닫고 경비를 세워 물건들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19절). 느헤미야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성 밖에서 밤을 새웠는데, 성안의 백성들이 밤중에 몰래 물건을 사러 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20절).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강한 어조로 꾸짖고 경고한다(21a절). 느헤미야의 경고는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 이후 장사꾼들이 다시 안식일에 성안에 들어오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보도한다(21b절).
느헤미야는 추가적인 조치로 레위인들에게 명령하여 성문을 지키도록 한다(22a절). 그리고 이전에 성전 곳간을 정화하던 때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다(22b절).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실한 사랑과 자비 베푸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안식일 준수’는 십일조와 더불어 느헤미야가 강조한 대표적인 율법 규정이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관심은 이미 유다 멸망 전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후 안식일 준수는 할례, 음식법(정결법), 준수와 더불어 유대인의 증표로 인식된다. 느헤미야가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2.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지함(23~31절)
느헤미야가 단행한 네 번째, 다섯 번째 개혁은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지한 것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했던 이전의 맹세(10:30)를 어기고,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이 유다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동족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공동체의 연합과 일체성을 깨뜨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한다. 그는 이 일에 관련된 백성들을 책망하고 저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머리털까지 뽑기까지 한다(25a절). ‘머리털을 뽑다’로 해석되었으나 ‘수염을 뽑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고대에서 수염은 ‘남성성’에 대한 상징으로, 수염을 뽑히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않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게 한다(25b절).
이어서 그는 이 일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솔로몬왕의 타락을 실례로 제시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왕이었지만, 정략결혼을 통해 맞아들인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했다(26b절). 솔로몬의 타락은 나라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 느헤미야가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행동을 ‘큰 악’이요 ‘하나님께 범죄하는 행동’으로 규정한다(27절). ‘범죄하다(마알)’로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의미하는 언약적인 용어다. 느헤미야가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언약적 범죄’로 간주하였다는 것은 귀환 공동체가 처한 위기를 방증한다.
이방 여인과의 통혼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 것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라는 공동체 정체성과 관련된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 땅의 백성’과 ‘이방 지역의 주민들’은 제의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정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거룩함을 침해하는 행동이고, 성전을 오염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되어 민족의 멸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느헤미야를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본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이 이런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28절).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한 명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딸을 아내로 취한 것이다(28절). 산발랏은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함께 성벽 재건을 방해한 유다의 대적이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의도적으로 제사장 가문과 관계를 맺음으로 지속적으로 유다 공동체를 와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집요하고, 그들의 음모가 얼마나 교활한 방식이었는 지를 잘 보여준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엘리아십의 손자에게서 제사장 자격을 박탈하고 공동체에서 추방한다(28b절).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다(29절). ‘그들’은 28절에 언급된 인물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할아버지 엘리아십과 아버지 요야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느헤미야가 이들을 정화한 법적인 근거는 제사장 직분에 관한 규정이다(레 21:7~14). 이 규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아내로 취해야 한다(레 21:13~15). 대제사장의 혈통인 엘리아십의 손자는 이 규정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엘리아십의 손자의 행동은 제사장 직분을 더럽힌 행동이었기에, 별도의 정결의식이 필요했다(30a절). 그 후에야 비로소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직무에 복귀시킨다(30b절).
느헤미야는 끝으로 백성들에게 지시하여 번제단에 쓸 나무와 곡식의 첫 열매를 성전에 가져오도록 한다(31a절). 이는 성전 제의와 운영에 대한 느헤미야의 관심을 보여준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짤막한 기도로 회고록을 마친다(31b절). 그의 기도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했던 느헤미야의 경건한 신앙을 잘 보여준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기도)이 느헤미야 개혁의 원동력이었다.
느헤미야의 결말은 에스라처럼 열려 있는 형식을 취한다. 즉, 개혁의 진행만 있고 끝은 없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은 현재진행형이다. 종교 개혁자의 표어처럼 “개혁된 교회(공동체)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개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엡 4:13).
나는?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맹세도 저버렸다(10:31). 경제적 이익 앞에서는 신앙도 소용없었다.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표현인지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안식일 위반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강력한 불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선조들도 안식일을 무시하여 멸망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지도자들에게 잘못을 일깨운다. 금요일 저녁부터, 심복을 세워 장사하는 자들의 성문 출입을 막았으며, 심지어 밤에 몰래 거래하려고 상인들이 성 밑에서 자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타격을 주는 조치였고 그래서 위험한 개혁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기도하며 추진하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내가 포기하고 손해 보며 더 나아가 어려움을 자초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는 것을 목격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자녀들이 외국어에는 능통해도 히브리어로는 대화하지 못한 것이다. 언어의 상실은 율법에 기초한 민족 정체성의 상실이요 하나님과의 소통 단절을 의미하는 비극적인 일이었다. 느헤미야는 혼합결혼으로 혼합종교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은 솔로몬 시대를 떠올리며 그것이 유대 사회의 존립과 직결된 얼마나 중한 죄인지를 강조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엄히 책망하고, 두어 사람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기까지 했다.
-대제사장이 앞서서 통혼하고 있었다. 그것도 느헤미야를 반대하고 죽이려 했던 사마리아 통치자 산발랏 가문과 혼인한다. 신앙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대대로 자리를 보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그를 쫓아내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다시 세워 임무를 맡긴다. 그는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기억하여 주시기만을 바랐기에 과감하게 개혁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말씀에 충성한 사람을 인정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31절).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이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성실히 따르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하여 사소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보기에 그것은 “큰 악”이었다. 이전에 조상들이 범하여 대가를 치른 것과 같은 죄악이었다(15~18절). 말씀대로 살리고 약속하고 다짐했으면서도(10:31), 여전히 저지르고 있는 죄가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삶에 있는 죄악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조처를 했다(19~21절). 그런데 어떤 이들은 느헤미야의 이런 조치를 과소평가했다. 조금만 버티면 이 제도도 완화되리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와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에 자리 잡은 비신앙적인 요소가 무엇일까?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어떤 실제적인 조처를 하려고 노력하는가? 스스로 생각되기에 좀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야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음을 알았다(22절).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다면 우리의 의지나 노력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삶에 하나님의 자비가 늘 임하도록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주님, 언제나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