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시편 139:1-12]
 – 2025년 12월 09일
– 2025년 12월 09일 –
시편 139:1-12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각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 그의 지혜와 사랑으로 각 사람과 친밀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세상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가려질 수 없으며, 모두 그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을 수 있다.
    
    
    
1.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1~6절)
시편 139편은 제5권의 ‘다윗의 시’ 단락(138~145편)에서 두 번째 등장하는 시로, 지혜, 탄식, 간구 등 복합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18은 한 단락을 이루어 하나님의 지식(1~6절), 편재성(7~12절), 사람의 창조와 그를 향한 계획(13~18절)에 대한 시인의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경이로움을 찬양한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묵상이다.
    
1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하늘에서도 땅의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를 살피고 아시며, 그들을 마땅히 다스리심을 고백했다. 본 시편은 시인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이 다 아심에 주목하여 이에 탄복하고 감사한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펴보셨고, 자기를 아셨다고 고백한다(1절). ‘살피다’는 ‘조사하다, 정탐하다, 감별하다’ 등의 뜻이다. 3절의 ‘살피다’는 ‘(자로) 재다’의 뜻으로 하나님이 시인을 자세히 점검했음을 부각한다. ‘알다’는 지식적인 습득이 아닌 하나님과 시인의 유기적인 관계를 함축한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점검 영역과 아시는 내용은 첫째, 시인의 일상의 활동을 비롯한 모든 행동이다. 그의 앉고 일어섬, 나가고 누움이 포함된다(2~3절). 또한 그는 시인의 모든 행위를 익숙히 아신다(3절). 둘째,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셔도 시인의 생각을 인지하신다(2절). 셋째, 하나님은 시인이 한마디를 발설하기도 전에 무엇을 말할지 다 아신다(4절). 이와 같은 표현들은 하나님이 시인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아셨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인을 아시는 것에 있어 내용이 빠짐이 없고 정확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시인은 악인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 있는 상황(19~24절)인데, 이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면밀하게 살펴 진의를 아심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고 떳떳함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모든 것을 파악하신 하나님은 그의 앞과 뒤(전체)를 안수하심으로써(5절), 그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신다. 하나님의 안수는 시인의 떳떳함을 확증한다. 이에 시인은 자신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너무 높아서 움켜잡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6절). 하나님의 전지하심, 이를 통해 시인과 각 사람을 세심히 돌보시는 점이 놀랍고,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함을 깨닫는다. 시인은 하나님 지식의 풍요, 무관함, 깊이에 탄복하여 감탄과 감사를 금치 못한다.
    
    
    
2.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7~12절)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다. 공간의 제약 속에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편재성의 경이로움은 미루어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시인은 ‘사람이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라고 외친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향하거나 얼굴빛을 비추는 행동은 그의 은혜나 호의, 축복을 베푼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민 6:26; 시 4:6; 80:19).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의 실제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임재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부각한다. 하나님의 편만함은 시공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그들과의 관계의 영역 속에서도 긴밀히 나타난다.
    
시인은 먼저 수직적인 공간인 ‘하늘’과 ‘스올’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어디에나 계신다. 아니 계신 곳이 없다)을 묵상한다(8절). 물리적인 장소의 가장 극과 극인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침상을 펼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창 37:35; 시 88:3~7)으로 구더기와 지렁이가 덮인 곳(사 14:11; 욥 24:20) 이다. 또한 하늘은 천사들과 의인을, 스올은 궁극적으로 죄인을 기다린다(욥 24:19; 계 21:8). 또한 하늘은 광명이 있으나, 스올은 흑암으로 덮였다(욥 17:13). 스올에 내려간 죄인은 건져줄 자가 없지만, 스올에 내려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이 소리를 들으시며(욥 2:2), 그 권세에서 속량하신다(시 49:15; 호 13:14). 이처럼 하나님은 서로 극과 극의 장소인 하늘과 스올에도 실재하신다. 그의 능력과 다스림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9~10절은 ‘새벽’과 ‘바다 끝’을 대조한다. 수평적 공간과 방향 속에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하여 성도를 보살피시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 지속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를 직역하면 ‘내가 새벽의 날개를 들어 올리며’이다. 해가 떠서 그 빛이 날개처럼 펴진 것을 묘사하면서 동녘의 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다 끝’은 ‘서쪽 끝’을 지칭하는 것으로 시인이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하나님의 손이 그를 인도하며,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꼭 붙들어 주실 것을 의미한다(10절).
    
