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벨론 강가에서 [시편 137:1-9]
 – 2025년 12월 07일
– 2025년 12월 07일 –
시편 137:1-8 바벨론 강가에서
    
유다 멸망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한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 신세가 되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잊지 않는다. 또한 멸망의 날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을 하나님이 그대로 갚아주시기를 고대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꾼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이 그곳에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탄식하면서 원수들의 심판을 기원하는 시다. 유다의 바벨론 유수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주전 605년부터 다니엘과 세 친구 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단 1:1), 597년에는 여호야긴 왕, 에스겔 선지자 등이 끌려갔으며(왕하 24:12~17, 겔 1:1~2). 마지막으로 586년 유다가 멸망하여 시드기야와 백성들이 끌려갔다(왕하 25:1:21; 렘 39:1). 7절은 이스라엘의 원수로서 바벨론(1, 8절)과 함께 에돔이 언급되는데, 이는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할 때 에돔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에돔의 악행은 오바다 1:11~14; 예레미야애가 4:21~22; 에스겔 25:12~14; 35:5, 12~15에도 기록되었다.
    
    
    
1. 바벨론 포로들의 애곡(1~4절)
유다 백성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애통한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주전 722년) 지 약 140년 후, 남 유다도 바벨론에게 무너졌다(주전 586년). 유다의 멸망 3년 전인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먼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왕하 25:1~2). 시드기야 11년에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 및 모든 집을 불사르고 성벽을 헐어, 유다를 완전히 망하게 했다(왕하 25:9~12). 멸망 전후에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감으로써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늘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한 무리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다. “여러 강변”은 유프라테스의 강변들을 말한다. ‘바벨론’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국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란 뜻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뜻하며, 바벨론은 이 두 강 중 유프라테스강 남동쪽에 자리 잡았다. 이 강은 총길이 2,850km로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강이며, 에덴동산과 아르메니아 산악지대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역을 관통하여, 남쪽에서 티그리스강과 합류한 후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몸은 바벨론에 있으나 마음은 시온에 있다. 이 땅 바벨론에서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다. 시온을 생각하니 애통의 눈물이 흐른다. ‘시온’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지칭하거나 대체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시온은 다윗이 점령해서 거주했던 곳이므로, ‘다윗성’으로도 알려졌다(삼하 5:7, 9). 이후 솔로몬 때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축되자(대하 3:1), 예루살렘과 시온은 ‘하나님의 산’, ‘거룩한 산'(시 2:6)으로 불렸다. 이처럼 시온은 다윗 왕의 영화나 하나님의 임재가 깃든 곳이지만, 이제는 바벨론과 이방 나라에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다. 열방 중에 큰 나라요 공주 같았던 시온이 열방의 노예가 되었다(애 1:1). 무리가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는 순례길에서 기대에 차 바라보던 시온산(시 122:2; 125:2)이 기억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장소가 되었다.
    
이방인들은 시인과 무리에게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3절). 그들은 시온에서 동포들을 포로로 잡아 온 자들이요, 포로들의 조국과 고향을 폭력으로 황폐케 한 자들이다. 그들은 포로의 주인이 되었고, 자기만족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 그것도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때 수금과 비파를 타고 나팔과 피리를 불었음을 참작한다면 바벨론 사람들이 요구하는 노래는 다름 아닌 “여호와의 노래”였다(4절).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땅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수 있을까?(4절). 4절의 ‘이방 땅’은 직역하면 ‘이방의 흙’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부정한 지역임을 암시한다. 노래를 거절한 그들은 수금을 강변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다(2절).
    
    
    
2.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5~6절).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마음을 “만약에”라는 가정법 형식 문장 셋을 통해 나타낸다. 첫째, 시인은 혹시라도 예루살렘을 잊게 된다면, 수금을 연주하는 그의 오른손도 이미 수금 타는 법을 잊을 것이라고 말한다(5절). 둘째와 셋째 가정법은 연결되어 하나로 나오는데, 만약에 시인이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예루살렘을 자기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고 저주한다.
    
이 문장들이 표현하듯,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은 단지 ‘잊지 않는 행위’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할 수 없다. 비록 포로 신세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쪽을 택했다(1절).
    
즉 시인은 어떤 상황이든 예루살렘의 회복을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결정했다.
    
    
    
3.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기원(7~9절).
이방 땅에서 예루살렘을 추억하는 백성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먼저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과 에돔 족속에 대해 울분을 터뜨린다. 이에 에돔 족속에 대해 보복의 기원을 한다(7절). 7절은 ‘에돔 자손들을 대항하여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장자인 에서의 별명(창 25:30)이며, 후에는 에서의 족속을 지칭하게 되었다(창 36:9). 에서와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과 형제지간이면서도 야곱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느끼고 이스라엘 역사 내내 시시때때로 못살게 굴었다(창 27:41; 32:1~2; 민 20:14~21; 왕하 8:20~22; 대하 25:11~14; 암 1:11~15; 겔 35:5).
    
