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3-24 창조주, 심판주, 구원의 주 하나님
하나님이 세상의 각 사람을 창조하신 일은 심히 놀랍다. 창조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지혜와 능력이 지대하므로, 그 일부조차 간파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각 사람에 대한 수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에 대한 합당한 구원과 심판도 예고된다.
1. 나를 지으신 하나님(13~18절)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고(1~6절), 어디에나 계신(7~12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잉태되고, 태어나, 살아가는 생에 전체에, 그의 세밀한 섭리하심을 나타내신다(13~18절). 13절에서 시인은 그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그의 내장을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시인의 몸 안의 모든 장기와 필요한 것들을 제조하셨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이 그를 모태에서 수놓듯, 실로 짜듯,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음을 표현한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14절)’라고 말하는데, 이 번역을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이 놀랍기 그지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문장을 직역하면 ‘내가 기묘하므로 다르게 대우받았기 때문이니이다’이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물인 것에 더 초점을 두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만드신 것들)’의 놀라움을 잘 알고 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감탄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14절).
하나님의 창조는 그와 그의 피조물 관계가 첫출발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시인이 모태에서 형체(뼈들)와 형질(태아)을 이루어 갈 때에도 이미 그를 보셨다(15~16절). 시인이 지음을 받은 곳으로 ‘은밀한 곳’과 땅의 깊은 곳’이 언급되는데(15절), 둘 다 어머니의 ‘태’의 비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이다. ‘땅의 깊은 곳’이란 표현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음(창 2:7)을 암시하며, ‘깊은 곳’은 ‘은밀한 곳’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신비롭게 지음 받았음을 뜻한다. ‘기이하게’는 ‘수놓아 만들어지다’의 뜻이며, 장인이 형형색색의 실로 짜서 옷감을 만들고, 옷에 장식을 수놓듯,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아름답고 정교하며 창조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보셨다’라는 표현은 한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보살핌과 계획, 개입, 주관 안에 있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출생 과정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을 미리 다 아신다. 시인은 자기가 사는 날이 정해졌고, 그가 하루도 살지 않은 때에도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진술한다(16절). 이것은 사람의 운명이나 한계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다. 각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여정을 근본적으로 나타내며,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한 나름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셨음을 함축한다. 또한 하나님이 각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생애 전체를 돌보실 것을 암시한다.
17~18절에서 시인은 자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고 그 능력에 놀란다.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보배롭다(17절). 그들의 대한 하나님의 보배로운 생각이나 계획이나 목적은 모래보다 많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그의 생각까지도 밝히 아시나(2절), 인생은 하나님이 가진 생각의 일부도 가늠할 수 없다(17~18절; 시 40:5; 잠 3:11; 롬 11:33~34). 하나님은 각 인생에게 이토록 세밀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과 친밀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 이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을 인지하며, 그의 임재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2. 심판과 신원의 하나님(19~24절)
19~22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한다. 19절부터는 내용과 분위기가 ‘감탄에서 탄식으로’ 전환된다. 1~18절 단락에서는 인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시인의 감탄이 가득 차 있으나, 19절부터는 갑작스럽게 악인을 향한 시인의 응징 기도로 시작하여, 그들에 대한 고소와 탄식이 빗발치고(19~22절), 뒤를 이어 하나님의 신원과 인도를 바라는 시인의 간구로 마무리된다(23~24절).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속에 있는 시인은 그와 반대 무리인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확신한다. 그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한 수많은 계획을 그의 섭리로 주관하심을 인지했다. 또한 그의 다스림 속에는 그를 사랑하는 자와 그를 미워하는 자를 향한 구원과 심판의 계획이 있을 것임도 확신한다. 시인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한 수많은 계획을 그의 섭리로 주관하심을 인지했다. 또한 그의 다스림 속에는 그를 사랑하는 자와 그를 미워하는 자를 향한 구원과 심판의 계획이 있을 것도 확신한다(19절).