11~12절은 ‘흑암’과 ‘빛’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편재성과 그의 다스림을 묵상한다. 앞서 묵상한 내용과도 연결이 되는데, ‘하늘에 계신 하늘과 동트는 곳’은 ‘빛’과 연결되고, ‘죽은 자가 있는 스올과 해가 지는 곳’은 ‘어둠’과 연결된다. 빛과 흑암은 물리적인 밝음과 어둠을 나타내므로 일차적으로는 문자적 해석이 적절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은 선과 악, 은혜와 곤경, 구원과 심판, 질서와 무질서 등의 영적, 도덕적 암시도 부분적으로 포함된다. 11절의 ‘덮고’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이 빛에 있으나, 흑암이 그를 짓눌러(덮고), 그의 주변에 있는 빛이 밤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빛인 하나님에게 이 어둠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빛이 온 세상을 비추듯, 빛인 하나님이 세상에 편만하시다. 흑암은 그 빛에 의해 물러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에게 흑암은 빛이 된다. 즉, 어려움과 고통이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평안과 보호가 함께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욥이 고백했듯,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흑암 속에서도 그의 광명을 힘입어 다닐 수 있다(욥 29:3; 시 23:4).
    
    
    
나는?
-시인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넓게, 또 깊게 우리를 아시는지 우리는 헤아릴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뜻하시며 다스리시니, 그가 모르시는 것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까지 다 아신다. 그래서 우리를 기이한 능력과 지식으로 보호하실 수 있고, 형통이나 고난의 상황 모두에서 우리를 당신의 멋진 작품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행복도 없고, 모든 걸 포기해도 좋을 만큼의 절망도 없다. 끝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우리 삶을 꾸려가시도록 맡겨드리고 기대할 뿐이다.
    
-시인은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한다. 어떤 상황, 어떤 장소로부터도 하나님은 우리와 떨어질 수 없다. 하늘이든 스올이든 바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주의 임재에서 벗어난 곳은 없고, 아무도 감춰지거나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보이지 않아도, 멀리 계신 듯하여도, 나에게 무관심한 듯 보여도, 무능력하게 느껴져도,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겪고 계시며, 늘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시인은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다. 빛과 어두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일반이다. 따라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 아무리 완악한 세상도 하나님에게는 포기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 선과 의 속에서 악과 불의를 보고, 사람들의 악과 불의를 가지고도 선과 의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절망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먼저 포기하면 안 된다.
    
*자기 백성의 형편을 샅샅이 살피며 모든 것을 환히 아신다(1~4절).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 길을 가거나 자리에 눕는 것, 소소한 언행이나 마음속 동기까지도 다 아신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이 세상을 거슬러 살려고 발버둥 치는 성도에게는 큰 위로지만, 두 마음을 품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두려운 일이다. 일상의 삶에서 여전히 오해와 시련을 겪고 있다면, 내 모든 행실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지 말고, 매 순간 올곧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기 백성 가까이 계시면서 모든 삶을 에워싸고 보호해 주신다(5~6절). 우리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시지 않고 지켜보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 주신 은혜가 그저 놀랍고 감사하기만 하다.
    
*자기 백성이 어디 있든지 함께하셔서 이끌어 주신다(7~10절). 하늘이든 스올이든, 동쪽 끝이든 서쪽 끝이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왼손으로는 내 손잡아 이끄시고, 오른손으로는 날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오늘도 내 삶의 손을 주님께만 맡기리라. 그 권능의 손을 의지하며 동행하리라.
    
*악이 선을 삼킨 듯한 캄캄한 시간도 빛인 하나님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하나님은 성도의 무죄함을 아시면서도 시련의 밤을 허락하시지만, 결국 선(빛)이 되게 하신다. 이를 신뢰하고 꿋꿋하게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 무죄함을 주장한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고, 악인들의 고소는 빛(진실)을 다 가려 버릴 것처럼 격렬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아시며 한순간도 자기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주 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사람도, 주를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렘 23:24). 필요에 따라 가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는 습관을 버리라.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울 만큼 모든 일을 주님께 공개하며 투명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계신 주님의 은혜로 제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저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담대하게 믿음을 드러내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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