특히 유다 왕 시드기야 11년(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다를 함락시켰을 때(왕하 25:1~21; 렘 39:1) 에돔도 가담했다(겔 35:1~36:15; 암 1:1; 옵 1:11~14; 애 4:21~22). 유다 포로들은 당시에 에돔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예루살렘의 기초까지’라고 외치며 유다를 공략한 일을 떠올린다. 에스겔 35:12에서도 에돔은 ‘이스라엘 산들이 황폐하였고 우리에게 먹이로 주어졌다’라며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들의 말을 단순히 유다에게 행한 폭력으로만 여기지 않으셨다. 이들의 자랑과 욕은 하나님을 거슬러 우쭐대고, 하나님을 거슬러 교만한 말을 퍼부은 것으로 여기셨다(겔 35:3). 그러므로 에돔이 이스라엘의 유업이 황폐된 것을 기뻐한 것처럼, 하나님은 에돔의 세일 산과 그 전부를 황폐하게 함으로써 분명히 심판하실 것임을 예고하신다(겔 35:3~9, 14~15).
    
에돔을 향한 응징의 기도는 8~9절에서 바벨론을 향한 보복의 기원으로 넘어간다. 시인과 그의 무리는 바벨론을 ‘멸망할 딸’로 부른다(8절). ‘딸’은 바벨론을 의인화한 표현이다(애 4:21~22). 이들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바벨론에게 갚는 자가 행복한 자이며, 그들의 아이들을 잡아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한 자임을 선언한다(8~9절). 이런 저주의 기도는 잔인하게 들리나, 이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잔인한 학살과 악행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도를 통해 출애굽기 21:23~25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처럼 하나님께 동등한 보복을 요청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9절의 기도는 8절의 기원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7절의 에돔에 대한 기도와 8~9절의 바벨론 멸망과 심판을 구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을 기원하는 기도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대해서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렘 25:14~17절). 시간이 흘러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망하고, 이스라엘이 유다로 돌아오게 됨으로써(주전 538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대하 36:20~23; 스 1장).
    
    
    
나는?
-시편 137편은 노래 아닌 노래다. 유배지에서 회한의 눈물이 쏟아진다. 잃어버리고서야 맘껏 찬양할 수 있었던 날이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께 망할 짓을 했는지도 처절하게 깨달아 생각한다. 그 시절이 그립고 후회스러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지배자들은 조롱하듯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괴로워 운다. 찬양은 대범한 신앙 고백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곳에서 부르는 찬양은 조롱이 된다. 찬양을 부를 수 없을 때가 되기 전에 우리 고백과 찬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삶으로 화답해야 하지 않을까?
    
-시편 137편은 기억을 다짐하는 노래다. 이방 땅의 침략자 앞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시인에게 기쁨이었을 리 없다. 아무리 굴욕적인 상황에서 찬양하더라도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회복의 약속,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것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을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잊고 침략자를 기쁘게 하려고 찬양한다면, 수금을 타는 오른손이 말라도 좋고, 찬양하는 입술이 입천장에 붙어도 좋다고 맹세한다.
    
-시편 137편은 심판을 청원하는 노래다. 에돔은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그들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 나라의 불행을 기뻐했다. 하나님의 성이 그 기초까지 남김없이 무너지라고 저주했다. 시인은 에돔만이 아니라 바벨론의 심판도 확신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은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잊지 않으실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있어야 찬양할 수 있다.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신앙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을 버린 대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 시온에서 예배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강변에 모여 울고 있다(1절). 회한의 눈물이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아는 것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상이 아닌가? 하고 싶어도 못 할 때가 오기 전에 내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하는 삶에 최선이라는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 온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를 불러 자기들을 기쁘게 하라고 명령하자 이스라엘은 더욱 괴로웠다. 신앙의 박해 때문에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 그들의 괴로움이 곧 우리의 괴로움인 것을 잘 안다. 공동체인 우리가 그 괴로움을 공감하며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방 땅에서, 침략자 앞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참담한 조롱의 상황일지라도 시인의 마음은 단호하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회복의 약속,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심이다(4~6절). 만약 이를 잊고 예루살렘보다 침략자를 기쁘게 하려고 찬양한다면 수금을 타는 오른손이 말라도 좋고, 찬양하는 입술이 입천장에 붙어도 좋다고 맹세한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의무임을 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우리 삶의 가장 즐거운 일이, 나의 삶에 가장 기쁘고 기쁜 일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일임을 잊지 않겠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형제였지만, 형제 나라인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불행을 기뻐했다. 결국 그 성은 기초까지 남김없이 무너지리라는 저주를 받았다(7절). 특히 주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의 불행을 보며 기뻐하거나, 행복을 보며 시기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살펴볼 일이다.
    
*시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했다. 이스라엘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은 바벨론의 죄악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멈출 수 없는 탐욕으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바벨론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섭리를 굳게 신뢰해야 할 이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다.
    
*삶의 걸음 가운데, 누구나 ‘바벨론 강가(후회와 눈물의 장소,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절망이 결론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그 자리가 절망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는 자리이어야 함을 기억하자.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잊지 말자.
    
    
    
    
*주님, 찬양의 기회와 자리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찬양하렵니다. 혹시 찬양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할지라도, 찬양의 입술과 마음을 굳게 지키겠습니다. 이것처럼 기쁘고 즐거운 것이 없음을 알고 소중히 누리겠습니다.
*주님,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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