악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없는 자들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이다. 악인에 대하여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직역하면 피들의 사람들, 19절)로 불리는데 이는 그들의 폭력적인 면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악의로 말하며, 그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원수들(20절)’이다. 시인은 악인들을 향하여 ‘나를 떠날지어다(19절)’라고 명령한다. 이는 자기에게 저질러온 악행을 그만두라는 의미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악인의 무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음과 그들이 결코 시인과 그의 공동체에 낄 수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이어 21~22절에서는 “미워하다”라는 동사가 반복되며 ‘하나님에 대한 악인의 미움’과 ‘악인에 대한 시인의 마음’의 관계를 표현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에 대항하여(21절에서는 ‘치러’로 번역)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원수(20절)’인 악인들은 곧 ‘시인의 원수(22절)’가 된다. 악인에 대한 시인의 미움은 큰 적대감이므로 시인은 그들 무리와 완전히 분리된다(22절). 악인들이 시인의 무리에 낄 수 없듯이(19절), 시인도 그들의 무리와 함께할 수 없다(시 1:1~2, 5). 한편, 다른 시편에서는 의인을 억압하고 해를 끼치는 악인을 단순히 ‘의인의 원수’라 부르지 않고, ‘여호와의 원수’라 불렀다(시 37:20). 의인을 핍박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에 반역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신원을 간구(23~24절).
시인은 하나님이 그를 살피셨고 아셨음을 고백하며 기도를 시작했다(1절). 이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살피고, 마음을 아시며, 조사해 보고(시험하사, 23절), 자기 생각을 파악하시길 구한다. 이 간구는 액면 그대로 간구가 아니다. 이는 앞서 악인에 대한 진술(19~22절)이 시인의 개인적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자신이 불의에서 떠난 자이며 하나님께 헌신된 자임을 증명하려는 방책이다.
이미 하나님은 그를 점검하셨고 아셨다(1절). 그의 모든 언행을 아시므로, 시인은 그 앞에 떳떳하다. 시인은 자기 안에 ‘고통/곤경의 길(악한 행위로 번역됨)’이 있는지 하나님이 보시고, ‘영원의 길(영원한 길로 번역)’로 인도하시길 간구한다(24절). ‘고통의 길’은 ‘영원의 길’의 대조 어구이므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 고통을 주거나 고통에 이르는 길, 악의 길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인생 여정의 길을 맡긴다.
나는?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아시는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한 올 한 올 옷감을 짜듯 시인을 정성스럽게, 기이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니 시인 안에서 어느 한 곳 하나님께 감춰질 수 있는 곳이 없고, 하나님께서 시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아신다. 내가 내 삶을 가장 잘 꾸릴 수 없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정직해도 끝내 진실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다. 그분이 보여주신 만큼만 알 뿐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너무나 무궁하고 지혜로워서 헤아릴 도리가 없다. 그것이 고난받는 시인이 유일하게 소망을 간직할 근거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함께해주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야속한 분으로, 지혜 없는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모른다고 인정하기 전까지 나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다.
-악인들에 대한 처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 내가 할 것은 악한 자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하나님의 무능과 무관심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 원수의 마음은 아닌지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마음을 시험하고 살펴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달라고 요청한다.
*손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옷감을 짜듯 모태에서부터 장부를 만드시고, 배 속의 나를 형성하셨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장 은밀한 부분을 손수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숨길 수 있을까? 창조 이전부터 나를 아시기에 내가 우연히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으로 존재함을 말해준다. 놀랍게도 내 인생이 시작하지도 않은 때에 내 모든 삶을 향한 계획을 생명책에 기록해 두신 것은, 아직 살아 보지 않은 날에도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신뢰하게 한다.
*시인은 힘겨운 날들을 보내면서도 자신이 존재하는 신비 자체를 잊지 않는다.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고난을 이겨낸다. 자신에게 애매히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각은 보배로우시며, “하나님은 자기와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다(14, 17, 18절). 무수한 근심들로 새벽녘에 잠이 깨고, 깊은 한숨이 끊이지 않을 때, 나를 창조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미워한다(19~22절). 구별된 백성으로 악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또한 세상 편이 아닌 하나님 편에 서겠다는 결심이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인간의 위대함만을 추켜세우는 이 세상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다.
*시인은 악인을 향한 자기 마음이 혹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교만은 아닌지 살펴달라고 요청한다. 회개한 죄인으로 생명을 얻을지언정 교만한 의인으로 자기가 비판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나와 공동체의 눈 안에 있는 “자기 의”의 들보를 볼 수 있는 것이 은혜다. 겸손이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깊이가 놀랍기만하다. 늘 하나님과 동행한 그의 삶의 아우라에서 나오는 고백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시고 열어주신 넓고 깊은 이해에서 오는 고백을 읽노라면, 나도 다윗처럼 주님과 이렇게 깊이 교제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주님, 창조주 하나님을 확신하기에, 어떤 형편에서는 주님의 신비한 손길이 여전히 저와 함께하심을 신뢰하겠습니다.
*주님, 내 안에 ‘자기 의’의 들보가 있는지 늘 살펴보겠습니다. 제게 허락하신 삶에 늘 겸손하기를 구합니다.






